런던 하늘에 울려 퍼지는 권위, 음악과 정치
이번에 아는 척할 작품은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 영국에서 활동한 헨델의 정체성을 반영해, 이름을 독일식이 아닌 영국식 표기로 사용하고자 한다)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HWV 351)"다.
음악, 음향학, 기호학, 사회학, 심리학, 미학, 역사, 철학, 정치, 수사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아는 척을 해보자.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1749년 4월 27일 런던 그린 파크(Green Park)에서 거행된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 1748) 체결 기념 축하 행사를 위해 작곡되었다.
이 조약은 8년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을 종식시킨 평화 협정이었다.
전쟁의 발단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의 사망이었다.
그에게는 남자 후계자가 없었고,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카를 6세는 이를 보장하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포하고 주요 유럽 국가의 승인을 얻었으나,
그가 사망하자 여러 국가가 이를 무시하고 오스트리아의 영토 분할을 시도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을 침공하였다.
이후 프랑스, 바이에른, 스페인 등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했고, 이에 대응하여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며 세력 균형을 유지했다.
전쟁은 중부 유럽과 플랑드르 지역뿐 아니라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 식민지로까지 확대되었다.
1748년 체결된 엑스라샤펠 조약은 전쟁을 종결시키고 유럽의 정치 질서를 재조정했다.
주요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공식 인정
2.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승인
3. 전쟁 전 영토 상태로 복귀 (status quo ante bellum)
4.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점령지 상호 반환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주요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여했지만, 단순히 합스부르크 왕조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고 해상과 식민지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와 함께 프랑스군과 싸웠고, 해상과 식민지 전선에서는 프랑스의 무역로를 공격하며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쟁은 영국 내에서 ‘조지 왕의 전쟁(King George’s War)’으로 불렸다.
전쟁 종결 후 영국은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식민지 전선에서는 점령지를 상호 반환하면서 실질적 이익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국제 외교의 중심적 위치를 확보했다.
다만, 명확한 승리나 영토 확장을 가져오지 못한 소모적 평화였다는 점에서 국내외적으로 비판에 직면했다.
엑스라샤펠 조약 체결을 기념한 불꽃놀이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지닌 공공 의례였다.
국왕 조지 2세는 이를 통해 전쟁 이후 왕실의 권위와 통치 정당성을 대중에게 확인시키고자 했다.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바로 이러한 목적에 맞춰 작곡되었으며,
왕권의 위엄과 평화 회복을 상징하는 공식적 '선전음악(Propaganda Music)'으로 기능했다.
결과적으로 이 행사는 정치적 의미와 문화적 의미를 동시에 담은 국가적 행사로 기록되었다.
헨델의 악기 편성을 둘러싼 조지 2세와의 논쟁은 작품의 정치적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헨델은 전통적인 오케스트라 편성을 원했지만, 조지 2세는 “현악기는 제외하고 군악기만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 단순한 음악적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를 담은 결정이었다.
조지 2세는 영국 국왕 중 마지막으로 직접 전장에 나선 군주였다. 그의 군사력은 단순한 국가의 힘이 아니라, 왕권의 정당성을 상징했다.
엑스라샤펠 조약이 형식적인 평화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많았던 만큼, 축하 음악은 ‘승리 없는 평화’를 ‘군사적 영광’으로 포장해야 했다.
조지 2세의 목적을 고려해 헨델이 구성한 편성은 24대의 오보에, 12대의 바순, 9대의 트럼펫과 9대의 호른, 여러 세트의 팀파니로 이루어졌으며, 판본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현악기의 부드러움 대신 금관과 타악기의 웅장한 울림이 선택됐다.
야외 공연이라는 특성도 이러한 선택을 뒷받침했다. 현악기는 바람에 쉽게 묻히지만, 금관과 타악기는 멀리 전달된다. 하지만 단순한 음향적 결정뿐만이 아니라, 국왕의 메시지를 런던 전역에 울려 퍼지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이 음악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청각적 충격이었다. 복잡하고 냉소적인 여론을 무시하며, ‘우리는 승리했고, 평화를 얻었다’는 메시지를 군중에게 강제 주입하는 확성기 역할을 했다.
1717년부터 1719년 사이, 헨델은 조지 1세를 위해 "수상음악(Water Music)"을 작곡했다.
템스 강 위에서 열린 왕실 보트 행렬과 연계된 야외 음악 행사로, 주로 귀족을 초청한 왕실 중심의 개인적 이벤트였다. 음악은 화려하고 웅장했지만, 당시 음악은 왕실의 오락과 권위 과시가 중심이었다.
반면, 1749년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완전히 다른 성격인 정치적 목적이 행사 전체를 관통한다.
조지 1세의 수상음악이 귀족 중심의 문화적 오락이었다면, 조지 2세의 축제는 정치적 메시지와 국민감정 조율이 결합된 공공 정치 예술이었다. 불꽃놀이는 음악과 함께 왕실 권위와 국가적 환희를 동시에 선포하는 청각적·시각적 정치 도구가 되었고, 헨델의 작품은 단순한 축하곡을 넘어 영국 군주제의 상징적 문화 자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축제 전부터 헨델의 음악과 불꽃놀이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공식 행사 6일 전, 헨델이 벅스홀 가든(Vauxhall Gardens)에서 가진 공개 리허설은 그 자체로 사회적 사건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2,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입장료를 지불하고 참석했고, 군중이 너무 많아 런던 다리가 3시간 동안 마비되고, 마차와 보행자들 사이에 작은 충돌이 발생하는 등 교통 대란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이 사건은 헨델의 음악이 가진 대중적 흡인력과, 왕실 행사를 향한 국민적 기대감을 보여준다. 동시에 음악을 통해 왕실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증명한다.
대중의 열광은 전쟁 종식에 대한 안도감에서 비롯되었지만, 조약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했다. 조약 자체는 실질적 이득이 거의 없는 현상 유지에 가까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은 국민의 감정을 ‘환희(La Réjouissance)’라는 단일하고 긍정적인 정서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축제의 웅장함과 음악의 압도적인 힘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린 파크에서 열린 본 행사는 조지 2세의 선전 전략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시각적 재앙으로 기록된다. 단순한 불운을 포함해, 왕실 권위의 취약성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불꽃놀이의 중심에는 이탈리아 건축가 세르반도니(Giovanni Niccolò Servandoni)가 설계한 거대한 목조 구조물 ‘기계(The Machine)’가 있었다. 도리아식 신전 형태로 설계된 이 건축물은 평화의 영속성과 군주의 위엄을 상징하는 조각과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내부와 주변에는 불꽃 발사 장치가 배치되어 순차적으로 폭죽이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 행사에서는 예상치 못한 기술적 문제로 인해, 일부 장치가 제때 점화되지 않았고, 발사 각도도 정확하지 않아 오른쪽 파빌리온에 불꽃이 튀며 불이 붙었다. 목조 구조물이었던 탓에 불은 순식간에 번져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불길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관객들에게 경이로운 장관으로 비쳤지만, 곧 불길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자 혼란과 공포가 뒤섞였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고를 넘어, 정치적 선전의 실패로 해석되었다. "런던 매거진(The London Magazine)"과 "젠틀맨스 매거진(The Gentleman's Magazine)"을 포함한 당시 언론들은 불꽃놀이 참사를 냉소적으로 보도했다. 국가의 영광을 과시하고 승리를 축하하려던 거대한 상징물이 눈앞에서 화재로 무너지는 광경은, 조약의 모호함과 왕실의 허영심을 폭로하는 시각적 메타포가 되었다. 왕실이 막대한 국고를 들여 지은 겉치레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대중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왕실 권위의 실재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정치적 맥락 없이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작품이다. 조지 2세가 요구한 군사적 편성은 이 작품이 순수한 예술이 아닌 청각적 선전 도구로 계획된 것이었다.
불꽃놀이 참사로 시각적 권위가 무너졌지만, 헨델의 음악은 혼란 속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압도적인 금관과 타악기의 사운드, 정교하게 짜인 형식과 구조는 관중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통제하며, ‘평화에 대한 환희’라는 긍정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주입했다.
이 청각적 경험은 왕실 권위를 재확립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으며, 음악은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고 현실에서의 실패를 이데올로기적 승리로 바꾸는 공공 예술의 사례가 되었다.
결국, 헨델의 작품은 18세기 영국에서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긴밀히 맞물려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기록된다.
"엑스라샤펠 조약"의 ‘엑스라샤펠(Aix-la-Chapelle)’은 프랑스식 표기, 독일어로는 ‘아헨(Aachen)’이다.
아헨은 로마 시대부터 온천이 발달한 도시로, 고대에는 “Aquae Granni(그란누스의 물)”라 불렸다. 치유의 신 그란누스(Grannus)를 기리는 뜻을 담고 있다.
프랑스어에서 ‘Aix’는 ‘물’이나 ‘온천’을 뜻하며, 라틴어 Aquae(물)에서 유래했다.
Aix-les-Bains나 Aix-en-Provence처럼 ‘Aix’가 들어간 도시들은 모두 온천이 있는 지역이다.
‘la Chapelle’은 예배당이나 성스러운 장소를 의미하므로, Aix-la-Chapelle은 “온천이 있는 성스러운 도시”로 해석된다.
아헨(Aachen)이라는 이름 역시 물과 관련이 있다.
고대 고지 독일어 ahha(물, 샘)에서 비롯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Acha를 거쳐 Aachen으로 변했다. ‘-en’은 복수형이나 고대 지명 어미로, 현대 독일어의 접미사 -chen과는 관계가 없다.
독일에서는 온천 도시가 국가 공인 치료 효능을 인정받으면 도시 이름 앞에 ‘Bad’를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아헨은 공식적으로 ‘Bad Aachen’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도시 이름의 ‘Aa’가 두 번 반복되어 알파벳 목록에서 맨 앞에 위치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아헨의 근교, 벨기에의 도시 스파(Spa) 역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온천 도시다.
‘스파(spa)’라는 단어는 바로 이 도시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1편: 런던 하늘에 울려 퍼지는 권위, 음악과 정치
2편: 미학, 숭고미로 보는 권력의 음악
3편: 감정과 군중을 설계하는 음악
4편: 소리로 과시하는 권력
5편: 절대주의의 청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