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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한 해의 회고 일지

노코더스를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by FameLee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쓴다. 작년 11월부터 노코드 에이전시 회사 <노코더스>를 새로 설립하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글을 아예 쓰지 않은 건 아니다. 모든 것을 깔끔하게 분류하고 싶은 성격 탓에 기술 및 개발과 관련된 글은 회사 블로그에만 쓰고 있었다.


다만, 생각 정리용 글을 딱히 쓰지는 않았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즐거움과 흥미가 이전보다 크지 않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집착하다 보니 항상 글을 쓰는 게 후순위로 밀리게 됐다.


기억은 금세 휘발되기에 생각과 감정을 잊지 않고자 글을 쓴다. 이제 한 해가 끝나가기에 지난 1년을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휘뚜루 연간 회고를 끄적여본다.






초라함을 묻어두자

"한 해에서 가장 자주 느낀 감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초라함"이라 말할 것이다. 작년 11월에 노코더스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지표는 나쁘지 않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BEP를 넘겼고, 사무실도 확장 이사했으며, 맨 땅에서 억 단위 매출을 찍고 유보 자금도 천천히 쌓아두고 있다. 최근에는 격변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신사업도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 그래도 순탄하게 잘해나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부족함을 느낀다. 현재의 "나"에 맞지 않는 욕심은 화를 부른다고 하던가? 올라가고 싶은 위치는 너무도 높다. 사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네트워킹이 많아지고, 멋지고 빛나는 분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내 나이 또래에 이미 엄청나게 높은 성과를 보인 분을 자주 볼 수 있으며, 많은 인사이트와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왜 아직도 이 위치일까?"라는 후폭풍이 몰려온다


"성공한 사람"의 그림자에는 엄청난 노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만하게도 상대방이 겪어 온 여정이 아닌, 결과만을 보고 현재의 '나'와 비교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이 나만의 길에 집중해야 한다고, 1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마음은 이성을 따르지 않는다. 여전히 성공한 사람과 현재의 '나'를 비교해 가며 초라함을 느낀다. 그리고 비교를 했다는 것, 즉 나를 믿지 못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가 그리는 이상향과 현실 사이에 괴리감이 존재할 때, '초라함'이란 감정이 찾아온다. 그렇다면, 내가 그리는 이상향은 무엇일까? 우리는 각자만의 욕망이 있으며, 나는 "보통의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 특별함을 부여하는 요인은 다양하겠지만, 나에겐 "모두가 알고 있는 회사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인 듯하다. 특별함을 "돈"이나 "커리어"에서 느꼈다면, 대기업이나 모두가 알 법한 IT 회사에 가지 않았을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러한 부정적 감정이 일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아예 생각을 하지 못하는 성격 덕분일까? 일을 시작하면,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금세 일에 몰두하게 된다. 결국 지금처럼 일하다 보면, 언젠가 “아! 그동안 열심히 한 게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 순간에 드는 감정은 어떨까? 오늘도 초라함을 묻어두고, 나아가야겠다.






통제에 집착이 강한 사람일 뿐이다

이제까지 몰랐지만, 노코더스를 운영하다 보니 나는 "통제에 대한 집착"이 심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회사의 직원으로 있을 땐, 스트레스라는 걸 크게 갖지 않았다. 부여된 역할과 업무 범위가 명확했으며, 내가 할 일은 이 바운더리 안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는 것이었다. 즉, 모든 게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직접 사업을 하다 보니 예측 불가능한 일이 쏟아지며, 바운더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게 됐다. 가령 현재 처리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이 와중에 (1) 기존에 납품된 서비스에서 예기치 못한 이슈가 생겼나 (2) 신규 고객 문의가 갑자기 쏟아져서 응대를 하거나 (3) 이탈한 줄 알았던 프로젝트의 계약이 한순간에 체결돼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투입해야 하는 식이 있다. 또한, (4)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등 여러 생각을 가져야 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이를 모두 통제하기 위해 평일 밤과 주말에도 일하는 게 기본이 됐다. 사업 초기에는 이러한 바쁨이 좋은 신호라고 생각했다. 일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고, 바쁘다는 것은 그만큼 사업에 성과가 있다는 말이니깐. 다만,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고, 더 부끄러운 부분은 이러한 스트레스를 주변에 발산한다는 점이다.



"왜 나는 통제에 집착하지? 이건 너무 잘못된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다가 <불안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고 나름 위안을 얻었다. 책에서 말하길, 인간은 중요하게 여기는 무엇인가가 훼손된다고 느끼면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바꿔 말해, 불안을 느끼는 순간에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정의한 부정적 감정은 오히려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통제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일 뿐, 잘못된 게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나"에 대한 가치 평가를 나름 멈추다 보니, 정신적으로는 좀 괜찮아진 듯하다. 다만 육체적으로는 여전히 힘든...








아무튼 해냈고, 앞으로도 해내야지

프로젝트가 몰아닥칠 때가 있다. 한 번에 3-4건의 고객사 프로젝트를 할 때도 있고, 프로젝트 개발 외에 회사 운영을 위한 업무도 함께 처리할 때가 있다. 매번 공동 대표에게 "아 이거 진짜 못할 거 같아"라고 투정(?)을 부린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든 모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와 그래도 이걸 다 했네"라는 말을 한다. 이때 느껴지는 도파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회사에서 우스갯소리로 "최종병기 이명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준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표현을 들을 때, 팀원들에게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이와 별개로, 부끄러운 부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를 맞닥트리고 해결하기까지 스트레스를 주변에 발산한다는 거다. 팀원들도 이해는 해주지만, 부끄러운 행동임은 부정할 수 없다. 감정적으로 무뎌지고 싶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다. 내년에는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과 더불어,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라는 수식언이 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공감을 바라지 말자

사업을 하면서 가지게 된 고민과 생각을 주변인들에게 가급적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내 고민과 생각을 지체 없이 말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크게 공감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해는 받을 수 있지만, 공감을 받기란 어렵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상황을 해석한다.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일 때는 주변 사람들과 경험이 비슷하다. 그렇기에 내 이야기를 하면, 자신의 경험에 쉽게 이입해서 비슷한 해석이 나오고, 이 분석으로부터 공감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인이 된 시점부터 각자의 경험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각자에게 들이닥친 상황은 다르고, 풀어야 하는 문제는 상이하다. 또한, 가지고 있는 제반 지식과 경험에 따라서 특정 문제로부터 연상해 고려하는 요인이 완전히 달라진다. 창업가의 삶과 직장인의 삶은 다르며, 같은 창업가라고 해도 회사의 규모, 사업 도메인, BM 등 천차만별이다. 결국 상대방에게 공감받기 위해선,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을 어느 정도 얼라인 시켜야 하지만 이것 또한 피곤한 과정이다.


그렇기에 요즘 들어 내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스타일이 됐다. 문득,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사업을 하셨는데, 매 선택의 순간마다 가족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자신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설령 묻는다 할지라도 의견을 크게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과거에는 아버지의 행동에서 이상하게 보인 부분들이 있지만, 요즘 들어 납득이 되고 있다. 아버지는 공감받을 수 없음을 알기에 말을 하지 않은 게 아닐까?







창업 놀이를 했었습니다

나는 "노코더스"를 창업이 아닌 사업으로 정의한다. 사람마다 관점을 다르겠지만, 현재의 나는 "창업"과 "사업"을 사업 전략으로 구분한다. '창업'은 "(1) 투자금을 기반으로 (2) 단기적 매출보다 (3) 미래에 더 큰 매출에 집중하는 전략"이고, 사업"은 "(1) 당장의 수익을 창출해 (2) 현재부터 조금씩 매출을 늘려가는 전략"이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했을 때, 노코더스의 골자인 외주 사업은 후자에 가깝다. 투자를 받지 않고, 꾸준히 BEP를 넘기며 매출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투자 받아서 더 키우고 싶다


비록 이 둘을 구분하지만,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을 고려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즈니스 모델은 "어떻게 매출을 발생시키고, 여기서 얼마큼 비용을 써서, 최종적으로 얼마큼의 수익을 남길 것인가?"로 정의한다고 생각하는데, 창업과 사업은 기간과 시점의 차이일 뿐이며 수익을 남기는 목표는 동일한다.


다만, 노코더스를 하기 전까지 내가 했던 모든 창업은 "창업"이 아닌 "창업 놀이"에 가까웠음을 받아들였다. 이전에는 서비스를 만들 때, 이 서비스를 어떻게 키워서 돈을 어떻게 벌어들이지에 대한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았다. 그저 유저가 많아지고 서비스가 유명해지면, 돈은 뒤따라 온다고 생각했다. 지금 돈을 조금이라도 벌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솔직히 말해서, 창업가라는 타이틀에 매료된 게 더 큰 것 같다.


하지만, 현재 노코더스를 "사업"으로 운영하다 보니 수익을 남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깨닫고 있다. 당장의 수익이 없어도 투자로 유지가 되는 창업과 다르게, 사업은 지금 당장의 수익을 고려하지 않으면 문제가 너무도 크다. 직원 인건비, 사무실 임대료, 창고 임대료, 서비스 사용료 등과 같이 너무도 큰 이슈로 번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든 선택을 하기 전에 "이렇게 하면, 수익이 남나?"라는 생각이 먼저 앞서게 된다. 바꿔 말해, 비즈니스 모델을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됐다. 오히려 사업을 먼저 시작했다면, 이전의 창업도 "놀이"가 아닌 "진짜 창업"이 되지 않았을까?







"부족함"이란 감정도 오만함이다

아버지는 26살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IMF 때 공장이 부도를 맞기도 했고, 술집, 노래방, 고깃집 등 다양한 사업도 해봤으며, 현재는 규모가 큰 생활 자기 공장을 운영하신다. 코로나 때 공장의 주된 고객인 식당들이 어려운 만큼 아버지의 사업도 어려웠지만, 결국 이겨내셨고 작년에 크게 공장을 확장했다. 아버지 피셜로 현재 공장 부지가 3000평 정도라고 한다. 나보다 많은 경험을 했고, 아직 내가 도달하지 못한 위치에 도달한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술을 마실 때마다 사업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아빠는 언제 사업이란 걸 이해하게 됐어?" 아버지에게 툭 던진 질문에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 "아빠는 50살이 돼서야 사업이 이런 거구나 감을 잡게 됐어" 온갖 수난을 다 겪었지만 24년이 지나서야 사업이 뭔지 감을 잡았고, 심지어 완전히 이해한 게 아니라 그저 "감"을 잡았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생각이 많아졌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거 같아?" "아빠에게 사업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거든. 그래서 혼자서 계속하면서 망하기도 하고, 잘 된 것도 있다 보니 50살쯤 돼서 아 사업은 이런거구나 라고 알게 된 거 같아" 아버지도 24년이 지나서야 사업을 알게 됐는데 지금 내가 부족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는 위로를 받았다.


동시에 현재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은 평일에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게 당연했고, 주말과 공휴일에도 일하러 나가셨다. 이러한 노력을 24년이란 시간 동안 꾸준히 해온 끝에 "사업"에 대한 “감”을 알게 되셨는데, 지금 내가 이 정도만 이룩했다고 평가하는 게 오만한 게 아닐까? 좀 더 이른 시절에 아버지가 겪은 경험을 엿보고,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였다면 좀 더 좋았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이 남는다.






나를 위한 철학이 필요하다

책이나 영상 등에서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으면, 포스트잇에 적어서 벽에 붙이곤 한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란 고전 책에서 나온 문구가 마음에 들어 포스트잇에 적어뒀다. 짧지만 강력하게 와닿은 문장, "내게는 나를 위한 철학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는 너무도 주변에 휘둘리기 쉬운 환경이다. SNS에서 멋들어진 말을 포장한 게시물이 판치고, 이 내용이 절대적 진리인 양 사람들에게 설파한다. 이러한 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가진 신념과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타인"에 의해 부여된 신념이 "나"의 신념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우리는 "나"를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고 있는게 아닐까? 진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퍼 나른 말이 아니라,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나만의 결론과 철학이다. 이러한 생각은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진정한 믿음을 부여한다. 설령 그 생각이 틀릴 수 있지만, 적어도 나만은 믿을 수는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만의 철학이 필요하다.


회고를 적다 보니 이번 연도는 스스로 부족함과 초라함을 많이 느낀 한 해인 것 같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만의 철학이 필요하다. 부정적인 감정을 겪는 건 당연하다. 중요한 건, 이 감정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철학"을 굳게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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