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 십자가
휴일 모처럼 설거지를 한답시고
막 고무장갑을 끼려는 찰나
씽크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
밥이며 고춧가루 양념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다.
어휴, 물 좀 담아서 불려놓지
왜 매번 같은 소리를 반복해야 하나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물을 세게 틀어 놓은 다음
고무장갑을 애꿎은 수채통에 팽개치고 만다.
오늘도 내 자비의 그릇은 그렇게 깨졌다
한번 맘 먹고 도와주려는 날마다 매번 이렇다
거기다 순서 없는 냉장고 정리에
필요한 물건을 보물찾기 해야 하는 데까지 미치자
분노가 거의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아내는 간밤에 손님 치르느라 피곤했는지
아직 저 멀리 꿈속에 있고
나 홀로 서성이다 베란다에 나왔는데,
밤새 내린 비로 논에 물이 가득 찬 것이
무슨 저수지 같이 황홀하다.
어제만 해도 갈라터질 듯 메마른 논이
오리배를 띄워도 될 만큼 출렁이고
그 위로 전봇대 몇 개 줄지어서
물 속에 거꾸로 십자가처럼 박혀있다.
가물어도 논은 하늘을 미워하지 않나니
너의 마음이 성기면 이슬을 담아 큰 못을 이루리라.
못 위로 청둥오리 한 마리 지나가자
수면 흙탕물이 가라앉아 사방이 적요하다.
다시 씽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끼는데
그 사이 밥풀이며 고춧가루가 물에 적당히 부풀려
새벽 성전처럼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