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고기 vs 빠른 물고기
스타트업이 IR을 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대기업이 이 시장에 뛰어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이다. 수많은 사례들을 볼 때 대기업이 위협이 되기는커녕 아예 시작을 못하거나,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실 큰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기업이 뛰어들어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극히 드문 케이스인데, 아래와 같은 이유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 스피드
스타트업의 핵심은 실행력이고 실행력은 곧 스피드이다. 시장 내 기회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고, 빨리 부딪혀보고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회사가 그 기회를 가져간다. 그리고 그 기회는 순식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모두가 '기회'라고 인지하는 시점은 이미 늦은 셈이다.
그런데 대기업은 태생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 새로운 아젠다를 initiate하는 건 주로 대리/과장급 실무진인 경우가 많고 본인도 사실 부딪혀봐야 업의 숨겨진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 텐데, 시작하기 위해서만도 수많은 보고라인을 거쳐 설득을 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설령 승인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빠르게 진행할만한 권한이 위임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국 시장에 돌고도는 '카더라'만 열심히 공부하고 끝나는 경우를 많이 봤다.
2. 의사결정자 Risk
시장 내 기회의 특징 중 하나는 매우 새로운 영역이라는 점이고, 기존의 Legacy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큰 혁신이 시작되는 곳에는 언제나 소위 '업계 전문가'들의 혹평이 뒤따른다. 물론 아주 오랫동안 혁신이 일어나지 않을만한 산업에 있어서는 그런 전문가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야 하겠지만, 새로운 혁신의 변곡점에 있어서는 기존 전문가 의견의 반대가 진실인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대기업의 의사결정자들은 주로 40대 후반~50대의 임원들인 경우가 많고 여기에 큰 Risk가 있다고 본다. 의사결정은 결국 한 명이 하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누구의 의견을 얼마나 들을지는 본인의 감과 논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가끔 대기업이 하는 서비스에서 어이없는 한두 가지 이유(특히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로 자빠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후일담을 들어보면 높으신 분의 결정이라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를 꽤 자주 듣는다.
3. 책임감/절박함
10명이 책임감을 N빵 하면 전체 합은 제로, 곧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반대로 단 한 명이라도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면 10명 모두를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전파된다. 스타트업의 Cofounder들이 가진 책임감과 절박함을 대기업 직원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건 개개인의 의지보다는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새로운 걸 시도하는 스타트업치고 큰 벽에 부딪치지 않는 회사를 본 적이 없다. 각자 다른 맥락에서 다른 유형의 시행착오를 겪고, 그 과정이 고스란히 그 기업만의 고유한 혁신과 문화로 자리 잡는다. 큰 벽에 부딪혔을 때 이걸 뛰어넘든, 돌아가든, 부수든 그 에너지의 원동력은 책임감, 절박함과 같은 요소들인 경우가 많고, 그건 유능한 사람과 돈이 많은 대기업이 아닌 오히려 헝그리 하고 절실한 스타트업의 창업자들이 그 주인공인 경우를 많이 봤다.
4. 돈에 대한 과대평가/거만함
아이러니한 게 잘 되는 스타트업의 핵심 멤버들은 정작 1도 만족하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회사가 망할 것처럼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반해 해당 비즈니스에 갓 뛰어드는 큰 회사의 담당자들은 이미 해당 시장을 접수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경우가 많다. 원래 남이 성취한 걸 보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뒤에 숨겨진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들은 어차피 안 보이고 성공의 발자취만을 보고서는 '운이 좋았네', '별 거 없네.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와 같은 멘트들을 많이 뱉는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착각은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혁신의 힌트는 정작 가장 헝그리 하고, 가장 어려울 때 나오기 마련인데, 큰돈은 오히려 그런 고민의 기회를 날려 버린다. 새로운 비즈니스에 대한 통찰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무리한 투자는 묻지마 투자와 다를 바가 없다.
너무 대기업을 안 좋게만 디스한 것 같은데, 사실 많은 수의 대기업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회사의 크기가 크다고 위와 같은 단점들을 모두 갖는 건 아닌 듯하다. 단적으로 실리콘밸리의 위대한 Tech기업들은 위의 결점들과 거리가 멀고 수백조 원의 가치를 인정받는 회사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타트업처럼 성장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스타트업의 DNA, 스타트업의 Spirit을 유지할 수 있을까는 모든 회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