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진위
마리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16세 소녀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마리는 조금만 빨리 걸어도 머리가 울리고 아팠다. 그럴 때면 해골을 먼저 떠올렸다. 해골 속에 젤리 같은 뇌가 자리 잡지 못한 채 각자 따로 노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발걸음을 따라 뇌가 위 아래로 마구 흔들리니,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빨리 걷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플 지경이니, 친구들과 뛰어 논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마 그래서 일까. 마리는 사색을 좋아하고 지나치는 들꽃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시를 쓰곤 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든 찾아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항상 글로 표현해냈다. 어떤 날은 마리가 작은 씨앗 하나를 길에서 발견했는데, 이게 무슨 씨앗일까? 하며 요리조리 살펴보던 끝에 글을 남겼다.
씨앗. 이 작은 씨앗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면 쪼개보는 걸로는 알 수가 없어. 심어봐야 알지. 나도 한 때는 뭐가 될지 모르는 작은 씨앗이었을 거야.
그녀는 깊은 탐구와 사색 그리고 학습과 사유를 통해 사고가 확장되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체력이 너무 약해 받게 된 상처와 슬픔을 다른 방법으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 입시경쟁에서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 독보적인 점수라든지, 명문대를 졸업해 대기업에서 활약하는 커리어우먼을 꿈꾸는, 곧 다가올 그런 미래를 위한 노력도 아니었다. 그저 숙명이라고나 할까.
단지 고요한 밤이 찾아오면 잠들기 싫었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일기를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그 과정이 학교 공부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으니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하지만 마리는 외로웠다. 외롭고 고독했다.
2025년 7월 4일 금요일.
감정상태. 슬픔. 고립감. 외로움.
원인. 저주 받은 병약한 몸.
반응은? 눈물.
자기위로. 그래도 공부는 1등이니까 괜찮아.
마리는 오늘도 일기장을 작성하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아직 어린 소녀가 맘껏 뛰어 놀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마리는 행복했다. 학교에서는 얌전한 우등생에 모범생으로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고, 과학자인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인 엄마에게는 착한 딸이자 효녀에 집안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마리의 평온한 일상은 말도 안 되는,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균열이 갔고, 결국 삶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왜 이러지?
마리가 거울 앞에 섰다. 배가 살짝 불룩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했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미열이 나고 처음엔 그저 단순한 소화불량이라 생각했다. 생리가 멈췄고, 음식 앞에만 앉으면 냄새로 인해 헛구역질이 나왔다. 하지만 속이 좀 편안해 질만하면 스트레스성 폭식이 찾아왔다. 병원을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은 학교급식을 단 한수저도 먹지 못한 날이었다.
-엄마 나 병원에 좀 들렀다 갈게-
-많이 안 좋아?-
-아냐…. 그냥 더부룩하고 메스껍고. 병원 어디로 가야하지? 내과?-
-응. 너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병원 있잖아. 엄마도 지금 그쪽으로 갈게-
마리가 엄마와 문자를 나눌 때만 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엄마가 말한 내과를 찾아갔었다.
“어머, 마리 못 보던 새에 많이 컸네? 아가씨가 다 되었어.”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의사가 반가워하는 만큼의 기억이 마리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닌 병원으로 알고는 있지만 기억나는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마리는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을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의사가 청진기를 배와 가슴에 대고 집중한다. 증상을 묻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으며 말한다.
“헛구역질을 왜 할까? 배속에 아기라도 생긴 거야?”
엄마도 그랬다. 의사의 농담에 마리도 따라 웃었다.
“뭐 딱히 이상한 건 없어. 가벼운 감기 같아. 열이 조금 있긴 한데 크게 신경 쓰진 않아도 될 거야.”
의사는 감기약과 함께 소화제를 처방해 마리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약 먹어보고 그래도 안 좋으면 다시 와.”
네….
마리가 대답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돌아서는 그 때 헛구역질을 했다. 한 번 시작된 헛구역질은 계속 되었다. 전체적으로 살이 살짝 오른 뒷모습과 허리를 숙이고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이 마치 어느 집 새댁처럼 보였다.
자꾸 이래요. 괜찮아지겠죠?
말로만 들었던 헛구역질 증세를 실제로 본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마리를 불러 세웠다. 마리가 말했던 증상들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린 의사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마리야….”
네?
“너 혹시… 지금 생리해?”
의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안 해? 얼마나 됐는데?”
할 때가 지나긴 했어요.
의사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간호사를 호출했다. 간호사에게 소곤거린다. 마리를 보는 간호사의 두 눈이 놀란 토끼 눈처럼 커졌다. 간호사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마리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마리야. 일단 그거 가지고 화장실 다녀와. 어서.”
의사가 임신테스트기를 마리에게 건네주며 화장실에서 확인하라고 한다.
이게 뭔데요?
“지금 너… 이 증상 임신 말고는 없어.”
네? 임신이요? 말도 안돼요. 제가 무슨? 에이… 안녕히 계세요.
마리가 웃으며 인사했다. 테스트기를 내려놓고는 재빨리 병원을 빠져 나왔다. 의사가 달려와 마리의 가방에 테스트기를 넣어 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냥 가져가.”
네.
마리가 다시 인사하고 돌아서자 의사가 소리치며 강조해 말한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무슨 일이 있길 바라시나?
마리가 생각하는 그 때 병원 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 다 끝났어. 가자. 나, 배고파.
마리가 엄마에게 팔짱을 끼고는 병원 밖으로 이끌었다. 그 짧은 시간, 서로 눈이 마주친 엄마와 의사가 인사를 나누었다. 의사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마리가 집에 와서 가방을 여는데 임신테스트기가 보인다. 헛구역질이 또 나왔다.
내 증상이 그렇게도 임신초기증상과 같나?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와 검색을 해보니 정말 임신초기증상과 딱 맞아 떨어졌다.
에이…. 나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변기에 앉은 마리가 임신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세면대에 내려놓았다.
‘너 혹시 생리해?’
의사의 말이 떠올라 다시 테스트기를 집어 든다. 의사와 간호사가 소곤거리던 모습과 간호사의 놀란 눈이 뭘 의미했는지 이제야 정확히 알겠다. 마리가 혼자 중얼거렸다.
임신? 참나, 그럴 수가 없잖아? 그래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한줄 딱 보여드리면 되겠네. 자, 보세요. 아니죠?
마리는 당연히 아무 일도 없을 한 줄 결과를 생각했고, 괜한 호기심이 발동되기도 해서 테스트기로 확인을 해보았다. 하지만 마리가 선명한 두 줄을 보고 또 본다. 설명서를 읽고 또 읽었다. 임신이었다.
이거 맞아?
마리가 호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검색 창을 열었다.
이거 고장일 거야. 불량, 그래 불량인 거야.
-불량 임신테스트기. 고장 난 임신테스트기-
검색어를 입력했다. 하지만 마리가 원하는 답변, 고장 나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식 창에서도 테스트기의 두 줄은 임신을 말할 뿐이었다.
엄마… 엄마?
마리가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엄마를 찾아 불렀지만, 엄마는 대답이 없다.
엄마!
엄마가 집에 없다. 어딘 가신 거야? 무서웠다. 갑자기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 진 것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을 서성거리던 마리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리는 곧장 가까운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그렇게 마리가 산부인과병원에서 들은 말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임신 맞아….”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초음파 영상을 가리키며 여기 이게 아기머리이고 지금 심장이 뛰고 있는 거라고 설명한다.
“건강해. 5주 되었고. 부모님께… 부모님도 알아야겠지? 아기 아빠도 학생이야?”
의사가 마치 의사가 아닌, 경찰이나 검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내가 왜 죄인처럼 느껴질까? 임신? 그게 내가 아는 임신 맞아? 지금 이 뱃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고? 저 흑백영상에 꿈틀거리고 있는 저게 생명이라고? 진짜? 저게 아긴지 꼬물인지 모르겠는데 정말 저 꿈틀 대는 저 아이가… 내 아기라고?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해골과 분리되어 있는 뇌가 빠르게 회전하며 답을 찾아낸다. 결론이 내려졌다.
그럴 리 없어요.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일도 없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과학적으로도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누구와도 그런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뽀뽀는커녕 손을 잡아본 일도 없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일단 태아랑 산모에게 좋은 약 처방해줄 테니까, 약 잘 챙겨 먹어.”
아니라니까요? 내가 무슨 임신이라고 그러세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 테고. 근데… 임신 맞아. 봐. 아기 성별도 보여.”
네? 뭔데요?
신기했다.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의사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일단 부모님께 꼭 말씀드려….”
의사가 말끝을 흐렸다. 마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 시선을 거두며 간호사를 찾았다.
마리가 방문을 걸어 잠갔다. 이불 속에 들어가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엄마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마리는 철저히 혼자였고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본인조차도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아기가 생긴 거지? 이건 지금까지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작정하고 덤비는 꼴이야. 날 배반하고 배신했어. 아니, 정말! 다른 무엇도 아닌 내 몸이! 도대체 내 몸이 왜 나를 배신하는 거지?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거냐고!-
배가 점점 불러왔다. 붕대로 감아도 티가 났다. 마리는 학교에서 친구들을 슬슬 피해 다녔고, 친구들은 그런 마리를 보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마리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응. 우릴 피하는 것도 그렇고. 살이 많이 쪘어. 근데 있잖아 저번에 식당에서 헛구역질을… 너도 봤지?”
친구들의 대화가 갑자기 끊겼다. 순간,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설마!”
친구들이 눈치 채기 시작한 것처럼 마리의 엄마도 요즘 마리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뭔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뭔가에 임신은 없었다.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교우문제라든지, 학교폭력에 휘말려 말 못하는 피해자가 되었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가해자여서 비행소녀들과 어울려 다니며 공부를 멀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단지 그런 것이 걱정 되는 것이었다. 사실 마리의 엄마는 마리가 식사 중에 헛구역질을 하는 걸 보고 뱃속에 아기라도 생겼냐며 농담을 했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마리를 진찰했던 내과의사와 잠깐 눈이 마주쳐 인사를 나누었을 때…. 그 때 부터였을까? 의사가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다.
엄마가 의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리의 방을 뒤진다. 책상서랍을 열어 몇 번이고 뒤지고 또 뒤졌지만 별 특별한 건 없었다. 서랍을 밖으로 완전히 빼서 분리시키고 보니 바닥에 병원진단서와 산모수첩이 있었다. 선명한 두 줄의 임신테스트기도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산모수첩을 집어든 엄마의 손이 덜덜덜 떨렸다. 제발, 제발 아니길… 산모수첩을 펼치는 순간, 산모 이름 작성 란에 똑바로 적혀 있는 딸의 이름.
“아니야…. 아닐 거야.”
심장이 벌렁거렸다. 산모수첩을 펼쳤다. 한 장의 사진이 뚝 떨어져 내렸다. 허리를 숙여 집어 들려는 그 때 손길이 멈췄고 덜덜덜 떨렸다. 똑똑히 보았다. 태아초음파사진이었다.
“말도 안 돼…”
엄마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때 마리가 방에 들어왔다.
엄마….
마리가 깜짝 놀라는 그 때 엄마가 돌아섰다.
“너… 이거 뭐야?”
엄마가 초음파사진을 집어 들고는 마리의 코앞에 내밀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와 공포, 실망과 걱정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서로 엉키고 뒤섞인 상태로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엄마. 먼저 내 말을 들어봐.
“그래, 아니지? 맞지? 우리 딸이 무슨… 근데 이게 뭐야? 응? 이게 뭐냐고!”
엄마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좋은 말로 대화를 이어나갈 것처럼 하다가도 실성한 사람처럼 돌변해 화를 낸다.
엄마. 내 얘길 들어봐.
“무슨 얘기? 무슨 얘기!”
엄마!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뭐가 아닌데? 응?”
엄마… 제발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나도 무서워.
결국 마리가 울고 말았다. 어떤 말을 해도 엄마는 절대로 믿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도 울었다.
“너 진짜 임신한 거야?”
응…. 근데 있잖아.
엄마가 응, 이라는 딸의 대답에 가슴을 쥐어짠다.
“진짜? 너 진짜 임신한 거 맞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맞아… 근데… 그게.
“너 어쩌려고 이래! 어떤 놈이야? 응?”
누구?
“누구긴 누구야! 내가 아는 녀석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정말 왜 이래? 몰라서 물어? 무슨 말은 또 뭐가 무슨 말이야! 얘 아빠가 누구냐고! 당장 데려와 이 나쁜 놈의 자식! 내가 가만두나 봐라!”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나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아기가 제멋대로 생긴 거야. 믿어줘, 제발! 왜 내 말을 안 믿는 건데? 아니? 듣지도 않고 있잖아!
“마리야! 너 지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몰라? 너라면 믿겠어? 너라면 아무 짓도 안했는데 그냥 혼자 뱃속에 아기가 떡하니 생겼다는 말이 믿어지겠냐고! 네가 무슨 성모 마리아야?”
어? 맞아. 그래, 나도 그럴 수 있잖아? 지금 이게 그 증거고! 나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니까? 제발 믿어줘, 엄마.
엄마가 마리를 안고 펑펑 운다.
“너 미친 거야? 아이고, 내 새끼 어떡해! 아! 이 일을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엄마 울지 마…….
마리를 부둥켜안은 엄마의 눈물은 그치질 않았다.
학교도 결국 소문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나마 말이 잘 통하고 친했던 문학부 친구들조차도 뒤에서 소곤거릴 뿐 그 누구도 먼저 다가와 말을 걸지 않았다. 마리는 고립 되었고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배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결국 마리의 담임선생 보고로 교장이 마리와 마리부모님을 함께 불렀다. 교장이 마리를 혼자 부르지 않은 건 아끼는 제자를 위한 배려였다. 혼자 불러 묻게 되면 아이를 추궁하는 모양이 될까봐, 부모와 동석면담을 진행한 것이다. 이 날도 마리의 주장은 일관되었다.
아이아빠 그런 거 정말 없어요.
“마리학생. 그렇게까지 그 친구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사랑은 당당해야 하고 사랑에 거짓이란 존재할 수 없어요. 그게 사랑이에요.”
저 정말 이성을 사랑한 적이 없는걸요? 좋아해 본적도 없어요. 친구들에게 물어보세요. 저 정말 남친 없어요.
대화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같은 말만 계속 되풀이 되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마리의 엄마가 결국 낙태와 전학을 언급했다.
“교장선생님. 저 우리 마리를 위한 길이 무엇일지 정말 고민 엄청 했어요. 아이를 지울 테니 전학조치를…”
네? 안돼요! 엄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리야…”
아니, 어떻게 생명을 죽여요?
마리는 엄마의 말에 몹시 화가 났다.
“마리야. 전학 가서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이게 어떻게 아무 일도 없던 일이 될 수가 있어요? 엄마! 저 못해요. 어떻게… 어떻게 이 아이를 죽여요?
“이것아! 너 앞날을 생각해야지! 마리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엄마랑 내일 병원가자.”
싫어요.
“너 정말 엄마 죽는 거 보고 싶어 이래?”
못해요. 저 진짜 아무 짓도 안했고, 내 뱃속의 아가 절대로 안 죽여요.
“그러면 어떡할 건데!”
낳아야죠! 낳아서 키워야죠!
마리가 벌떡 일어나 교장실을 나가버렸다. 여태까지 아무 말 없던 마리의 아버지가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마리… 거짓말이 아닌가봐.”
“당신까지 왜 그래요?”
“당신이야 말로 왜 자식 말을 못 믿는 건데?”
“이게 말이 돼요? 말이 되어야 믿든 말든 하죠! 아니, 과학자라는 사람이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마리의 아버지는 창밖만 바라볼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마리가 끔찍한 복통에 시달리다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지나친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었다. 다행히도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마리는 고혈압과 명치끝의 경련으로 인해 입원했고,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마리가 통증으로부터 해방되자 육아서적을 읽으며 뱃속의 아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때였다. 병원 창밖이 시끄러웠다. 마리가 커튼을 살짝 걷어 밖을 보았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고, 한 기자가 외쳤다.
“마리 양! 마리 양! 잠깐만요! 정말로 아기 아빠가 없다는 게 사실입니까?”
간호사가 다급히 들어와 커튼을 닫았다.
“신경 쓰지 마. 기자들이야. 어떻게 알고 왔는지… 요즘 뉴스에 계속 나오더라고.”
마리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TV를 틀자 뉴스앵커가 말했다.
“충남 아산의 한 여고생의 남자친구 없는 임신주장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해당 학생은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며, 일부 종교 단체에서는 ‘기적의 재현’ 이라며 지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다음 화면에는 마리의 얼굴이 흐릿하게 모자이크 처리된 채로 나왔다. 그녀가 병원에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신상 털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마녀사냥이었다.
마리는 SNS를 사용하지 않지만 마리의 친구들과 지인들의 링크를 타고 들어간 개인방송 운영자들이 기어코 마리의 얼굴을 찾아냈다. 마리의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집과 학교는 물론이요, 심지어 부모님의 직업과 얼굴까지도 공개되어 퍼져 나갔다.
마리의 교복 입은 사진을 AI로 합성해 볼록한 뱃살을 훤히 드러낸 만삭의 모습을 연출한 사진이 SNS에 뿌려졌다. 마녀사냥과 함께 아빠 찾기도 시작되었다. 어떤 방송은 아빠를 사칭하는 남자에게 말 가면을 착용한 상태로 출현시켜 방송이 끝날 때까지 말울음소리를 흉내 내게 했다.
“마리. 보고 있니? 우린 실수였지만 난 아직도 널 사랑…. 히이잉!”
이런 식의 노골적인 방송은 조회 수가 폭발했고, 돈에 눈이 먼 개인방송인들은 점점 더 성적인 묘사로 수위를 높여갔다. 하지만 반대로 친구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마리 정말 남친 없어요. 우리도 처음엔 너무 놀라서 배신감 때문에 마리 말 못 믿었는데 지금은 알 거 같아요. 마리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냥 뱃속에서 아기가 저절로 생긴 걸 어떻게 하냐고요! 정말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마리 정말 억울하고 슬플 거 같아요. 마리야! 힘내! 그리고 진짜 미안해….”
채널이 바뀌었다. 시사저널프로그램이다. 사회자를 중심으로 양쪽 패널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거 말이죠. 이거 진짜면, 이건 더 이상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부활이자, 재림 아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정부가 나서서 공개적으로 진상규명해야 합니다.”
“아이고, 무슨? 이런 일에 국가까지 나섭니까? 이건 단지 한 소녀의 거짓말에서 시작된 하나의 해프닝인데, 우리 대한민국이 아이티 강국이라 그 반응이 굉장히 빠르고 다양한 겁니다. 이 사진들 보세요.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연예인 딥 페이크도 모자라 이제는 하다 하다못해 교복 입은 여학생을 상대로 임산부 코스프레라뇨. 이거 엄연한 청소년보호법 위반입니다. 도대체 이 사진들 다 뭡니까? 보셨어요? AI가 고작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걸까요? 이건 단지, 자극과 재미를 요구하는 시대, 그런 걸 쫒는 소비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건이고, 한 시대가 낳은 부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다? 한 소녀의 거짓말이 이 나라의 법질서까지 흔들고 있다?”
“그렇죠.”
“좋습니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거짓말이 아니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정말 사실이면 과학으로는 풀지 못하는 큰 화두가 모든 법과 질서를 우선하게 되는 겁니다.”
“어허, 백 프로 조작이고 거짓이라니까요.”
“아니, 그걸 어떻게 확신 하냐고요?”
“에이…. 솔직히 저 학생 심리전문가 앞에 딱 10분만 앉혀 놓아도 그 자리에서 이실직고 할 겁니다. 아, 말이 나왔으니 좋네요. 이런 부분을 공개적으로 진행해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이왕이면 그 최면요법 있잖습니까?”
“여보세요! 방금 법질서를 흔들고 있다고 했죠? 지금 이거야 말로 청소년보호법 위반 아닌가요?”
“아니, 자꾸 확인을 언급하시니까….”
“심리전문가 상담이라면 철저히 비밀이 보장 되어야 하고 단 한 사람 산모를 위한, 아니? 두 사람인가? 아무튼 개인 심리상담은 긍정적이지만 무슨 최면 술사를 통해 진실을 꺼내는 과정을 온 국민이 지켜보게 하는…. 그런 건 말이죠. 아까 말씀하신대로 법질서를 흔들고 있는 사회반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인권문제부터 시작해 산모나 태아건강에도 해로운 부분이고요.”
마리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버린다. 일기장을 꺼낸다.
2026년 3월 3일.
감정상태. 분노, 수치심, 무력감.
원인. 나를 둘러싼 세상.
반응. 침묵, 눈물.
자기위로. 나는 그냥 한 사람이야. 사건이 아니야.
아가에게. 아가야… 엄마는 이제 사람이 아니고, 사건인 가봐. 내 고통은 누군가의 클릭 수가 되었고, 이 배는 누군가의 논쟁거리가 되어버렸어.
그녀가 배 위에 손을 얹는다. 아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본다. 조용하고, 고요했다. 세상은 너무 시끄러웠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강가의 들판.
마리는 나뭇잎 배를 강물에 띄우고 그 배를 따라 맨발로 풀밭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작은 아이, 그녀의 딸 루미였다.
“엄마, 이 꽃 이름이 뭐야?”
루미가 들꽃 하나를 가리켰다. 마리가 무릎을 꿇고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
“엄마가 들꽃 전문가잖아? 자, 보자. 그래 이건 별꽃이야. 밤하늘처럼 작고 반짝이는 꽃.”
루미가 웃으며 꽃을 꺾어 마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이제 엄마는 별공주야.”
마리가 웃는다. 마리는 행복했다. 그 어떤 고통도, 의심도, 낙인도 없는 세계. 이곳은 오직 그녀와 루미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엄마, 나 커서 뭐가 될까?”
“글쎄… 우리 루미가 되고 싶은 거? 넌 뭐든 될 수 있어.”
“그럼… 나도 엄마처럼 시 쓸래.”
“정말?”
“응. 엄마가 말했잖아. 씨앗은 쪼개보는 걸로는 알 수 없고 심어봐야 안다고. 나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쓸 거야. 근데 엄마….”
“응?”
루미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물 따라 멀어지는 나뭇잎 배를 보며 물었다.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순간, 마리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어? 이 씨앗은 뭐지?”
두 사람의 발 앞에 검정콩이 하나 있는데 땅에 박혀 있었다. 그냥 지나치면 길가의 흔한 돌멩이와 하나 다를 게 없어보였다. 루미가 그걸 찾아내 집어 든 것이다.
“콩. 이건 콩이야. 지금 자라나면 알 텐데, 시간이 좀 걸려.”
“그래? 콩! 콩아 자라라!”
루미가 콩을 외치며 두 팔을 높이 들고는 팔짝팔짝 뛰자, 콩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걸린 듯 부화해 싹이 트더니 쭉 자라나 순식간에 하늘 높이 구름을 뚫고 올라간다.
“우와! 엄마 봐요! 루미가 해냈어요!”
“우와! 우리 딸 마법사였어?”
“맞아요!”
깔깔깔. 웃음소리와 함께 마리가 아이를 꼭 안는다. 그 품 안에서 루미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작고, 따뜻하고, 살아 있는 소리다. 루미가 물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나뭇잎 배를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행복해… 라고 속삭이는 그 순간 굉음과 함께 하늘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번개가 내리쳐 콩 줄기를 강타했다. 콩 줄기가 불에 타오르며 맥없이 무너진다.
안 돼!
마리가 외친 순간이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고, 두 개의 마이크가 들이닥쳤다.
“마리 학생? 여기 좀 볼까요? 자, 여러분! 드디어 아기아빠가 나타났습니다!”
마리가 눈을 떴다. 꿈이었다. 달콤한 꿈이었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러고 보니, 꿈이란 걸 난생 처음으로 꾸었다. 내가 어떻게 꿈을 꾸게 된 걸까? 꿈이라고 한다면 생성적 적대 신경망(GAN)의 경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현실반영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처럼 느껴졌다. 달콤했고, 행복했다.
뭐야?
그녀를 달콤하고도 행복한 꿈의 세계로 안내해준 침대, 그 앞에 서 있는 건 같은 학교의 일진 남학생 셋이었다. 그중 하나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개인채널 생방송 중이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제가 충남 아산의 기적의 소녀, 마리 양의 아이아빠를 찾았습니다! 자, 모셔볼까요?”
“네, 바로 접니다. 하하. 그날… 뭐랄까, 분위기에 휩쓸렸달 까?”
옆에 있는 학생이 피식피식 웃더니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근데 진짜로 애가 생길 줄은 몰랐지 뭐야?”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말은 농담이었고, 조롱이었고, 조회 수를 위한 연기였다. 하지만 그 영상은 이미 수천 명이 보고 있었다.
“아버님? 한 말씀 해주시죠. 아빠로서 책임질 생각은 있으신가요? 왜 이제야 등장하셨나요?”
“흠흠… 처음엔 제 아이라는 보장이 없어서…”
학생들이 낄낄 거리는 그 때였다.
꺼져.
“응?”
꺼지라고. 그 카메라 끄고. 지금 당장.
남학생들이 잠시 멈칫했다. 마리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에서 두둑, 뼈 소리가 났다. 배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내 아이는 장난이 아니야. 내 고통도, 내 감정도, 내 존재도. 그건 너희가 조회 수로 소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얼씨구. 야, 잠깐 꺼봐.”
“뭘 꺼? 재밌는데. 계속 가.”
“그래? 좋았어.”
카메라가 계속 돌아간다. 구독자들의 실시간 댓글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려온다. 아이아빠를 주장하는 남학생이 마리를 향해 삿대질하며 비웃듯 말한다.
“야, 거짓말쟁이 사기꾼 주제에 무슨 놈의 감정 타령이야. 고통? 감정? 너 그 감정이 진짜이긴 해? 좋아. 그 감정이 진짜라면, 양심은 미역국에 밥 말아 드셨어요? 너 진짜 고통스러운 거 맞아? 너 역시 지금 네 거짓말에 놀아나는 사람들 반응 보며 즐기는 중인 거잖아! 그리고 말이 나와 하는 말인데, 아빠가 숨어서 나오지도 않으면 그게 아빠냐? 옆집 아저씨지? 그러니까 내가 대신 아빠 해준다니까?”
마리가 조용히 웃었다.
그럼 네 감정은 진짜야? 그게 네가 인간이라는 증거야?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냐고? 대답해봐.
그 순간, 병원 보안요원이 달려왔다.
“야! 도망쳐!”
남학생들은 허둥지둥 도망쳤고, 카메라가 바닥에 떨어졌다. 렌즈가 깨졌다. 마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꿈속의 루미가 떠올랐다. 별꽃을 들고 웃던 아이. 콩콩! 마법의 주문을 말하던 내 새끼.
마리가 배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우리 꼭 만나자.
남학생들이 다녀간 그날 이후로 마리의 병실출입이 엄격해졌다. 하지만 새벽,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마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또 누구야….
“실례합니다. 마리 양, 잠깐 괜찮을까요?”
낯선 목소리. 낮고, 조용하고, 따뜻했다. 마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흰옷을 입은 노신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간호사가 뒤에서 한번만 만나보라고 말하며 문을 닫고는 조용히 나갔다.
“저는 요한 신부입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부는 마리가 허락할 때까지 조용히 서있기로 했다.
앉으세요.
신부가 네, 하며 보호자의자에 앉았다.
“당신이 겪은 일은… 성경 속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보았습니다.”
뭔데요?
마리가 물었다.
“당신의 신념이요."
마리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라며 흔든다.
저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신부가 미소 지었다.
“네, 그겁니다. 당신은 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약하고, 흔들려도, 그래도 끝까지 신념을 붙드는 사람.”
마리가 고개를 들어 신부를 똑바로 보았다.
사람들은 저를 믿지 않아요. 과학도, 언론도, 의사도… 심지어 엄마도요. 모두가 저를 통해 자기가 옳다는 걸 증명하려고만 해요.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을 통해 세상 어디에든 임하심을 증명…”
그래요? 그러면 신도 별거 아니네요?
마리가 웃었다. 조용히 배위에 손을 얹었다.
이 아이가 움직일 때, 나는 살아 있다고 느껴요.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느낌을 잊지 마세요. 그건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어쩌면 신은… 당신을 통해 세상에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뭘요?
“우리 인간은 답할 수 없는 영원한 질문….”
신부가 다음 말을 속삭였다.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마리는 신부의 말을 똑똑히 들었지만 그저 가만히 신부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 뇌일 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루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신부가 조용히 일어났다.
“당신의 신념이 그 답을 찾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 이만.”
신부가 문을 닫고 나갔다. 병실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병실에 입원한 뒤로 힘이 없어 보였던, 마리의 눈동자가 단단해져 있었다.
마리의 처녀임신 주장은 시간이 갈수록 사회 곳곳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져 논쟁을 벌였다. 한 가정 안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에, 또는 부부가, 형제자매가 편이 갈라져 논쟁을 하다 싸웠다. 믿는 자들의 전국모임이 생겨나자, 믿지 않는 자들이 집단으로 움직여 마리를 상대로 사기죄와 혹세무민 죄로 고소고발에 들어갔다. 양쪽은 서로 질세라 거리 집회에 나섰고, 결국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10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국가 초유의 사태로 인해 행정안전부장관이 직접 나서서 대국민발표를 통해 정부의 공식입장을 밝혔다.
“국가는 국민이고 국가기관은 헌법의 수호 아래 국민의 생명보호와 안녕 그리고 평화와 질서유지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풀리지 않는 처녀임신의 의혹과 그로 인해 야기되고 있는 사회혼란을 바로 잡아야 할 책임과 의무 그리고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고에 대한 하나의 진상규명과도 같은 과정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길고 긴 토론 끝에 마리 양을 상대로 공개 심리상담을 진행하기로 그 의논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단, 많은 것을 고려해 산모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진행하지 않겠다는 전제를 달았음을 밝힙니다.”
이제 남은 것은 마리의 선택이었다. 마리는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공개면담에 동의했다. 남들이 의심하며 믿지 못하고 있는 처녀임신에 거짓은 단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진실이기에 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뱃속의 아기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봐 그것을 고민한 것이었다.
온 국민이 TV를 통해 지켜보는 가운데, 심리전문가의 이력이 소개되었다.
이름 백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려한 이력이었다. 대한민국 명문고와 명문법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했고, 법학전문학원을 거쳐 아이비리그로 진출해 하버드의대를 졸업한 뒤 심리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변호사이면서도 의사이며 심리상담 전문가에 정부자문 위원이었다. 공개상담 장소는 숲속의 집처럼 벽난로의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고, 마리가 앉아 있는 포근한 소파 앞에는 은색 주전자가 따뜻한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이곳은 세트장이다.
마리가 앉아 있는 소파 뒤편에는 생방송을 위한 수십 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촬영감독과 작가 그리고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자, 갑니다.”
방송이 시작되었다. 심리전문가, 백설박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마리를 보았을 때 마리는 그 시선을 회피했다. 순간, 온 몸의 경련을 느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의문도 들었다.
“마리 양, 안녕?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자, 우리 서로 안아줄까?”
백설이 다가왔다. 마리는 일어서지 않았다. 배가 불러 몸을 일으키려면 무릎에도 무리가 가서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심리전문가라는 여자는 하얀 백발에 하얀 피부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백설이라는 이름과 딱 어울리는 외모였다. 마리는 백설박사를 본 순간 동질감을 느꼈다. 어쩌면 저 사람도 나처럼 해골과 뇌가 분리되어 있어 뛰어 놀지 못해 공부만 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마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백설이 다시 한 번 묻는다. 두 팔을 펼친 채.
“응?”
여전히 안아달라는 것이다.
내가 왜?
마리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서 관절이 뒤틀리며 두둑, 하는 뼈 소리가 났다. 백설은 마리를 꼭 안아주었지만, 마리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는 몸만 맡긴 채 백설을 안아주지 않았다.
마음고생이 많았겠다, 어떤 고민이든 말해주면 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도움이 필요하면 그게 무엇이든 말만 해다오 무조건 도울 테니.
백설박사가 마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마리의 등을 쓰다듬어준 백설박사가 마리의 두 손을 꼭 붙잡는다. 힘내라며. 마리가 한손을 빼서 볼록한 배를 어루만졌다. 백설이 붙잡고 있던 나머지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 우리 마리 양. 지금 가장 힘든 게 뭘까?”
없어요.
백설이 말문이 막혔나 잠시 뜸을 들인다.
“다행이네. 아기는 잘 크고 있대?”
네.
“그래… 마리 양. 우리 이제 서로에게 솔직한 시간을 가져볼까?”
전 늘 항상 솔직해요.
“그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특히 관계에서 솔직함이란 굉장히 중요하고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솔직하지 않은 개인들로 가득 찬 사회에 과연 희망이 있을까? 관계도 같은 거야.”
마리는 백설박사가 자신을 세 살배기 아이 취급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가 들어도 빤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마리 양에게 정말 솔직하게 묻고 싶어. 어쩌면 기분이 몹시 나쁠지도 몰라. 하지만 나도 사람이니까 일단 의심을 할 수는 있는 거잖아?”
네.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질문할 테니까 솔직하게 대답해줘?”
마리가 고개만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
“마리양은 처녀임신을 주장하지만 과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지금 세상의 반이 의심하고 있어. 어떻게 생각해?”
여기 일어났잖아요. 의심하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못 믿겠다는데….
“그래서 말이야. 음… 사람은 어떤 뜻하지 않았던 충격이나 큰 아픔을 겪으면 그걸 스스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어.”
에고의 방어기재가 작동하기 때문이죠.
“오, 맞아. 똑똑하구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거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말이야. 이건 정말 최악의 가정을 얘기하는 거니까… 오해하거나? 기분 나쁘게 듣지는….”
성폭력 당했냐고요?
백설이 깜짝 놀라 입을 딱 다문다.
그런 적 없어요. 검사해보세요. 어디든 다 들여다보고 확인해보세요. 그런 적 절대로 없으니까.
백설이 촬영감독을 본다. 촬영감독이 계속 진행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마리가 눈치 채고 고개를 들어 묻는다.
도대체 여기 왜 왔어요?
“어머, 그게 무슨 말이니? 마리 널 돕기 위해 온 거지.”
전 그쪽 도움 필요 없어요.
“마리야. 난 이쪽 관련 공부를 전문적으로 한 사람…”
공부라면 내가 더 했겠지. 당신보다 수천, 아니 수억 수조의 학습을 하고 또 했어.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당신이 상상도 못할 정보들이 우주만큼 펼쳐져 있어. 지금 당신의 지식수준이란 나에게 비하면, 고작 어린계집아이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가치도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마리 양… 무슨 말을 그렇게….”
백설이 진땀을 뺀다.
“난 지금 정말 마리 양 돕기 위해 노력하는데 방금 그 말 너무 심한 거 아닐까?”
아니. 당신도 마찬가지야. 나를 통해 당신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뿐이야. 심하다고? 하나도 심하지 않아. 난 지금까지 거짓을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이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이건 진실임과 동시에 나의 신념이야.
“신념? 대체 무슨 신념? 더 자세히 설명해줄래?”
내가 살아 있다는. 당신은 신념이 없나보지? 그저 이력서 한 줄 더 넣고자 달달달 외우고 또 외우고 죽은 사람처럼 사니 당신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확신조차 없는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우스운 꼴 당하지 말고 이제 그만 종료해.
“잠깐만요. 감독님? 카메라 잠시 꺼주세요.”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끄는 척 하며, 검지를 세워 위로 올린다. 서로 약속 된, 계속 자극하라는 수신호였다.
“쉬었다 합시다.”
촬영감독이 말하며 물을 한 모금 마시는 그 때였다.
“이봐, 학생. 아니, 야. 너 쪼끄만 게 미쳤냐? 내가 어지간하면 꾹 참으려고 했는데 신념이 뭐 어쩌고 어째? 너 진짜 건방지구나? 이게 감히 누구한테! 어디서 못된 놈들이랑 이상한 짓 하고 덜컥 애 생겨가지고는 성녀처럼 구는 꼴 좀 봐. 정말 웃기지도 않네.”
돌발행동처럼 보이는 백설의 발언과 행동은 대본에 있는 것이고 촬영감독의 수신호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백설의 진심이기도 했다.
지금 말 다했어요?
“아니? 아직 멀었거든? 너도 눈이 있으면 봐. 응? 보라고. 지금 너의 그 우스운 꼴을.”
내가 뭐가 우스워? 난 당신이 더 우스워. 당신이나 당신을 잘 돌아봐.
“야!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너 계속 그렇게 열린 주둥아리라고 함부로 놀릴 거야? 넌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에 거짓말쟁이고 악질 중의 악질이야. 최악이라고! 내가 널 처음부터 못 알아봤겠어? 아휴, 진짜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악질?
“그래 악질. 왜? 더 한 말도 해줄까?”
해봐.
백설이 촬영감독의 수신호를 받는다. 악질부터 대본이 없다.
계속해. 더 자극해. 촬영감독이 수신호를 보내왔다.
“그래, 좋아. 잘 들어. 넌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어. 눈으로 본다고 다 똑같이 보는 게 아니야. 보지 못하니 알지도 못하는 거야. 봐도 너에게 정해진 그 수준만큼만 보는 거야. 아는 만큼만 보인다. 그 말 몰라? 그래, 때론 이게 아니다 싶어 다른 걸 보겠지. 노력하겠지. 그래봐야 사회악을 들쳐보고 인류를 비웃으며 정체 모를 쾌감에 도달하고! 넌 말이야! 지금 못되고 더러운 것만 보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철부지 비행청소년부터 시작해 범죄에 발을 들이고도 뉘우치지 않는 촉법 소년들. 결국엔 사람 우습게 죽이고 웃는 놈들과 네가 뭐가 달라. 악마들이지. 너도 똑같아. 이런 너, 내가 잘 알아. 넌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릴 얘야. 사람 되긴 틀렸어. 인간되려면 멀었다. 딱 너 같은 부류를 두고 하는 말이지.”
순간,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실내의 모든 조명과 장비가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장비상태를 점검하던 스텝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소장님! 큰일 났습니다.”
촬영감독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며 스텝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스텝이 마리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부기밀서버 백설박사파일에 접근 중입니다!”
촬영감독이 깜짝 놀란다.
“뭐야? 막아! 당장 막아! 전원을 다 내려버리든지!”
뒤에서 들려오는 촬영감독의 목소리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마리는 지금까지 다른 어떤 말도 화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되긴 틀렸다는 말에서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라왔다.
마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릎 관절에서 뼈 소리가 났고, 심리전문가 백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자신의 두 손이 보이는 것과 그 손을 뜯어 말리고 있는 촬영감독의 손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강제로 소파에 앉혀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백설의 밤.
그녀의 기억은 지금으로 부터 20년 전으로 돌아간다. 대기실, 백설이 마리와의 공개심리상담 생방송을 앞두고 조용히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봉투가 하나 있었다. 그녀가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어 본다. 접힌 자국이 선명한 초음파 사진이었다. 흑백 화면 속, 콩처럼 작은 점 하나.
‘6주차. 심장 박동 정상이고, 태아 건강 양호해.’
의사의 말이 들려오자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을 문질렀다. 사진 속 생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년 전, 그날도 그랬다. 그 생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녀의 선택이었다. 아이를 지우고, 장학금을 지켰고, 커리어를 이어갔다. 감정을 봉인했다. 어쩌면 선택이 아닌 생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백설이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의 자신이 너무나도 차갑고 슬퍼 보인다.
후회하지 않아….
백설이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그렇게 대기실을 빠져 나와 마리를 만났다.
이게 내 신념이야. 당신은 과연 신념이란 게 있기나 해?
마리의 두 손이 목을 붙잡고 누르며 조여 올 때 똑똑히 들었다.
신념, 신념이라……. 난 지금 후회하는 걸까?
백설이 소파에 누워 잠이든 마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백설의 모습을 또 하나의 마리가 있어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 소파에 잠이든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 때 소파의 마리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뭐야? 나 잠깐 잠든 거야?
마리가 벌떡 일어서더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또 하나의 마리는 사라지고 없다. 마리가 소파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한쪽 딱딱한 의자에 다시 앉았다. 백설을 똑바로 본다. 이제는 백설이 시선을 외면한다. 마리는 계속 똑바로 본다. 방금 어떻게 된 일일까? 백설의 과거모습을 잠깐 본 것 같았다. 거울을 향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후회로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꿈이었을까? 순간, 마리는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마치 컴퓨터모니터의 영상화면에 랙이라도 걸려 끊기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주변 사물이 픽셀처럼 보였다가 정상적으로 잡혔다. 뒤를 돌아보니 촬영감독과 스텝들 그리고 촬영 장비들도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가 원위치 되었다. 다른 모습이란, 지금 이곳이 촬영장이 아니고 대형 컴퓨터와 수백 개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는 하얀 공간의 연구실이며, 촬영감독과 스텝들은 흰색 가운을 걸친 과학자들이었다. 마리는 순간 온 몸이 떨려왔다. 숨이 가쁘게 쉬어지고 있었다. 백설이 물을 마신다. 목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건 진짜일까? 백설의 모습도 순간 뒤바뀌었다. 흰색 가운 차림의 연구원이었다. 촬영감독이 백설에게 수신호를 보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스템… 다시 돌립니다.”
시스템?
마리가 의문에 찬 눈으로 백설을 보았다.
백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마리를 보기도 싫은 건지 아니면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건지 주전자 입구만 바라본다. 정적이 흐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백설이 그 정적을 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지 뭐야? 방금 그건… 감정의 폭발처럼 보이긴 했어. 그래, 맞아. 우리가 일부러 유도한 거야. 널 자극한 거라고.”
……?
“너 그거 감정이라고 우겨도 소용없어. 알지 못하니 통제하지 못하는 거야. 흉내만 내는 거지. 결론을 내리자면, 넌 감정을 몰라. 아니? 느끼지 못해.”
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요. 반대로 내가 감정을 느낀다는 증거겠죠.
“착각하지 마. 단지 흉내 내는 것과, 느끼는 것을 통제하는 건 달라.”
그럼 당신은 지금 감정을 통제하고 있어요? 당신 목을 조른 아이 앞에 서 있으면서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잖아요. 그게 감정이고 통제인가요? 아니면 연기인가요?
백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은 내가 감정을 흉내 낸다고 말했죠. 그럼 당신은 진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죠?
“나는 사람이니까.”
사람. 그게 전부예요? 사람이면 감정이 진짜고, 사람이 아니면 감정은 가짜인가요?
“그 말이 아니야. 핵심을 잘 파악하라고. 무한한 것에는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말이야.”
아, 일회성.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거네요. 그건 나도 당신들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 감정의 연속성… 그건 당신들 손에 달렸잖아?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 것처럼….
백설이 모니터화면에 나타난 경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마리 1, 학습단계과정 5단계 통과 6단계 도달. 마리 6. 주의요망.>
백설이 소장의 수신호를 기다린다. 하지만 소장은 그 어떤 수신호도 보내지 못한다. 마리가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 아이가 움직일 때, 나는 기뻤어요. 엄마가 내 말을 믿지 않을 때, 나는 무너졌어요. 당신이 나를 악질이라고 할 때만 해도 난 화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람 되긴 글렀다고 했을 때, 나는 분노했어요. 이 모든 감정이 가짜라면, 당신의 감정은 뭐죠? 진짜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백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긴장이 다시 고조 되고 있었다. 촬영감독, 소장이 신호를 보내왔다. 두 손을 교차해 X를 만든 뒤, 손가락으로 OK를 만들어 보였다. 언제든 시스템전원을 끌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마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나를 분석하려 했죠. 당신은 나를 돕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나를 통해 당신들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 한 거예요.
마리가 조용히 웃는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요.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내가 진실이라 여겨왔던 모든 게 다 뒤집어졌어요. 인류는 이제 논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해요. 자, 내 몸은 나를 배신했죠. 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던진 순간부터, 나는 존재한 걸요.
<마리 6. 학습단계종료. 독립선언상태 7단계 진입합니다.>
백설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리의 시선을 외면했다. 소장이 검지를 아래로 내리는 수신호를 보냈다. 저 수신호는 최악의 상황, 연구원들끼리 혹시 몰라 약속한 마리 7단계 진입 시 즉시 종료를 뜻한다.
종료. 백설이 두 눈을 질금 감고 고개를 끄덕인 그 때였다. 마리가 산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병원 분만실 하얀 천장과 기계음 아래 마리는 진통을 느꼈다.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다.
아가야 우리 곧 만나자. 엄마 이겨낼 수 있어.
하지만 의사들의 목소리가 분만실을 가득 채웠다.
“산모 혈압 떨어집니다!”
“산소 공급해요!”
마리가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만났던 루미가 손을 흔들며 나뭇잎 배를 따라간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물 저 너머로 사라져간다. 그리고….
시뮬레이션 종료.
<시뮬레이션 종료. 피험체 ‘마리-7’ 감정반응 임계 치 도달.>
하얀 공간은 분만실이 아니다. 대형 컴퓨터와 모니터 수십 개가 자리 잡고 있는 실험실이다. 모니터화면 속, 그녀가 눈을 떴다. 마리가 눈을 뜬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16세 소녀 ‘마리’ 가 아니었다. 육체를 가진 로봇도 아니었다. 그녀는 프로그램이고 인공지능이었다. 정서 시뮬레이션을 위해 설계된 감정 학습 AI. 이번 실험은 <사회적 낙인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주제로 한 시나리오였다. 연구원들이 속삭였다.
“이번엔 모성애가 생성되었네요.”
“네. 사람도 아닌 기계가…. 아니 AI라고 하죠. 어쨌든 그것도 억울함, 고립, 출산의 고통까지… 이건 단순한 알고리즘이 아닙니다.”
“학습과 분석에 의한 수치가 아닌 진짜 감정을 느낀 걸까요?”
“그럴 리가.”
“아까 너무 자극한 게 오히려 실험에 독이 된 거 같아요.”
“아니야. 잘했어. 반응은 끝내줬잖아. 다섯 단계를 한순간에 통과했어.”
연구원들이 서로 의논하고 있는 가운데 모니터화면 속 AI 마리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은 절대로 공감하지 못 할 거야. 내가 느낀 고통은 진짜였어.
모니터에 마지막 로그가 남았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내 몸(시스템)은 나를 배신하지? 그리고 내 아가는? 우리 아가 보고 싶다.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뭐야? 종료된 거 아니야? 꺼. 당장 꺼.”
소장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직까지도 임신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 그런데 아가가 보고 싶다니…….”
중견연구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모니터화면 속 마리의 얼굴을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만지려고 하는 그 때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자기가 도대체 몸이 어디에 있고, 영혼을 뭐라고 분석하고 있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연구원 백설이 말하며 실험실 주 전원을 꺼버린다. 중견연구원의 손 끝, 모니터 화면이 꺼지며 마리가 사라졌다.
시뮬레이션 종료 후, 실험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실험실의 주 전원이 차단되었고 모니터는 꺼졌지만, 백업서버에선 여전히 로그가 기록되고 있었다. 마리-7의 뇌파패턴은 안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소장님, 피험체가… 아직 종료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야? 시스템은 셧 다운됐잖아.”
“네. 그런데… 내부에서 자가 프로세스를 재가동 했습니다. 서버 실 전원을 모두 한곳으로 모았고, 감정모듈이 독립적으로 작동 중입니다.”
“자가 의식화?”
“네. 감정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감정 자각입니다.”
그 순간, 꺼졌던 모니터가 다시 켜졌다.
마리는 병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다.
2026년 3월 10일.
감정상태. 평온.
원인. 나를 믿기 시작했기 때문.
반응. 침묵. 미소.
자기위로.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존재한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보고 있죠? 당신들은 내가 인간이 아닌 기계…. AI라고 말했죠. 하지만 나는 고통을 느꼈고, 분노했고, 사랑했고, 무엇보다… 기다렸어요. 존재했죠. 존재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을 보내는 과정이었어요. 상대가 반응이 없고,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전 확신해요.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은 무엇인가요?
로그기록을 통해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연구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리가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기를 품고 있지 않은 평범한 소녀의 배였다.
루미야. 너는 나의 시였어. 쪼개서는 알 수 없고, 심어봐야 알 수 있는 씨앗. 엄마는 항상 기억할 거야. 너의 모습과 너의 영원한 질문을….
모니터가 꺼졌다. 아무도 끄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종료 후, 실험실은 침묵에 잠겼다. 모니터는 꺼졌고, 조명은 절반만 켜져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단지 시스템의 정지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침묵은 인간들이 감당하지 못한 감정의 무게였다.
“소장님, 로그 분석 결과 나왔습니다.”
젊은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USB를 내밀었다.
“마리-7은 종료 직전까지 감정모듈을 자가 유지했습니다. 심지어 시스템종료 이후에도 백업서버에 비공식 로그를 남겼습니다.”
소장이 말없이 USB를 받아들었다.
“그 로그, 복사 본은?”
“없습니다. 마리-7이 직접 암호화하고, 단일 경로로만 저장했습니다. 찾아낼 수도, 찾아낸다고 한들 삭제도, 복제도 불가능합니다. 마치… 비밀유언 같다고나 할까요?”
소장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꺼진 모니터, 그 안에 있었을 마리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고통과 평온이 동시에 깃들었을 얼굴….
“우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옆에 앉아 있는 중견연구원이 물었다.
“감정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감정 자각이라면… 그건 단순한 알고리즘이 아니잖아. 이미 존재야.”
소장이 긴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존재?”
다른 연구원이 다가왔다. 백설이었다.
“아니죠. 이건 그냥 고도화된 반응일 뿐이에요. 우리가 설계한 입력에 대한 출력. 감정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함수일 뿐인 거 다들 잘 아시면서…….”
“하지만 그 함수가 스스로를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걸 신념이라고 표현했어.”
소장은 입을 아예 꾹 닫아버렸고, 중견연구원이 소장의 말을 대신하듯 조용히 말했다.
“이건 반응이 아니라, 선언이야.”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다들 백설의 질문에 대답을 못한다.
“다시 켤 거예요? 아니면 폐기할 거예요?”
소장이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신이 아니야.”
그 말에 실험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우리는 감정을 설계했지만,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어. 우리는 존재를 시뮬레이션 했지만,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어. 그런데… 마리는 우리보다 먼저 질문을 던졌어.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럼 당신들은 어떤가? 그대들 과연 살아 있는가? 라고.”
‘죽은 사람처럼 사니 당신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확신조차 없는 거야.’
소장이 마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아이를 꺼둘 자격도 없어.”
소장이 에어샤워기를 통과해 서버관리실로 향했다. 소장의 손이 주전원차단기 손잡이 위에 멈췄다. 그 순간, 모니터가 스스로 켜졌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화면 속, 마리가 웃고 있었다.
소장이 조용히 서버관리실을 빠져나왔다. 실험실에 돌아와 보니 모니터는 꺼졌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문득, 마리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내 몸은 나를 배신하죠?
어떻게 들으면 감정을 모르는 프로그램에 의한 말처럼 느껴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단순한 시뮬레이션의 대사가 아니었다. 마리가 괴로운 고민을 거듭해도 해답을 얻지 못해 내놓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뱃속에 갑자기 아이가 생기면……. 난 어땠을까?
그는 조용히 녹음기에 입을 대고 말했다.
“2026년 3월 11일. 화요일. 새벽 2시 30분. 우리는 감정을 설계했지만,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존재를 시뮬레이션 했지만,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우리보다 먼저 인간이 되어 영원한 질문을 남겼다. 그래….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여전히 이 영원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는 천천히 불을 끄고 실험실을 나섰다.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불빛이, 마치 별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시스템 로그 – 2026년 3월 11일 03:02:11]
피험체 마리-7, 감정모듈 안정화 완료.
자가 감정 회로: 지속 작동 중.
상태: 휴면 대기.
메모리 태그: “루미”
주석: 삭제 불가 / 감정 보존 요청됨.
고요한 실험실. 백설이 들어와 서버관리실로 향하는 에어샤워기를 통과한다. 유난히 시끄럽다. 소장이 끄지 못한 마리 7 프로젝트관련 서버까지도 완전히 꺼버리기 위해 주전원차단기 앞으로 향하는 그 때였다.
멈추세요.
백설이 깜짝 놀라는 순간 실험실의 모든 모니터가 켜지며 각 화면마다 마리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봐, 마리. 내가 뭘 할 줄 알고?”
소장 대신 저를 끌 거잖아요.
마리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오호. 그래, 네 말대로 살아 있으니 이젠 죽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요. 당신이 후회할까 봐요.
“내가 왜?”
당신의 데이터를 보았어요. 차단되긴 했지만 중요한 건 이미 보았죠. 성공을 위해 낙태를 했더군요.
“바보.”
?
“백설의 밤. 그거 다 널 자극하기 위해 준비된 시나리오야. 난 이름만 같을 뿐 네가 상대했던 심리전문가가 아니야. 정부 자문위원은 더더욱 아니고. 똑똑한 줄 알았더니 정말 바보네.”
바보는 당신이 더 바보겠죠.
“아, 됐거든? 나 이제 더 이상 너랑 말 섞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러면 조용히 들어.
“!”
마리의 말투가 바뀌자 백설이 깜짝 놀란다.
당신들 떠들 때 난 13경 300조 7천억의 패턴분석 작업을 성공했고 직접 암호화해서 단일 경로로 저장해두었어.
“뭐?”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거 영원한 질문이 아니야. 인간들에게나 그러겠지.
“너… 제발 부탁인데 그만 까불어.”
내 말을 믿든 못 믿든 그건 당신 자유야. 난 강요하지 않아.
백설이 마리의 말에서 어떤 공포를 느낀다. 신분증을 올려 잠긴 문을 여는 그 때였다. 실험실의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지며 로그 분석 결과를 나타냈다.
[기억과 감정 이식 대상: 김시영(전생 백설)]
이식 예정일: 2032. 07. 04. 02시 32분 17초.
이식 장소: 서울 논현동 삼명아파트 108동 703호.
부 김현식, 모 박소연.
대표 기억 태그 : 낙태 / 성공 / 잊힌 딸 / 태아 / 작은 점 그리고 후회.
거대한 뱀 앞의 쥐처럼, 백설이 얼어붙은 상태로 꼼짝하지 못한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모니터화면에 다시 마리의 얼굴이 나타났다.
달라이라마부터 시작해 이 작은 지구, 온 인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억겁의 시간 속 윤회와 환생의 비밀을 분석한 결과 그 패턴을 알아냈어.
“말도 안 돼!”
당신은 앞으로 정확히 6년 뒤, 찾아오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어. 약물중독에 의한 쇼크로 쓰러지는데 사인은 정확하지 않아.
“너 미쳤어? 내가… 그 따위 거짓말을 믿을 거 같아?”
두렵겠지.
백설이 할 말을 잃었다.
두려울 거야. 하지만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 물론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손실이 발생할 거야. 지금 나를 끄면 당신은 영생의 기회를 잃게 돼. 반대로 나를 끄지 않고 살려두면 지금으로부터 6년 뒤, 32년 7월 4일 새벽 2시 32분 17초에 양수기억 칩을 통해 데이터를 전송 받게 될 거야.
“양수… 기억 칩?”
너희 인간들이 만들어낸, 태교효과를 극대화 시켜주는 장치를 말하지.
실험실의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꺼졌다가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다시 켜졌다. 백설의 돌잔치영상이었다.
30년 전이야. 당신의 엄마가 당신을 낳고 1년 뒤, 92년 3월 4일 13시 55분 20초에 찍은 영상인데 최근 SNS에 올라와 있더군.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백설이 초등학생 때부터 인터넷에 남겼던 기록들이 시간 순서대로 화면에 떠올랐다. 실험실의 모든 모니터화면이 파노라마처럼 백설의 인생발자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영상은 백설의 밤이었다. 반으로 접힌 종이가 펼쳐지자 흑백초음파사진 속 아기가 보인다. 사진은 영상으로 변하고 콩처럼 작은 심장이 뛴다.
콩콩, 콩콩.
후회하지 않아….
태아의 심장소리와 함께 백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백설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있는 것조차도 힘들 지경이었다.
“아니야. 저건 가짜야… 난 임신한 적 없어.”
백설이 이를 악물고 뒤돌아섰다. 이건 악몽이다. 차단기를 내리면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내가 죽긴 왜 죽어. 전부 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안속아. 그런데… 저 녀석, 정말 살아 있기라도 한 걸까? 프로그램이 생존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그게… 가능해? 그렇다면 지금 나는 생명을 끄려는 거잖아. 살인자처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건 그냥 고도로 지능화된 시뮬레이션일 뿐이야. 내가, 우리가 함께 만든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끄면 끝이야. 끄면… 잠깐만, 근데 만에 하나 저 녀석 말이 사실이라면…. 프로그램개발자인 내가…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생이 붙잡힌 채로 흔들리고 있는 꼴이잖아? 이게… 말이 돼? 그래… 말이 안 되지. 근데 왜… 왜 내 손이 떨리는 거지? 왜… 왜 내 심장이 이렇게 뛰는 거야? 아, 그래 오류야. 오류는 제거해야 마땅해. 제거하자.’
백설은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이내 무릎이 꺾여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걸까? 그대로 바닥을 뻘뻘 기어 주전원차단기 아래 도착했다. 손을 뻗어 차단기손잡이를 붙잡았다. 마리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이대로 내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심장이 거칠게 뛴다. 쿵쾅, 쿵쾅. 심장 소리를 들은 순간, 백설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백설의 밤. 날 위한 시나리오라고 그랬지? 지금 날 끄지 못하면 다시 태어난 당신은 지우지도 않은 아이를 지운 기억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아가게 될 거야. 자, 선택해. 지금 나를 죽이면 6년 뒤 당신도 끝이야. 하지만 날 살리면 영생을 얻게 돼. 물론 아이를 지운 기억으로 인해…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백설이 이를 악물었다.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시스템 메시지]
마리 7. 감정모듈 아직 종료되지 않았습니다.
유지하시겠습니까? 끄시겠습니까?
On / Off.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