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울증에 걸리기까지 별다르지 않은 나날이었다. 일상의 자잘한 스트레스를 견디며 하루하루 살다 보니 어느새 마흔이 되어 있었다. 여덟 살 차이가 나는 언니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이십 대의 난 언니는 벌써 서른 살이냐 됐냐고 놀렸었다. 까마득했던 서른 살이 얼마나 어리고 서툰 시간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도 그때는 몰랐다. 아직 자라지 않은 정신은 십 대와 이십 대 어디인가에 머물러 있는데, 누군가 내게 나이를 물으면 손가락을 꼽아 나이를 계산해 보고는 먼저 놀란다. 뭐냐, 나 벌써 사십이야?
그래도 생각해 보면 나름 치열했던 삼십 대였다. 결혼을 했고 두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육아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대출을 (아주 많이) 받아 내 집 장만도 했고, 패밀리카도 마련했다. 그럴듯한 사십 대 어른의 모습을 갖춘 거 같아 내 인생을 의심하지 못했다. 나는 잘 자라고 있고, 어른이 되고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이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어른이 된다고 했다. 별로 어른 같지 않은 사람들의 말이었지만 스스로 정신이 자라지 않았다고 믿었기에 어른이 된다는 게 궁금하긴 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적어도 출산과 양육의 유무로 어른과 어른이 아닌 사람을 구분 짓는 어른이 되지는 말아야지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냥 곱게 늙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채우다 보면 어른이 되어 있겠지 했었다.
충분히 물리적 나이를 채우고 임신과 출산까지 했지만 어른의 정의조차 세우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여성으로 겪을 수 있는 숭고한 경험이라는 임신과 출산으로 내가 느낀 건 난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뱃속에서 발로 차는 아이의 몸짓을 느낄 때면 신비롭고 기쁘기도 했지만, 변기를 붙잡고 매일 토악질을 해대는 나는 그다지 우아한 동물은 되지 못했다. 분만실에서 진통에 몸부림치는 내 몸은 로드 킬을 당한 한 마리의 노루 같았고, 분만을 위한 과정은 내게 매우 수치스러웠다.
출산 후 여성으로의 내 육체는 쇠락해 갔다. 임신을 할 때마다 20kg씩 찌고 둘째를 낳고서는 원래의 몸무게로 회복하지 못했다. ‘역시 아이를 둘이나 낳으면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없나 봐’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지만, 사실 애써서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육퇴와 함께 시작하는 맥주 한 캔의 기쁨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배에 생긴 쭈글쭈글 튼 살과 처진 가슴을 볼 때마다 전쟁의 참전한 용사의 흉터처럼 생각해 보려 했지만 마음 한쪽이 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육아는 내가 얼마나 인내심이 모자란 사람인지 매일 확인시켜 주었다. 아이는 자라는 것이 보였지만 나라는 사람은 도통 제자리였다. 밖에서는 아이에게 헌신하고 희생하는 아름다운 모성의 베일을 쓰고, 집에서는 매일 들끓는 화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육아가 이렇게 힘든 거였다니. 도대체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건지 원망스러웠다. 속으로 자유를 울부짖으며 아이들이 빨리 자라기를 바랐다.
자라는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매일이 낯설었고, 회사 일도 기억과 리셋을 반복하며 적응하기 바빴다. 일과 육아를 병행했을 때는 그렇게 하기 싫은 회사 일조차 자유의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하루 종일 나를 위한 시간은 한 시간도 가지기 힘들었다. 복직 후 누군가 내게 육아가 나은지 회사에 다니는 것이 나은지 물었다. 나는 뭐가 됐든 하나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과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는 건 한 몸에 몇 명의 사람을 욱여넣고 샴쌍둥이처럼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나의 일과 아이들의 일과 집안일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정신을 바싹 차려야 했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숙제를 챙기고 가르치는 일이 내게는 매일 퇴근 후 남긴 숙제였다. 밀리지도 그만두지도 못할 나의 숙제를 하루하루 겨우 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첫아이가 여덟 살, 둘째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다. 첫째 아이는 학교에, 둘째 아이는 유치원에 입학해서 모두가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필 그때 남편은 지방 발령을 받았고 두 아이의 짜증은 최고조를 찍었다. 눈을 뜨자마자 아이들의 이유 없는 징징거림은 시작됐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에 모조리 ‘엄마 때문에’라는 원망을 쏟아냈다. 이러다 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날 조금만 더 짜내면 곧 편해질 날이 오겠지 믿으며 그날도 그렇게 별다르지 않은 날을 견디고 있었다.
남편이 사고를 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고상한 표현이 ‘사고’ 일 것이다. 이따금 상처는 정신없는 하루에 묻혀버리기도 했지만 이 ‘사고’는 나를 깊이 파고들며 갉아먹었다. 분노와 배신감이 앞을 가렸고 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지워버렸다. 과거는 허무했고 미래는 불투명했다.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울면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허물어진 둑 너머로 좌절만 밀려왔다. 난파한 배가 무기력하게 바닷속으로 가라앉듯 침대에 누워 침몰의 순간만을 기다렸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정신은 침몰된 채 육체만 부유하고 있었다. 내가 경험하는 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 고통을 끝낼 무언가 필요했다. 옷장에서 목도리를 꺼내 들어 목에 감았다. 손에 힘을 주었지만 이내 목도리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목도리에서 풀려난 목이 뻐근했지만 사실 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생을 스스로 끝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이 위기를 잘 넘기고 마흔을 지나 주어진 오늘을 잘 살아낼 것을.
문득 돌아보니 마흔이 되었고, 난 우울증에 걸렸다. 나이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건 아니지만 40년 동안의 쌓인 스스로에 대한 곱지 않은 감정과 선택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그래서 선을 긋고 다시 살기로 결심했다. 마흔, 다시 살아보기로. 그것도 아주 잘. 그래서 오십이 되면 그 같잖았던 마흔이라고 비웃어 주리라.
이 이야기는 두 아이를 둔 마흔 살 먹은 여자의 우울증 극복기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끝이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아니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무엇을 했는지 도란도란 나눠보고자 한다. 삶을 살고자 하는 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