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의 731부대 유적지
731부대의 존재는 어릴 때부터 한 번쯤 듣게 된다.
‘끔찍한 생체실험을 비밀리에 수행한 일제의 세균전 군부대….’
일본어로 통나무를 의미하는 ‘마루타’라는 단어, 사람의 몸으로 장난치며 극악무도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을 것 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 철저히 감춰진 소규모 실험실 등. 731부대라고 하면 머릿속에 대략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그러나 731부대의 존재는 뜬소문이나 영화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얼빈에는 731부대가 실존한 건 물론이고, 이 부대가 얼마나 조직적이며 큰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왜 파괴된 인간성과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사례인지 낱낱이 고발하는 박물관이 있다.
바로 이름도 긴 ‘침화일군제칠삼일부대죄증진열관(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罪证展列館)’, 즉 중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의 731부대의 범죄 증거를 전시하는 박물관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Unit 731 Museum’라고 번역되니, 우리말로는 731부대 박물관 정도로 표현하면 좋을 듯하다.
여행자들이 주로 머무는 하얼빈 시내 중심지에서 지하철로 30분이면 종점인 ‘신장대로’ 역이다. 이곳에서 다시 걸어서 10분 거리에 731부대 유적지가 나온다. 유적지 부지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광활한데, 도로와 접하는 곳에 커다란 박물관 건물이 자리한다.
731부대 박물관은 2015년 8월 15일 현재의 건물, 신관을 개관하면서 총 6개의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731부대는 많은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되었다. 박물관이 다른 모든 스토리텔링 매체와 가장 크게 차별화할 수 있는 점은 현장과 유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에게도 박물관은 충격적인 느낌과 스산한 분위기를 제공하며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 장소는 실제로 731부대가 있었던 현장이기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폭력적인 죽음, 대규모 학살,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은 후대에 다크 투어리즘의 대상화가 된다. 그런 장소에서 박물관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박물관은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고, 이를 대중에게 계속해서 상기시킬 사회적 의무를 갖기 때문이다.
특히 731부대 유적지는 특별한 현장이다. 모두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으나 역사로는 ‘기록되지 못한’ 사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록되었으나 지워졌고, 미국과 소련의 묵인 아래 오랫동안 철저히 은폐되었다. 그런 현장을 발굴하고, 기록을 찾고, 기억을 전하려는 박물관을 관람해 보았다.
나는 하얼빈을 여행하면서 731부대 유적지를 두 번 방문했다. 짧은 여행 중에 박물관을 두 번 이상 방문하는 건 정말 예외적인 일이다. (최근에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정도였다. 도저히 하루 안에는 클리어할 수 없는 미술관..) 사실 뜻깊어서 두 번 간 것은 아니었고, 한 번은 허탕을 쳐서였다. 박물관의 운영 정보를 몰라서 몸이 고생한 것이었다.
“트립어드바이저에는 매일 운영한다고 쓰여있었는데….”
알고 보니 731부대 박물관은 월요일이 휴관일이다. 동행한 친구는 헛수고한 게 아쉬웠던지 중얼거렸다.
중국에는 ‘고덕지도(高德地图)’라는 지도 어플이 있다. 구글 맵으로는 자세한 지도 정보가 나오지 않으니 중국을 여행할 때는 꼭 다운로드 받아야 할 유용한 앱이다. 그런데 고덕지도에도 731부대 유적지 박물관의 운영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또는 많이 부족한 중국어 실력으로 못 읽은 걸 수도 있다)
한 번의 허탕 후 관람한 박물관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또 오길 정말 잘했다.
놀람 포인트 몇 가지..
QR코드 등록이나 사전 예약할 필요 없이 여권을 보여주면 입장할 수 있다. 입구에서 국적과 이름만 작성하면 통과된다. 너무 간편하다! 관람료도 무료!
한국어 오디오가이드가 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표준 한국어를 구사하는 성우의 내레이션과 함께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여권을 맡기면 무료로 대여할 수 있다.
챕터별 구성과 전시내용이 굉장히 많고, 알차고, 정보의 홍수다. 전시를 꼼꼼히 보았더니 약 3시간 소요되었다. 731부대 복원 건물까지 돌아본다면 4시간 정도다.
지하 전시실에서는 천장에 물이 새서 계단실을 막아놓았다. 무서울 정도로 많이 새서 건물에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수 때문에 1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몇 번이나 뺑글뺑글 돌았다.
박물관을 관람할 때, 전시기획자의 마음으로 전시실의 첫 번째 공간에 들어가게 된다. 과연 어떤 이야기로 전시를 풀어나가려고 할까? 이때 관람객의 집중력도 높고, 앞으로 전시 관람의 관점과 포인트가 무엇인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731부대 박물관의 첫 전시실은 바로 ‘일본 세균전 체계(Japanese Biological Warfare System)’를 다룬다. 이는 731부대가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천황을 필두로 조직적으로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조직이라는 걸 강조한다.
1936년, 일제는 천황의 칙령으로 세균전 부대를 설립하고 중국 여러 지역에 거대한 세균전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731부대뿐 아니라, 길림성의 100부대, 북경의 1855부대, 남경의 1644부대, 광동의 8604부대 등 동북, 화북, 화중 등 여러 지역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규모로 말이다. 만주지역의 병원과 일본의 제국대학이 협력한 것은 물론이다. 특히 제국대학과의 연결고리는 중요하다. 제국대학 출신의 731부대원들은 종전 후에 다시 제국대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731부대는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년)라는 인물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치바 출신의 수재로,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이자 세균학 박사였다. 무엇보다 그는 군인이었다. 당시 일본제국은 세균전에서 큰 가능성을 보았다. 다른 제국에 비해 물자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세균병기를 활용한 전쟁은 일제를 승리로 이끌어 줄 거라 기대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 관동군 방역급수부가 편성되고 조직적으로 세균전 연구가 시작되면서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부대장이 되었다.
그들은 왜 굳이 하얼빈에 세균연구기지 731부대를 만들었을까?
먼저 대규모 생체실험재료를 현지에서 바로 수송할 수 있어서였다. ‘특별이송’이라고 부르는 트럭에 약 1500명의 피해자를 싣고 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별이송은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 등을 이송 대상으로 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은 주로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등이었다.
두 번째는 여차하면(실험이 잘못되면) 현지에 책임 전가가 용이해서였다. 세균 전염이나 병원균 발생의 위험성을 내지가 아닌 중국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디작은 하얼빈 크디큰 731’
731부대를 자랑스러워하던 부대원들의 슬로건이다.
놀라운 점은 731부대가 생체실험만이 아니라 군인양성의 훈련기관으로서 역할도 했다는 것이었다. 상급 부대원들 대다수는 제국대학 출신 엘리트였다. 50명 이상이 의학, 병리학 등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이시이 시로는 자신의 고향에서 14세에서 17세 사이의, 가난하지만 성적이 우수한 소년병을 모집해 731부대로 데려왔다. 어린 병사를 키워낸 건 세균전을 장기적으로 준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체를 실험도구로 삼았다는 것 자체로 끔찍한 일이다.
전시는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이미 유명한 동상 실험, 독가스 실험 등이 소개되었고, 안달비행장에서 페스트균 투하 실험은 실물과 비슷한 모형과 현장을 보여주어 더욱 사실감이 있다. 이외에도 실험보고서, 인체 그림 등을 다수 전시하여 인체로 다양한 세균 실험을 했음을 방대한 자료로 제시한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은폐에 관한 것이다.
패전 선언 직전인 8월 14일까지 이들은 건물을 폭파하고 서류를 소각하고 인적증거를 인멸했다. 실험대상으로 억류했던 수감자들은 모두 죽이고, 시체를 태우다가 시간이 부족해 포대에 담아 강에 버리기도 했다. 시체 소각장을 상징하는 세 개의 굴뚝은 박물관의 건축에도 반영되어 있다.
부대원들은 해산하면서 앞으로 서로 연락하지 않을 것, 부대원 신분을 노출하지 않을 것, 그리고 향후 공직을 맡지 않는 것 등을 당부받았다.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이시이 시로 같은 고위급 장교는 전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철수했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전용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도주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전범 재판에 설 것이 두려웠던 이시이 시로는 죽은 척하기 위해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바롭스크 재판에 선 군인들도 몇 년형을 살지 않고 다시 일본에 귀국했고, 미국과 러시아의 묵인 아래 731부대원들은 대부분 제국대학과 연구소로 돌아갔다.
전쟁, 학살, 분쟁, 차별 등 근대적 이슈를 다루는 박물관에서는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고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이슈를 대중 앞에 전시하면서 이를 담담하게 설명할지, 변호할지, 분노할지, 어느 정도로 사실적으로 재현할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그건 전쟁과 관련된 이슈가 트라우마, 살아남은 자의 기억, 화해, 용서 등의 키워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박물관은 노선이 확실하다. ‘일제의 범죄를 증거로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이름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가? ‘죄증진열관(罪证展列館)’은 731부대를 범죄사실로서 대중에게 이야기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이는 731부대라는 과거를 치유의 대상보다는 아직도 범죄 사실을 은폐하려는 일본과 미국에 대한 강한 메시지라고 와닿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731부대의 피해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군부대를 철수하면서 모두 학살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가해자는 존재한다. 731부대에 하급 군인으로 복무했던 90대 노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731부대 관련자들은 왜 처벌받지 않았는가?
박물관에서는 일본이 감추고, 미국이 덮어주었다고 지적한다. 마지막 6번째 전시실의 제목이 ‘전후재판(战后审判, The Post-war Trial)’인 것과 연결된다. 감옥 창살 뒤로 부대원들의 이름을 가두었다. 박물관에서 대신 심판하겠다는 상징적인 메시지다. 지금의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중국인 관람객의 입장에서 미국과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을 유도하기 좋은 포인트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해와 평화의 코드로 박물관을 설립하는 일본과 다르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쟁과 관련된 박물관의 이름에 ‘평화기념관’, ‘평화자료관’ 등의 단어를 사용한다.
가해의 역사를 감추려는 일본은 ‘평화’라는 교묘하고 역설적인 단어 뒤에 숨는 경향이 있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관동대지진’의 100주기 전시에서는 조선인 대규모 학살 사실을 숨기고, 731부대의 존재는 이야기하길 꺼리고, 원폭의 피해 사실에 대해서는 슬퍼하며 반전을 부르짖는다.
나가노의 이이다시에 있는 평화기념관(飯田市平和祈念館)에서 731부대에 대한 자료를 1년 넘게 전시하지 못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난징대학살, 태평양전쟁에서 저지른 만행,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부의 거부감으로 인해 점점 전시실에서 사라지고 있다. 오사카국제평화센터, 사이타마현 평화자료관에서는 이미 전시를 내렸다고 한다.
한편, 일본에서도 ‘가해의 역사’를 사실대로 서술해서 역사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제시하려는 시민단체도 있다. 나가사키의 원폭 자료관은 다가오는 2025년 피폭 80주년 리뉴얼을 앞두면서 전시의 일부분이 수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계에 전해지는 원폭 전시를 요구하는 나가사키 시민의 모임(世界に伝わる原爆展示を求める長崎市民の会)’ 시민단체가 원폭의 피해와 함께 가해자로서의 역사도 함께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구치 카즈키 교토부립대학 명예교수는 ‘피해의 고통을 호소하려면, 다른 피해자의 호소를 듣는 귀를 가지고 공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지식인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야 할 텐데..
전시 관람을 마친 한 중국인 관람객이 메시지를 남기는 패널에 ‘세계평화’라는 네 글자를 큼지막하게 썼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의 문제로 중국 내에서 일본에 대한 여론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뉴스 보도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인들은 늘 싫어하는 외국인으로 일본인을 먼저 꼽는다. 가장 큰 이유는 난징대학살 때문일 것이다. 731부대 박물관도 자칫 일본에 대한 반감과 악감정을 키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박물관의 다분히 감정적인 메시지와는 달리, 이 현장을 통해 무언가를 느낀 관람객들은 그 속에서 평화를 생각하고 염원한다. 그것이 또 박물관의 매력이지 않을까?
[하얼빈의 731부대 유적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