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만큼이나 쌓이는 비움 대상들!
갑자기 책꽂이에 눈이 고정된다. 영화 '인디아나존스'에 나올 법한 책들이 서재 한 켠에 꽂혀 있다. '저 책은 언제 봤지?'라는 의아함과 함께 미안한 마음에 책을 펼쳐 본다. 먼지 내음과 함께 '나에게 관심 좀 갖지'라고 책망과 함께 성큼 다가온다. 오래 전에 관심을 갖었던 분야의 취미서였다. 요즘은 어지간하면 책을 구매하기 보다 동네 도서관을 이용한다. 보고 싶은 책은 주문해서 본다. 몇 번이고 펼쳐 볼 만한 내용이다 싶으면 직접 구입한다. 그것도 광화문까지 발품을 팔아 가면서 말이다. 굳이 인터넷 주문을 고사하는 이유는 목차와 책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보고 결정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재 한 켠을 또 차지하면서 장식용으로 둔갑할 확률이 높아진다. 계절마다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보따리 보따리 싸 들고 가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소위 '지름신'과는 적정거리를 둬야 한다. 일시적 구매충동에 의해 앞 뒤 가리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누르다 보면 일년 내내 눈 한 번 맞주치지 않은 것도 있다. 요즘은 쇼핑 천국이다. TV에서는 홈쇼핑이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스마트폰에서는 수시로 팝업창에서 가심비를 이유로 충동구매를 부채질한다. 한때 미니멀라이프(minimal life)가 떠들석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나 또한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지만 현실을 녹록치 않다. 40여년 넘게 즐기고 있는 등산도구는 창고 한 가득이다. 스틱만 해도 열 셋트가 넘는다. 텐트만 해도 1인용 까지 4동이나 된다. 집 안에 집이 4채가 더 있는 셈이다. '아직은 쓸만해'라는 말 한마디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짊어지고 산다.
비움은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덧될 수' 있도록 터를 만드는 것!
왜 버리는 것을 망설일까? 매주 분리수거할 때 함께 처분하면 될 텐데 주저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이 붙잡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매달리는 걸까? 비움은 잃어 버린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비움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트렌드에 맞는 새로운 것이 자리할 수 있는 틈새를 마련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여유가 없으면 삶 자체가 골동품으로 가득한 삶이 될 수 있다. 쉰 내가 푹푹 나는 그런 인생말이다.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것이 세상살이다. 그 반복을 굳이 거부하는 이유는 뭘까? 짧은 생각으로는 추억이 사라진다는 아쉬움과 함께 두려움이 겹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짧은 인연이겠지만 자신의 소중한 과거가 머물러 있었을 만한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역사를 지운다는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눈에 보이는 유형재만 버림의 대상이 아니다. 가슴에 켜켜히 쌓인 보이지 않는 분노와 슬픔 같은 아픈 흔적도 지워야 치유된다.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치유가 되고 새 살이 돋으면서 새로운 것이 움틀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유효기간이 지난 경력은 비움의 대상이다!
슬기로운 인생 2막을 책임질 경력도 마찬가지이다. 매년 자동차 수는 증가하지만, 카센타는 매년 큰 폭으로 감소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최근 신규 자동차는 전기자동차 또는 수소자동차이다. 내연기관 중심의 정비기술로는 감내하기 어려워졌다. 즉, 유효기간이 지났기에 새롭게 덧되어져야 할 경력이라는 점이다. 자동차 정비기술이라고 똑 같은 기술이 아니다. 내연기관 중심의 정비기술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일산화탄소가 지목받으면서 ESG 일환으로 전기자동차 또는 수소자동차가 늘고 있다. 세계적 정책의 방향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내연기관 정비기술로는 버티기 힘들어졌다. 기존 기술에 신기술을 접목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효기간이 지난 과거 기술은 폐기처분해야 한다. 그 자리에 디지털이 접목된 기술로 덧되어야 한다.
'늙은 마음'을 내려 놓자!!!
나이 들어 과거에 연연하면 추잡해 진다. 예전의 직장 명성과 직책 등 지나간 추억에 얽매이는 우(愚)를 범하지 말자.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과거 명함에 집착하는 순간 관계는 단절되기 쉽상이다. 퇴직은 기존 관계를 정리(整理)하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整立)하는 변곡점이다. 정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불필요한 것을 줄이거나 없애서 깨끗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 사전적 정의이다. '비운다'는 개념이다. 비운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고, 버리면 시간과 공간의 틈새가 만들어지면서, 그 틈새에 새로운 것이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경력이던 말이다. 오십이 넘으면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려놓아야 할 품목은 많다. 그 중에서 가장 빠르게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은 '늙은 마음'이다. '늙은 마음'은 대접받으려 하고 어른 행세를 하면서 가르치려 하는 꼰대이자 노땅의 대표적 주자이다. 이 늙은 마음을 내려놓자. 그래야 수평적 문화에 가까이 할 수 있다.
'내려놓음'은 몸으로 표현할 때 완성된다.
갓 태어난 아기부터 임종을 앞둔 분까지 모두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이다. 그 인격체를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도덕적으로 바뀐 기준을 인정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자. 그동안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강압적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성별 역할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던 가정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가정이 그랬을 것이라 유추해 본다. 오십이 넘고 육십이 되면 '시간 부자(time rich)'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움직이자. 지시와 명령 대신 몸으로 표현하자. 그것이 내려놓았다는 증표가 아닐까 싶다. 특히 남자한테 요리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요리는 창의적 활동이다. '냉장고를 부탁해'와 같이 한정된 재원으로 자신만의 레시피로 가족 모두 또는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드는 것 만큼 치매 예방에 좋은 것은 없다. 배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옮겨 요리를 해보자. 앞치마 착용에 두려워하지 말자. 남자가 요리에 자유로울 때 자신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보이지 않던 실타래의 매듭이 풀어진다. 그래야 낮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저녁에 다시 모일 수 있는 '따로 또 함께'를 실천할 수 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생각에 그치면 안된다. 몸으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 행동으로 옮겨질 때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나는 아침마다 드립커피를 만든다. 원두가 갈리면서 향긋한 커피 내음으로 주방을 한 번 정화시켜 주고, 조금씩 물을 머금으면서 거름망을 통과할 때 또 한 번 식욕을 자극한다. 샐러드와 함께 먹는 커피는 그래서 더욱 맛있나 보다. 내가 만들면 남기지 않는 것도 만드는 과정에 배어 있는 나의 노력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 생각해 본다. 내일 아침에도 샌드위치를 만들어 커피와 함께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