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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직원 Jun 24. 2024

정말 사수 없이 일잘러가 될 수 있나요?

요즘 브런치 글이나 강연 사이트에서 사수 없이 일잘러가 되는 법 같은 글을 종종 보곤 한다. 경력자를 구하기 어려운 시장상황에 빚어낸  촌극이 아닐까 싶다. 그런 글을 볼 때마다 '에이 사수 없이 일잘러가 될 수 있다고? 거짓말쟁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우스에 손이 가는 걸 보면 확실히 사수 없이 일잘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구직자 입장에서 꽤나 달콤한 유혹인 것 같다. 그래서 정말 사수 없이 일잘러가 될 수 있는 걸까?




사수 없이는 일잘러가 될 수 없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사수 없이는 일잘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수 없이 일잘러가 되는 법 같은 글이 흥하는 건 사수 없이 일을 하면서 '내가 잘하고 있은 건가?' '이 방법이 맞는 건가'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획은 내가 전문가야 사수 같은 거 필요 없어 내가 다 알려줄게 라는 기획 알못 사장의 말에 속에 입사했지만 얼마 안 가 사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인터넷상에서라도 답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노린 장사 속이다.

다른 직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기획만큼은 나는 꼭 사수가 필요한 직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 이제부터 하나씩 이유를 얘기해볼까 한다.




기획에는 정석과 정답이 없다


건축설계일을 하는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건축이 기획과 꽤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의 요구에 맞춰 설계도를 그리고 설계도에 맞게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관리, 감독하는 과정이 기획 업무와 유사한 프로세스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유형의 건물을 만드느냐 무형의 서비스를 만드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큰 틀은 같다. 그런데 건축설계가 기획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 건축설계는 도면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어떤 요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정해진 규격과 기준이 있다. 그런데 기획은 설계서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정해진 규격과 기준이 없다. PPT든 피그마든 노션이든 작업자에게 나의 의도를 잘 설명할 수 있다면 업무툴은 도구일 뿐이다. 정형화된 규칙이나 규격이 있다면 책이나 강의를 보고 독학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런 게 없으니 독학으로 공부하기가 어렵다.


기획일을 10년 넘게 하면서 100명 이상의 기획자를 만나봤지만 정말 일 잘한다라고 느낀  사람들은 회사가 작정하고 키운, 체계적인 육성 과정을 통해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간혹 아주 드물게 사수 없이 혼자 배운 것 치고 좀 하는데 라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 말은 저 친구 참 똘똘한데 라는 뜻이지 기획을 참 잘해라는 뜻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사수 없이 혼자 독학으로 기획을 공부한 사람들은 기본기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옆에서 적절한 조언을 해줬거나 살짝 방향성만 잡아줬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성장의 골든타임


'20대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이라는 SNS 글이나 자기 개발서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멘트 중 하나가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늦은 때는 없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어쩌면 가장 빠른 때일 수도 있다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다들 그다음으로 이어질 중요한 얘기는 해주지 않는다. 시작하기 늦은 때는 없지만 늦게 시작하면 일찍 시작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몇 배는 더 고생해야 된다는 사실 말이다.


기획은 기본기가 몹시 중요하다. 벤치마킹을 한다거나 회의록을 쓴다거나 테스트 시나리오를 쓴다거나 하는 허드렛일 같아 보이는 일들 말이다. 이런 건 신입 때 좋은 사수를 만났을 때만 배울 수 있다.


타 직무에서 기획자로 전향했을 때 가장 어려움을 겪는 포인트도 바로 이 지점이다. 회의록을 써본 적이 없으니,  잘 쓴 회의록이 어떤 건지 본 적이 없으니 중요 의사결정 포인트만 요약해 놓은 요약집이 아니라 모든 대화를 기록해 놓은 녹취록처럼 회의록을 쓰고 테스트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없으니 어떤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수가 없다면 기본기를 쌓을 소중한 성장골든타임을 놓칠 가능성이 높다. 향후 업무를 하는 데 있어 10년 20년 동안 써먹을 소중한 토대를 쌓지 못하는 것이다.




나 혼자서 전투에 나간다는 것


회사에서 사수가 하는 역할은 다양하다.

사수의 역할을 게임으로 비유해 보자.

사수는 윗선이나 타인의 압박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탱커부터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았을 때 격려의 말로 회복을 도와주는 힐러,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가이드이자 전투에 나설 때는 제일 먼저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는 메인딜러다. 사수가 없다는 건 나 혼자 맨몸으로 전투에 나가는 것과 같다. 칼을 어떻게 쥐고 총은 어떻게 쏴야 하는지 방패로 적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어디를 공격해야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모른 채 맨땅에 헤딩하듯 전투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사수가 있다면 혼자서 겪어야 할 삽질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혼자서는 6개월 넘게 걸릴 일도 사수가 있다면 3개월 만에 해결할 수 있고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사수의 적절한 조언과 가이드가 있다면 혼자 일할 때보다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시행착오로 낭비할 시간이 줄어들면 혼자서 일할 때보다 2배 3배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사수가 있으면 경험치 2배 이벤트에 당첨되는 것과 같다. 경험치 2배 이벤트 VS 그냥 일하기.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다양한 스타일의 체득


성장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은 우물 안 개구리다. 나의 경험이 그리고 능력이 이 회사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인가, 어디를 가든 일정 이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것인가가 전문가를 가르는 중요한 척도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외모와 성격이 모두 다르듯 일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문서 작성 스킬은 조금 부족하지만 말을 기가 막히게 잘해서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문서는 기똥차게 잘 만들지만 말을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문서를 만들어도 각자의 표현법이 모두 다르다. 기획에는 정석과 정답이 없지만 잘 만든 문서는 있다. 좋은 것은 모방하고 나의 스타일로 체득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지금까지 내가 본 수많은 문서의 장점만 모아놓은 잘 만든 문서에 가까워질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을 하고 그들의 일하는 스타일을 모방하면서 나의 스타일을 확립해야 한다. 그게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전문가가 되는 지름길이다.



마지막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그래도 열심히 독학하고 스터디도 하고 강의도 열심히 들으면 일잘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일을 10년 동안 하면서 어림잡아 같이 일해본 기획자가 100명이 넘는다. 내가 '저 사람 참 일 잘하는데'라고 생각한 사람 중 사수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독학해서 스스로 성장한 사람은 없다. 적어도 짧은 내 경험 안에서는 그렇다. 강의하나 책 한 권 더 팔자고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다. 희망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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