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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May 02. 2023

판옥선과 반도체, 역사를 만드는 '고위관료'의 중요성

역사 속 경제이야기 2-이준경과 추경호

※반도체 관련 세제 논의가 있었던 지난 2월에 작성된 글임을 밝힙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수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일본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조정의 예상과 달리 15만명의 대군을 파병했다. 상륙을 허용한 조선군은 계속해 패배했다. 도성 서울이 불탔고, 국왕 선조는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갔다. 조선 수군이 일본의 보급역량을 끊어놓지 않았더라면 일본군은 계속 진격했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조선 수군의 연이은 승리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 같은 병력과 같은 배를 갖고도 칠전도에서 지리멸렬하게 패한 후임 통제사 원균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역량이 가장 드러나는 전투는 1597년의 명량해전이다. 이순신은 단 한 척의 배로 진도 울돌목을 틀어막고 적선 수백척과 맞서 승리했다. 이순신 장군은 일기장에 명량해전을 ‘천행이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명량해전을 ‘천행’만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가 단 한 척만으로 일본 수군과 맞설 수 있다고 판단한 데엔 주력함선인 ‘판옥선’에 대한 신뢰도 깔려있다.  


훗날의 기록에 의하면 판옥선 탑승 정원은 130여명으로 추정된다. 일본 수군의 주력인 세키부네는 80여명 정도였다. 병력부터 앞선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크고 단단했다. 일본 수군은 주로 근접전으로 상대 뱃전에 배를 붙인 뒤 백병전으로 선박을 빼앗는 식의 전술을 구사했는데 흔들리는 물살에서 더 높은 배에 올라타기란 쉽지않다. 또 판옥선은 평저선 형태로 지어져 연안의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도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선박 위의 화포들을 사용하기 쉬웠다. 조선 수군 승리는 대부분 화포의 우위에서 비롯된 경우들이 많았다. 판옥선은 소나무, 참나무, 가시나무 등 단단한 목재를 사용했고 함선의 두께도 굵었다.  

일본 수군의 함선은 녹나무와 삼나무 등 가벼운 목재를 사용했고 선체 두께도 가벼웠다고 한다. 일본 수군이 원하는 근접전이 이뤄진다고 해도 함선 스펙상의 우위로 밀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판옥선 내부 군사들이 제대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조선 수군의 우위는 명확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을 ‘천행’이라고 표현했지만 치밀한 전략·전술적 계산과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판옥선이라는 무기체계가 있기에 가능했다.   

사실 판옥선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맹선 위주였다. 판옥선은 1555년(명종 10년) 벌어진 을묘왜변 이후 조선 조정의 판단에 의해 새로이 제작된 함선이었다. 을묘왜변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있었던 조선과 일본간 전투 중 가장 큰 규모로 벌어졌다. 70여척의 왜선이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일대에 상륙한 뒤 전라도를 약탈했다. 한 척당 80여명이니 5000∼7000여명 정도다. 조선군은 이들을 막지 못해 밀렸고, 결국 중앙에서 내려온 전라도 도순찰사 이준경과 이준경의 형인 전주부윤 이윤경 등의 활약으로 막아낸다.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방어 시스템을 재점검하는데 기존 함선으로는 일본 수군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진다. 내부 회의에서 영의정 심연원은 “중국 기술을 받아들여 왜의 배가 단단히 만들어지는 바람에 우리 배의 총통으로는 뚫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기존 맹선보다 더 커진 판옥선을 만든다. 판옥선에는 기존 총통(화포)을 개량해 실었다. ‘논의 끝에’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비용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을 필두로 한 외척의 득세와 빈부격차의 확대, 권력을 가진자들의 부패 등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자연히 국가 예산은 비어갔다. 그러다보니 함선을 만들고 화포를 싣는 것에 소극적인 사람들도 생겨났다. 예나 지금이나 함선 하나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하다. 더구나 판옥선은 총통(화포)을 많이 장비하는 고가 장비였다. 어차피 일본군은 물러갔는데 돈드는 일을 굳이 지금 해야 하느냐는 심리가 깔려있었을 것이다. 을묘왜변 다음해인 1556년(명종 11년) 사헌부는 “관아의 창고에 있는 물건들은 씻은 듯이 텅 비었는데 지난해 전선과 총통을 만드느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만약 아무 일이 없다면 총통을 꼭 만들 필요는 없다”며 총통 만드는 것을 천천히 하자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그림으로 표현된 판옥선 모형. 한국학중앙연구

하지만 다행히 그 뒤에도 판옥선은 꾸준히 건조됐고, 총통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선 그 이후에도 신형 판옥선에 대한 실험이 계속 이뤄진 것으로 나온다. 누가 주도한 걸까. 기록은 판옥선 건조의 핵심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의사결정권자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있게 한다. 

을묘왜변에서 조선군을 이끌었던 이준경이다. 을묘왜변 후 이준경은 병조판서와 병조 업무를 총괄 감독하는 우찬성 직을 겸임했다. 판옥선의 건조와 총통의 주조는 이준경의 승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이후 조선 조정의 움직임을 볼 때 이준경이 총대를 매고 밀어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으레 정부가 정책을 펼칠 때에는 반드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를 뚫어내려면 고위 관계자의 명확한 지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윤원형과 대립각을 세웠던 이준경은 당대부터 추진력과 명확한 일처리로 유명했다.  


누구나 경험을 하지만, 모두가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대비하지는 않는다. 이준경은 당대 조선 관리 중 경험을 미래로 바꿀 줄 아는 극소수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을묘왜변을 경험하면서 당대 조선군의 현실과 방어대책의 필요성, 일본군의 강·약점 등을 파악했고 정책에 반영할 정도의 권력과 권위가 있었다. 그는 명종이 승하할 때 영의정이었는데 책임지고 방계 왕족인 선조(하성군)의 등극을 밀어붙였다. 이때 도성에 들어온 중국 사신들이 “지금 누가 수상인가”라고 묻자, 통역관이 “이준경이라는 사람인데 나라 사람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대답했다는 기록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관료였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준경이 지은 책 동고유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예나 지금이나 고위 관료의 중요성은 크다. 국가라는 한 공동체의 키를 쥐었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감을 수반한다. 관료의 판단에는 ‘과거’도 있어야 하며 ‘미래’도 포함되어야 한다. 자신의 경험과 인식도 들어가 있어야 하지만, 타인의 조언과 의견도 섞여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종합한 뒤 자신의 확신을 거쳐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집행할 때에는 최대한의 설득과정을 거치면서 추진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정책 결정 과정을 ‘종합 예술’에 비유하고,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선에 판옥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준경에는 이 ‘종합적 사고 능력’이 있었다.  


467년 뒤 기획재정부가 반도체 시설 투자 세액 공제율 법안, 일명 ‘K-칩스’법을 통과시킬때 보여준 모습에서 이 종합적 사고 능력은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과 관련한 전 세계적 경쟁이 가속화되는 시점의 결정이다. ‘현대의 석유’라고 불리는 반도체 산업은 점점 국가 운영 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칩을 직접 들어보이고, 미국과 일본, 대만을 비롯한 전세계 국가들은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한 각종 지원책을 내놓는다. 반도체 산업을 발전시키지 못한 중국은 막대한 인력과 자본을 동원해 기술 발전에 나서고 미국은 이를 방어하기 위한 각종 전략을 짜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기재부는 세수 부족을 이유로 반도체 시설 투자 세액 공제율 인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국 대기업 기준 기존 6%에서 최대 20%까지 할 수 있도록 한 공제율 원안은 국회 논의과정에서 8%로 축소됐다.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 취임 직후 반도체 초강대국을 선언하며 여러 지원책을 약속했고 여러차례 공개발언도 했다. 하지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기재부는 세수부족이라는 논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세금 수입을 우선으로 여기는 기재부의 사고방식이 더 깊숙하게 작용했다. 야당도 무심한 태도에 동조했다. 결국 8% 공제로 법안이 통과되고 여러 언론에서 문제점이 지적됐는데, 처음에 기재부는 투자증가분에 대한 추가 세액공제와 반도체 R&D투자도 세액공제가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기존 지원이 이미 충분하다는 주장인데, 정작 이후 윤 대통령은 “반도체 등 국가 전략 산업에 대한 세제 지원을 추가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달라”며 “(국민의힘) 반도체특위에서 제안한 세제 지원안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세제안 통과는 정부가 거부하면 이뤄질 수 없고, 그 정부 승인의 최종 키를 쥔 것이 바로 윤 대통령이다. 


그러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법인세 체계 개편은 아니더라도 국내외 경기 상황과 세수 흐름을 보면서 투자 부담을 줄이고 바로 투자를 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보겠다”며 인센티브 확대 의사를 보였다. 기재부는 이번 주 내에 추가 지원책을 발표한다. 국회와 대통령실, 기획재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467년 전 조선 조정에 있었다면, 그들이 이준경과 마주했더라면 판옥선 건조에 대해, 총통 주조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의견을 냈을까. 문득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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