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회사 예산이 내 월급이 아니건만...

머릿속에서 쓸떼없이 새마을 운동가가 울려퍼질때

by 다소니

회사 조직도 상 케이티가 내 보스였지만 그녀는 나를 그냥 방치했고 아프다며 회사에 잘 오지도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거의 그녀의 상관인 나일즈와 직접적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나일즈는 언제나 시원시원한 편이었지만, 업무에 관해서만큼은 세상 쪼잔한 남자여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그는 흑인 중에서도 피부가 상당히 검은 편이라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는데 가끔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가득 찬 숫자들을 들여다보며 깊은 인상을 쓰거나, 계산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이거 누가 제출한 거야?"라고 목소리를 깔아 물어볼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당사자가 아닌 한, 다들 그다음에 떨어질 천둥 번개를 피해 슬금슬금 조용히 자리를 떴다. HR에 걸릴까 봐 아무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화염을 내뿜으며 도쿄 시내를 잿더미로 만드는 고질라나 크라이슬러 빌딩에 매달려 전투기를 주먹으로 때려 부수는 킹콩을 연상시키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Don't tell HR but..." (HR한테 이르지 마...)로 시작하는 농담을 입에 달고 살았고, 유쾌하게 웃을 때 드러나는 벌어진 앞니는 사람을 한없이 편안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나는 시시때때로 그가 내 상관의 상관이라는 걸 잊고 동료 내지는 심지어 부하직원처럼 취급할 때가 있었지만 그는 나를 딸처럼, 여동생처럼 챙기고 보호했다. 그는 나뿐 아니라 그의 부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대했고 아, 우리는 얼마나 그를 사랑했던가.


하지만 그는 승진에 실패했고, 나를 매니저로 승진시키는 것도 실패했다.

그런데, 그 원흉이었던 라이언이 나일즈가 떠난 지 육개월이 넘게 지난 지금 나를 승진시키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라이언의 사무실을 나와, 하는 수 없이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잡 포스팅을 열었다.

잡 디스크립션은 애초에 나일즈가 기본을 잡고 내가 직접 쓴 거라 굳이 다시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젠장.

잡 어플리케이션 자체의 질문지가 열 장이 넘는다. 내부 지원자인데, 왜 인적 사항을 다시 입력해야 하고, 학력과 경력을 새로 써야 하며, 회사 미션중 어느 게 가장 중요하게 와 닿는냐 등등 쓸데없는 질문들까지 다시 답해야 하는 거냐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HR 디렉터인 아일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웹페이지를 넘겨가며, "이렇게 비효율적인 프로세스를 내부 지원자가 감내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 라고 5분 동안 열변을 토했다.


아일린은 조용히 듣고 있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Don’t you remember? You cut our budget request for the new ADP system upgrade last month? Your exact words were..., (기억 안 나? 네가 지난달 시스템 업그레이드 해달라고 내가 예산 요청한 거 잘랐잖아. 정확하게 뭐랬더라..." 아일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었다. "It didn’t sound like a ‘Must-Have’?” (꼭 "필수"인 거 같지는 않다고?)


…아, 맞다. 그랬지.

나일즈가 떠나고 며칠 안 돼서 라이언은 아일린과의 미팅에 나를 나일즈 대신 불렀다. 아일린이 자기가 원하는 버짓 아이템을 설명했고 라이언은 나를 보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나일즈에게 하던 대로 내가 작성한 컴퍼니 전체 파일을 꺼냈고 이러저러해서 새로운 버짓 아이템은 몇 개만 더하는 게 가능하고 그것도 내가 생각하는 필요 없는 항목을 쳐내야 가능하다고 했다. 그 새로운 버짓 아이템 중 ADP system upgrade는 꼭 필요한 것 같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 당연히 아일린은 표정이 좋지 않았고 나는 이런 식으로 내 승진에 꼭 필요한 HR 디렉터 서포트를 걷어차 버린 나 자신이 한심해서 쓴웃음이 났다. 나일즈가 있었더라면 내 방패가 되어주었을 텐데 한낮 애널리스트한테 이런 말을 하게 하는 라이언의 의도가 뭔지 의심스러웠다.


나일즈빼고 회사 전체 예산을 제대로 꿰고 있는 사람은 사실 나뿐이었다. 처음 이 일을 맡았을 때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지만, 그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회사 예산을 짜고 살림을 챙기는 일은 내 적성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집에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페니까지 세어 가며 매일 가계부를 쓰고 계획대로 돈관리했던 것처럼, 회사에서도 나는 모든 비용 항목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너무 사소해서 들여다보지도 않을 비용까지 다시 정리하고 가지를 쳐냈다. 그리고 어느 부서에서 예산을 넘기거나 예상보다 수입이 덜 들어오면, 즉시 해결책을 찾아 조정했다. 매달 결산할 때 내가 세운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오차율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회의에서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을 볼 때마다 묘한 희열이 밀려왔다. 어쩌면 내 OCD는 그때가 최고조였을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라 나는 낭비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사람이었다. 회사의 몇백만 달러짜리 ERP 시스템이든, 브레이크룸에 굴러다니는 5센트짜리 종이컵이든, 내 눈에 쓸데없다 싶으면 바로 예산에서 가차 없이 잘라냈다. 어느 날 주니어 애널리스트인 룩이 커피가 너무 뜨거워서 종이컵 두개를 겹쳐 썼다가 내가 쳐다보는걸 보고 식겁해서 여분의 컵도 나중에 쓸거라고 눈물이 글썽해져서 나한테 변명을 했다는 반만 맞는 전설이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내가 전생에 미국 대공황 시대에 살다 왔던게 틀림없다고 농담을 했다.


나도 이렇게 아낀 회사 돈이 내 월급으로 돌아오는것도 아닌데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70년대 한국에서 가난한 교사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라, 화장실 휴지 대신 다 쓴 시험지를 쓰며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님은 미친 듯이 성장한 한국 경제 덕분에 이제 화장지 정도가 아니라, 화장실마다 따뜻하게 데워진 변기 시트와 비데가 달린 일제 양변기가 있는 강남 아파트에 입성하셨다. 그즈음 미국으로 유학을 온 나만 아직도 새마을 운동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정상적인 정신상태일리가 없다.


나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무래도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지난번 보험회사랑 회사 베네핏 협상할 때, 떼라피 옵션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내년에는 돈을 더 주더라도 꼭 추가하자고 해야겠다.

나는 ‘떼라피 옵션’이라고 플래너에 적어 놓고, 참을 인(忍) 자를 마음속에 새기며 잡 어플리케이션을 채워 나갔다.


한 시간 뒤, 나는 Submit 버튼을 노려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나일즈가 있었으면, 잡 어플리케이션을 리뷰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뭘 썼든 승진 당락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강박적으로 고칠 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일즈라면 "이제 그만!" 하고 곰 발바닥 같은 손을 내저으며 내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을 거였다.


나일즈…

나는 눈물을 삼키며, Submit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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