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믿다간 큰코? 아니, 내 인생 다친다!
'지식만으로는 위험하다'는 문장은 나의 논문에, 그리고 여러 컬럼에서 외쳤던 것입니다.
전 세계 80억 인구보다 아는 것이 많든지 구글보다 더 방대하고 빠른 두뇌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이제는 지식의 양이 나의 인생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 것은 정말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식믿다간 큰 코! 아닌, 내 인생 다칩니다!
시대 한탄을 하고자 이 화두를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시류를 읽고 제대로 된 지식으로 날 전진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지식'이 무엇인지부터 이론적으로 알고 넘어가봅시다.
아래 그림은 Liew(2013)가 발표한 논문이며 '지혜'를 연구하는 나 역시 논문에서 자주 인용하는 정의입니다.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자료'에 불과하던 것이 어떤 분석과 처리과정을 통해 '정보'로 정리되고
이 '정보'가 나의 사고체계 안에서 연결되면서
비로소 이름붙여진 것이 '지식'이지요.
Liew(2013), DIKIW
자, 그렇다면.
내가 지금 알고 있는, 내 머리속에 믿고 있는, 내 입으로 주장하는 그것이 자료인가요? 정보인가요? 지식인가요?
하수는 자료를 지식으로 믿고 떠벌릴 것이고
중수는 정보를 지식으로 이해해 따라할 것이고
고수는 내 사고체계에서 지식으로 구축시켜 이성을 강화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들이 수많은 이론, 나아가 학문이지요.
감히 말하건데 자료인지 정보인지 지식인지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며
더 감히 말하건데 이 구분못하는 이들을 믿고 따르는 이도 무진장 수라는 것이지요.
적어도 나는 아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의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도 자료를 분석하고 정보를 해독하는 진통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 하나하나의 지식의 양으로 세상에 승부수를 던지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먼 길이고 어렵고 솔직히, 넘사벽이었습니다.
박사까지 했지만 그것은 내 연구분야에 국한된 것이므로
'삶'에 대한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조족지혈'이었지요.
지식의 양이 많은 사람도 잘 사는 것과 간극이 벌어지는 지금의 시대,
지식만 믿고 살다가 내 인생이 위험해졌다는,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반증은 날 불편하게 하고 심지어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하버드의 '제프리 페퍼'박사가 언급한 'knowing-doing gap'.
'아는 것'과 '하는 것'의 갭을 찾아 '사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나는, 우리는 무엇으로 이 갭을 메꿔야 한단 말인가요?
갭(GAP) 메우기
'지식만으로는 위험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구구절절 이 지면에 언급하는 것은
독자를 무시하는 처사인 듯 합니다만
'청년실업', 'N잡러'라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단어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지식만 믿지 말고!!', 더 솔직히 말하면 '공부만 하지 말고!'를 알게 됐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지식말고 무엇이 우리를 전진케 할까요?
(이 길고도 깊은 담론을 구구절절 언급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이 질문에 내가 답하는 것이 과연 '자격!'이 있나 싶지만
'자격운운'하는 지면이 아닌 것에 빌붙어 한마디하자면,
'지식말고 지혜.' 라고 말하려 합니다!
위의 그림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지식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가 말한 '정신의 질서',
즉. 사고체계가 갖춰진 '인지'로 승격되고
그것에 행동!, 보편적인 진리,
그리고 어떤 강조를 하더라도 모자란 '나의 내면의 소리',
그것도 '바람직한 정의로운 목소리'에 답을 하는 지.독.한. 과정을 통해 지혜로 체화됩니다.
아니, 가만가만.
터득할 순 없지만 터득하고자 하는 그 노력으로 갭은 메꿀 수 있습니다.
워렌버핏은 '캔디처럼 지식을 병(또는 책) 속에 넣고 팔고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한 지식이어야 한다.'라고 했으며
애덤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명상적인 철학자의 가장 숭고한 사색도 가장 하찮은 맡겨진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보상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행동을 통한 경험. 만이 답입니다.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은
내 머리 속에 수시로 주입된 파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다시 그 연결된 지식조합덩어리에 살을 붙이고 근육을 만들고 에너지를 뿜어내게 합니다.
뼈와 살만으로는 사람이라 할 수 없지요.
그 살에 막힘없이 피가 흐르고 심장이 요동치고 요동의 강도만큼 내 두 다리를 움직여야 사람인 겁니다.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머리는 그저 인간의 형체를 위해 목위에 붙어있는 부속품일 뿐이지요.
머리와 가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리가 우리에게 지혜를 갖게 합니다.
다리가 저리고 아프고 골절이 되더라도 다리가 우리를 전진하게 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머리에서 다리까지 가는 길이 지구 몇바퀴'라는 흔한 말처럼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이 먼 길을 지.독.하.게.
그리고 반.복.해.서.
또 치.열.하.게 움직이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우주의 진리(윗그림 참조)를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니 믿어도 되겠지요.
보편적인 진리에 '나'라는 사람이 제외되거나 외면될 리는 결코 없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그 어느 누구도 필요없는 존재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나는 우주의 조화를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지식을 사는 것과 연결시키는,
즉, 앎을 삶으로 연결시키는 가장 핵심은 바로 '행동'입니다. '실천'입니다!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진 이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내 근육이야말로 주사로 주입된 근육과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근육이지요!!!!
'월든'의 데이빗소로우는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제발 '진.지.하.게. 살.아.보.라.'고!
지식을 얻는 4가지 방법
참고로, 발타자르그라시안이 내게 알려준 '지식을 얻는 4가지 방법'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번역을 '지식'이라고 했지만 발타자르그라시안은 '지혜의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초월된 지식, 즉 지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오래 사는 것입니다.
나이는 나에게 실체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시간의 힘이니까요.
둘째,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입니다.
음.. 집나가는 걸 싫어하는 나이지만 이 여행은 관광과는 다른 의미겠지요.
내 오감을 자극할 것들을 만남으로써 나의 육감, 칠감을 들춰내는 것.
이것이 어쩌면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보내며 삶의 지식을 얻는 길이겠지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보내면 다른 차원을 경험하게 되니까요.
셋째, 열심이 독서하는 것입니다.
책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행간을 읽는 것이죠.
책의 내용이 어느 순간 활자를 너머 영롱한 실루엣으로 내게 다가올 때,
그 느낌을 아는 자라면 왜 지식의 깊이를 더하는 데 책이 소중한지를 알 것입니다.
넷째. 지혜로운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오래 함께 했다고, 가까운 곳에 산다고 다 친구는 아니지요.
나의 공감과 가치관과 이상에 대해 신랄하면서도 뒷감당하지 않도록 토론할 수 있는 이.
이런 이를 벗으로 내 곁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그런 이여야 하구요.
지식은 불순물이 된다는 사실!
우리는 '항상 깨어있으라' 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깨어 있으려면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깨닫다. 영어로 realize!
이 단어를 살펴보면, 'real'의 형용사죠. 즉, '현실적'인 것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실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진짜 깨어난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입니다.
여기서 18세기 학문적 거인(巨人)이자 불가사의한 인물이자 칸트와 에머슨의 추앙을 받은 '스웨덴보그'의 말을 잠깐 짚고 넘어갈까요? 그는 그의 책 '사자의 서'에서 '학자의 지식과 같은 것이란 영계에서는 전부 '불순물(不純物)'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우리가 지금 찾으려, 쌓으려, 익히려 하는 지식은
실제 오늘을 사는데 유용한 것들이어야 가치있으며
그 앎이 내 삶에 실질적인 도움으로 연결되어야만 지식도, 나의 삶도 진화될 것이며
이를 운용하는 주체인 나 역시 깨어있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