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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03. 2022

부의 구조 : 애덤스미스

부는 거대한 건축물

우리를 짓뭉개려고 늘 준비중인 녀석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국부론을 저술하기 십수년전 (도덕감정론은 36세, 국부론은 53세) 출간한 도덕감정론은 책 좀 읽었다는 이들에게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간의 도덕체계를 기술한 인간본성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가치체계들의 본질을 깨우치려 한없이 긴장한채 한장한장 힘겹게 모르는 나의 한계에 부지기수로 부딪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는 '부(富)'와 '권세(權勢)'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 지극정성으로 신신당부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를 짓뭉개버릴 녀석이라며.

부와 권세는 육체에 약간의 소소한 편리함을 가져다주기 위해 고안된
거대하고 힘에 겨운 기구들로 보이게 된다.
그 기구들은 가장 섬세하고 미묘한 용수철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의 모든 조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든지 산산이 부셔져서
자신들의 불행한 소유자를
짓뭉개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의 속성이 화장실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다른 것은 진리인 듯하다.

두 손 비비며 돈을 빌릴 때랑 갚아야 할 때의 태도도 다르다.

오히려 빌려준 사람이 아쉬운 소리를 하며 눈치를 봐야 하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수소문을 해서 빚을 갚'

당연히 해야 할 도리가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될까?

은혜를 입었으면, 도움을 받았으면

보답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덕목에는 이면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양극론(兩極論)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이해를 돕고자 한다.

세상 모든 피조물은 대립극을 지닌다.

해와 달, 낮과 밤, 하늘과 땅, 선과 악, 이성과 감성,

아래와 위, 안과 밖, 앞과 뒤, 현상과 이면, 긍정과 부정, 수직과 수평 등 세상을 규정하는 거시적인 개념들로부터

나 개인에게 미치는 미시적인 개념까지

모든 개념은 상반된 이면이 존재한다.


뉴턴이 ‘자연스러운 투과와 반사의 조화’라고 표현한

이러한 양극성(兩極性)은 곧 자연의 법칙이다.

이러한 철학은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에 의해

다양한 원리로 소개되고 있는데


특히 소크라테스는 대립된 개념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중용으로 이러한 원리를 설파하였다.

이는 B.C.399년 사형을 앞둔 그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나눈 삶의 쾌락과 죽음의 고통에 대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쾌락이란 참 이상야릇한 거야.

고통이라고 하면 그 반대 것으로 생각되는데 둘의 관계도 묘하단 말이야. 이 두 가지는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법은 없으면서도,

그 중 하나를 추구하여 얻으면 대체로

반드시 다른 하나도 얻게 마련이야(대화편, 2008).” 


또한, 랄프왈도에머슨은 사회 전체, 자연계와 기계력 모두에서 양극성의 원리를 설명하며

이를 ’보상의 법칙‘으로 개념화하였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다른 한 편에서 하나를 얻으면 그만큼 빨리 무언가가 퇴보한다. (중략) 무언가를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양극성, 곧 작용과 반작용은 우리가 항상 접하는 자연계 곳곳에 있다. 어둠과 빛에서, 차가움과 뜨거움에서, 바닷물의 미세기에서, 남성과 여성에서, 동식물의 들숨과 날숨에서, (중략) 바늘 한 끝에 자기(磁氣)를 가하여 보라. 반드시 상반되는 자기가 반대편 끝에서 일어난다. 만일 남쪽이 끌면 북쪽이 반발한다. 이 쪽을 텅 비게 하자면 저쪽을 응축시켜야 한다. (중략) 하나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절반이고, 그 절반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절반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중략) 생물학자의 관찰에 따르면, 동물계에서는 어떠한 생물도 특별히 후하게 하늘의 혜택을 받는 것이 없고, 일종의 보상이 저마다의 장점과 단점이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양극론은 올더스헉슬리는 '영원의 철학'에서,

뤼디거달케는 '운명의 법칙'에서,

공자는 '논어'에서,

그 외 수많은 사상가와 철학가들이 하나의 이치로서

우리에게 일러주고자 하는 인간삶의 핵심가치이다.  


이러한 이치에 의해

무언가를 받았으면 미리 내주었거나

나중에 내주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부와 권세는 거대한 건축물과 같다

부와 권세 역시 얻은 것이니 이에 대한 댓가를 치렀거나 나중에 치러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인간의 허영과 탐욕은 '손해'에 민감하여

내 것이 아닌데도 내게로 오면 내 것으로 착각하고

이것을 내주는 것을 꺼려하거나 미루거나 회피하거나 거짓으로라도 손에 쥐려 한다.

부와 권세는 거대한 건조물(建造物)과 같다.
그것을 건축하려면 평생 동안의 노동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매순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파묻어 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것들이 무너지지 않고 서있는 동안에는 거주자(居住者)들에게 몇몇 사소한 불편들을 덜어줄지도 모르지만 계절의 모진 혹독함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여름의 소나기는 막아줄 수 있지만
겨울의 폭풍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거주자를 항상 이전과 똑같이,
때로는 이전보다 더욱,
많은 불안과 두려움과 비애에,
그리고 질병과 위험과 사망에 노출되도록 내버려둔다.


무언가를 건설할 때 기초를 제대로 다지지 않으면 무너진다.

건설할 자격이 없는 자가 손을 댈 때는 처음의 화려함은 잠시, 그 최후는 더 처참하다.

부도 마찬가지다.


얻을 자격을 갖추지 않은 채 내게로 온 부의 최후는 비참하고 굴욕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를 원한다면 먼저 '격'을 논해야만 한다.

얻을 댓가를 치르지 않고 얻은 부는 사소한 불편을 덜어줄지언정 한치의 양보없이 원리대로 흐르는 자연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댓가를 치르고 얻은 부여야만 부의 수명에 기대를 걸 수 있다.


적어도 '부'에 있어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되고 영속되는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원할 때엔 더더욱 그렇다.




나는 부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점검하고 따져봐야 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품격과 정신의 질서다.


'나는 과연 이 부를 얻을 자격이 있는가?'

'왜 이러한 혜택이 나에게로 온 것이지?'

'나는 과연 이 혜택을 권리로 받아도 될 댓가를 치렀는가?'

라고 스스로에 자진해서 물어야만 한다.


응당하게 치른 댓가로 얻은 부라면 내가 그 주인이니 맘껏 누려도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아무리 곳간에 꽁꽁 숨겨둔들 이상야릇한, 예상치도 못한, 느닷없는, 희한한, 뜬금없는, 기타 어떤 경우로라도 내 인생에 개입된 그 실체로 인해 곳간은 텅텅 비게 된다.


이것이 '부의 원리'이며 '자연의 이치'다.


- 애덤스미스, 도덕감정론, 2009, 비봉출판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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