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호주로 워킹을 떠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어느덧 시드니에서 8년 차 생활에 접어들고 있다. 작년에 친구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서울 시청역에서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마다 설레고 떨렸다.
마치 소개팅하러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 친구들 고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에 만나서 같이 미대입시를 했다. 학원이 끝나고 헤어지는 역 앞에서 매운 떡볶이를 사 먹고 공부가 안되고 그림이 안 되는 날 함께 목표하던 대학 교정을 거닐며 우리 여기 같이 오자며 응원했다.
결과적으론 다른 대학을 가게 되었지만 종종 만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뭘 할 것인가! 에 대한 얘기를 20대 초에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관심 있는 것에 관심 있는 관심사가 같은 친구의 소중함을 삼십 대 막바지에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정말 한 없이 걸었다.
생각해 보니 우린 이건 달랐다.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와 걷는 걸 좋아하는 친구
어쨌든 친구와의 만남이 있고 나는 그 친구가 시드니로 돌아가기 전에 또 한 번 만났다. 역시 우리가 좋아하는 걸 하고, 나의 고민을 말하면 친구는 들어주고 답해주고 친구의 고민을 듣고 또 답하고 이런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존재가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갑자기 친구가 지내는 그 시드니란 도시가 궁금했다.
내 여행 버킷리스트에는 한 번도 업데이트되지 못했던 도시지만 내 친구가 살고 있는 내 친구의 쉼터이자 삶의 터전이라니 갑자기 너무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는 달력을 보고 11개월 뒤로 항공권을 결제했다.
그 사이는 나는 이사를 했고, 직장인에서 무직이 되었다. 무직이 주는 압박은 정말 어마무시했다.
이미 결제해서 완납한 시드니 항공권을 취소하면 100만 원이 생긴다는 유혹은 마치 가득 찬 돼지 저금통을 끓어앉고 있는 것 같았다.
취소해? 말아? 고민만 하고 결정을 못 하던 그 사이에
어느 순간 비행기에 타야 하는 그날이 왔다.
비행기를 타러 서울로 이동하면서도,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면서도 공항에 가서 수화물을 보내고 출국장으로 이동하면서도 아니 비행기를 타서도 마치 비행기는 하늘을 한번 슝 돌고 나를 다시 인천공항에 내려줄 것 같았다.
밥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잠자다 눈 떠보니 나는 시드니에 있었다.
얼레벌레 나와 입국 심사를 하는데, 갑자기 내 앞에 공항 탐지견이 앉았다. 내 기내용 가방에 발을 탁 올렸다.
그러다 공항 관계자는 내 캐리어가 담긴 카트를 끌어주며 나를 커다란 책상 앞으로 안내했고 나는 거기서 가방을 탈탈 털렸다.
문제는 기내에서 먹은 바나나 껍질의 조각, 꼬깔콘의 조각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의 손수건이었다.
나름의 해프닝을 경험하고 입국심사를 통과 후 나오니
이미 한국사람들은 다 빠지고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갑자기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서 잠깐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나 여행 왔지! 나 지금 시드니지?
나는 지금 38살의 백수가 아닌 시드니 여행 온 여행객일 뿐이다. 잊자! 잊고 그동안의 나를 정리해 보자. 그럼 한국 갈 때 답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