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월의 시간이 있었지만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여행이었다. 11개월 간 내가 짠 계획은 저녁을 친구랑 먹는다는 것 본다이비치를 간다. 링컨스락에 간다. 잔디밭에서 책을 읽는다가 끝이었다.
구글맵을 켜고 예약 한 숙소에 도착했다.
서울에서도 길을 잃는 나는 시드니 타운홀을 17킬로의 캐리어와 빵빵한 가방을 옆으로 메고 쪼리를 신은 채로 40분을 헤맸다.
간신히 도착 한 숙소에 짐을 풀고, 시드니를 즐길 채비를 했다.
네이버 블로그에 시드니 여행을 검색하고 어디 갈지를 정하다 시드니 현대 미술관에 구경 가기로 했다.
미술관을 구경하고 4층 카페 뷰가 예쁘다고 해서 여기서 아보카도 샌드위치와 플랫화이트를 먹어야지! 결심했다. 하지만 카페는 이미 9월에 클로징 되었으며 1층 카페를 이용하라고 했다.
순간 웃음이 났다. 여기까지 와서 준비가 하나도 안되어 있는 내 모습이 웃겼다.
1층 카페는 가기도 싫었다. 같은 카페인데도 오페라 하우스 뷰가 없다는 이유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 “나는 p야! 대문자 P”라고 떠들며 준비가 안된 내 모습에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여행이고 뭐고 지금 당장 어디로든 문을 꺼내 집으로 가고 싶었다.
집에 가서 암막커튼을 치고 내 침대에 누워서 그냥 무작정 누군가 깨울 때까지, 배가 고플 때까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까지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나는 이미 시드니고, 어디든 걸어야 했다.
그래서 무작정 걸었다. 그냥 계속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 걸었다. 발이 아파서 중간에 벤치에 앉아 멍 때리며 인스타를 보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올릴 스토리에 하트를 날리다가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고작 하는 게 인스타 좋아요 누르기라니
그 무엇도 준비가 안된 나는 첫날 12킬로를 걸었고,
양쪽 발에 큰 물집이 잡혔다. 여행 내내 나는 이 물집으로 고생을 했다.
잠들기 전 찬물에 발을 씻으며 생각했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은 기회를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구나.
친구가 퇴근하고 서큘러키에서 만났다. 우리가 만난 이 공간이 시드니라니! 너무 신기했다. 정말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며 삼십후반에 너는 시드니에 있고,
나는 시골에서 살거라 누가 생각했겠냐며!
그때를 회상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했다.
타국에서 홀로 선 친구가 대단했다. 정말 대단하다고 너무 멋있다고 계속 말했다. 친구를 향한 칭찬 안에는 나에게 하는 채찍질도 있었다.
제발 겁먹지 말자. 시작 전에 너무 멀리 보지 말자.
여행이 끝나면 어떻게 할지 결정하자!
뭐 해 먹고살지? 나의 마흔을 백지로 시작하지 말자.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과정을 정말 많이 물어보는 사람이다. 이거 어떻게 하셨어요? 어떻게 했어? 그건 어떻게 했어? 언제 했어?
시드니에서 친구에게도 공부하면서 일은 언제 했어? 어떻게 투잡까지 했어? 어떻게, 언제, 어떻게, 언제의 물음표가 계속 떴다.
친구는 덤덤하게 말했다. 해야 했으니까.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해야 했어. 그래서 했어
정답이다. 알고 있는데 나는 그게 참 어렵다.
숙소에서 워킹홀리데이(이하 워킹)를 온 푸릇푸릇한 어린 친구들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나랑 같은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에 도착 한 친구들이었다.
한국에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시드니에 왔는데, 워킹 온 사람들 중 나이가 많은 편이라서 위축이 된다고 했다.
나도 지금 그랬다. 38살에 하는 진로 고민이라니…?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연필을 잡는 순간부터 그림을 그렸다. 당연히 어릴 적 꿈은 늘 화가부터 시작해서 그림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종종 꿈이 바뀌긴 했지만 미술이라는 큰 틀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누가 장래희망이 뭐니? 넌 커서 뭐 할 거니?라고 물으면 0.1초 만에 대답할 수 있었다.
지금은 누가 어떤 일 하세요? 어떤 일 하셨어요? 하면 할 말이 없다.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나는 뭘 해야 하지?로 시작 된 물음표는 어느덧 나는 뭐지? 나는 뭘까?로 끝이 나곤 했다.
항상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만 있는 사람이다. 유행하는 모닝루틴, 갓생 살기는 다 따라 해 봤다.
멋진 삶을 살고 싶고, 그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HOW TO가 궁금했다.
정확하게 ‘어떻게’ 했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시작이 어려워졌다. 나이를 먹으며 늘어난 건 두려움인 것 같다.
시드니 이튿날 나는 점심을 먹고 여행 스냅을 찍었다.
스냅을 찍는 동안 작가님이 여러 포즈를 요구하셨다.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잡는 건 언제나 어색하고 민망하지만 지나가면 추억이니까 인천에 도착하는 순간 또 내 삶을 살아야 하니 멋지게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누가 잡아준 포즈로만 기록하는 사진이전부는 아닌데, 눈 감은 사진의 나도 나고, 활짝 웃어서 금니가 반짝이는 사진의 나도 나고 턱살과 뱃살을 감추지 못한 모습도 난데..?
실패보단 기록을 하고 싶어졌다. 내가 잘할 때까지 기록해 보자. 언젠가 잘하겠지
죽기 전엔 잘하겠지!!!!
갑자기 시드니 여행이 즐거워졌다. 여행이 끝나도 어떻게 가야 할지 방향이 정해졌기 때문에.
당장 핸드폰을 켜고 메모어플에 적어 내려갔다.
내가 그렇게 찾던 HOW TO의 정답을 드디어 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