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다시 읽기

나는 왜 아직 홍콩영화를 놓지 못하는가

by ophelisbt
초등학교 시절, 영화 엽서를 사서 스크랩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의미심장한 포스터 이미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내용이 뭘까, 유추해보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뛰놀던 학교 운동장은 분명 한 바퀴를 내달리기에도 벅찰 만큼 넓은 곳이었다. 하지만 몸집이 더 자라지 않을 만큼 커진 뒤 찾아간 초등학교 운동장은, 분명 같은 공간이란 것이 믿기 힘들 만큼 작게 '축소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에 본 영화를 십수 년 만에 다시 보게 됐을 때도 꼭 그런 기분이 든다. 책도 나이나 상황에 따라 이해와 감정의 폭이 달라진다는데, 영화 역시 그런 모양이다.


<중경삼림>을 4학년 아니면 5학년 무렵에 봤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처럼 영화 리뷰가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스스로 ‘영화 일기’를 썼다. 고급스러운 가죽은 아니지만 앞뒤로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딱딱한 표지에 자물쇠까지 달린 양장본 노트에 말이다. 그 시절엔 그런 디자인의 일기장들이 제법 많았다.




동작의 흔들림을 과감하게 살린 촬영 장면들. 실사보다 더 강하게 쫓고 쫓기는 순간의 긴박함과,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을 살려낸다.



그리고 <중경삼림>에 대해서는, 아마 그리 길게 칸을 채우지 못했던 걸로 기억난다. 하긴 만 10살짜리가 이 영화를 이해하려고 했던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오만방자(?)했던 나는, 기승전결이 또렷하지 않고 난해함 자체인 이 영화에 대해 일기장에 ‘두서없이 겉멋만 잔뜩 든 영화'라며 투덜거림을 남겼다. 이해하지 못하느니 그냥 좀 이상한 영화라고 치부해버린 채, 희미한 이해도와 함께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경삼림>에 대한 반향은 엄청났다. 나 역시 영화는 재미없다면서도 '원석' 그대로인 금성무에 완전히 매료되어 엽서, 노트 등 영화 이미지가 들어간 굿즈들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았던 걸 보면, 그냥 본능적으로 끌렸던 영화였던 건 분명하다.


그렇게 강산이 세 번쯤 지난 뒤 다시 본 <중경삼림>은, 어린 시절 너무 지루하고 산만하고 의문투성이의 장면들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미안해질 만큼, 한 장면 한 장면 모든 순간이 치밀한 공을 들인 포트폴리오같았다. 현기증이 날 만큼 과도하게 흔들리는 촬영 장면들, 특유의 푸르스름하고 노란 색채, 카메라를 잘못 놓은 듯 비틀어진 화면의 각도. 이제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연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1994년으로 돌아간 나의 눈에는 <중경삼림> 속 왕가위의 모험이 새삼 너무도 새롭게 느껴졌다.


한 시대의 문법을 슬쩍 비틀어 전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낡지 않는다. 이전에 없던 결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더 오래 살아남는 건지 모른다. <중경삼림>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새롭다.






'어른의 시선'으로 다시 마주한 영화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인물들의 날것 같은 얼굴이다.


노란 가발과 레인코트의 임청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대체 불가한 캐릭터를 완성한다. 하얀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 단단한 턱선이 그 과장된 스타일을 오히려 설득력 있게 만든다. 돈을 세는 장면이나 지시를 내릴 때 더욱 도드라지는 핏빛 립스틱과는 반대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듯한 서늘함은 자신을 배신한 이에게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눈다.


그러면서도 인질로 잡아둔 배신자의 딸을 한 시간 만에 풀어주거나, 하룻밤을 '보낸' 낯선 경찰 223의 생일에 삐삐 메시지를 보내는 온정의 간극은 그녀를 더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느껴지게 만든다.



과장된 머리색, 빨간 테 선글라스, 선명한 립스틱, 구김 많은 코트와 구두까지 하나하나 강한데도 이상하게 촌스럽지 않다.



오랜만에 마주한 금성무의 '옛 얼굴'은 놀랍도록 담백하다. 훗날 그가 왜 쌍꺼풀 수술을 시도했는지 묻고 싶을 만큼 퓨어한 홑쌍꺼풀을 갖고 있었다.


영화 속 그는 이별의 아픔을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로 꾸역꾸역 삼켜낸다. 미련할 만큼 어설프고 무모할 만큼 순수한 청춘의 맹목성이 그의 맑은 눈매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사랑에 빠지는 방식은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을 만큼 엉뚱하지만 말이다.




양조위를 연기파 배우로만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중경삼림〉에서 그의 젊은 얼굴이 주는 힘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홍콩금상장과 금마장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양조위에 대해서는 긴말이 필요 없다. 실연의 후유증으로 바싹 마른 비누와 젖은 걸레에게 오래된 친구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장면조차, 그의 눈빛을 통과하면 '멋있게 미친' 순애보가 된다.


사설을 풀자면, 열네 살 겨울, 혜화역 근처 어느 건물 지하에서 영화 <해피투게더> 홍보차 내한한 그의 실물을 본 적이 있다. 사인회 내내 긴 줄을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기다렸지만, 막상 내 순서가 되어 양조위 앞에 서자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나는 눈 한번 마주치지 못했고 입도 열지 못했다(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오징어가 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경험했다). 사인을 하는 그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음을 느꼈지만 나는 죽은 듯 그의 손만을 주시했다.


사슴 눈이다, 맑다, 우수에 찼다, 그런 말들로는 수식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냥 ‘심장이 멎을 뻔하게 생겼다’고 말하는 편이 가장 정확한 것 같다. 그런 얼굴로 모든 것이 뭉툭하고 둔감한 경찰관을 연기하니, 누군가의 짝사랑이 한층 더 애틋해질 수밖에.




겉으로는 임청하의 극단성과 왕페이의 산만함이 더 튀어보이지만, 이 영화의 엇나간 리듬과 묘한 기운을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은 양조위와 금성무 두 사람이다.



왕페이는 겉으로 보면 가장 부산스럽고 비현실적인 인물인데, 이상하게도 네 사람 가운데 가장 납득이 간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사람인지도 모른다. <중경삼림>을 다시 보며 두 곡의 팝송이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남은 것도 결국 왕페이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의 집에 몰래 들어가 먼지를 닦고, 돋보기로 침대 위를 샅샅이 훑다가 분명 그의 것이 아닌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대성통곡을 한다. 손때 묻은 비행기를 날리며 혼자 놀고, 다 닳아 얇아진 비누를 통통한 새 비누로 바꾸고, 사람만 한 인형까지 통째로 갈아치운다. 그가 자주 먹는 통조림의 포장지에 새 종이를 덧대 집안 전체를 조금씩 바꿔놓을 만큼 대담한데도, 경찰 633은 끝내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쯤 되면 페이는 엉뚱한 여자가 아니라, 들키고 싶으면서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자기 마음이 상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정면으로 들켜버리는 순간만은 두려운 사람. 그 어정쩡한 마음이 너무 생생해서 웃기다가도 갑자기 울컥하게 된다.


외간 남자의 집에 우렁각시처럼 드나드는 행동만 떼어놓고 보면 분명 황당하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다(지금 시대에서는 단순 불쾌가 아닌 법적 조치에 들어갈 만한 일이지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그런 황당함을 짝사랑의 서툼과 애틋함으로 바꿔놓는다.




〈몽중인〉을 들으면, 왕페이라는 사람이 훨씬 더 깊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중경삼림〉은 내가 왕페이를 처음 제대로 기억하게 된 영화였고, 그녀 음반을 처음 사게 만든 작품이다.




아마 그건 페이의 마음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현실적이어서'일 것이다. 경험의 모양은 다르지만,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끝까지 숨고 싶어하는 그 이중적인 마음만큼은 내 지난 청춘의 어떤 순간들과도 닮아 있다. 그래서 페이의 웃음과 눈물은 과장된 몸짓으로 흘러가다가도 어느 순간 불쑥 현실의 감정처럼 와 닿는다.


그러고 보면 약간 원망스럽기까지 한 경찰 633의 둔함도 마냥 둔해서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그건 무심함이라기보다 방어에 가깝다. 헤어진 여자가 남긴 편지건, 자신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남긴 편지건 제대로 펼쳐보지도 않고 밀어내는 그의 태도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낯설지 않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서 지나치게 수비적인 사람,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차라리 못 본 척하는 사람. 경찰 633은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을 지키는 인물처럼 보인다.




완성본 기준으로 금성무와 왕페이가 직접 스쳐 지나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 첫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가 맞닿는 짧은 교차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해온 분위기 그대로, 허깨비처럼 끝이 난다.

방학마다 만화책과 비디오 영화를 붙들고 밥도 잊은 채 밤을 새우던 어린 나에게 <중경삼림>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취향만큼은 정확히 건드리는 영화였다.


그 사이 내 삶에도 배우들의 얼굴에도 많은 시간이 쌓였는데, 이상하게도 <중경삼림>만은 그 시절의 공기 속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뭔가 영화보다는 오래전 꿨던 특이한 꿈처럼 기억이 된다. ‘California Dreaming’과 왕페이의 ‘몽중인’. 이 영화를 대표하는 두 곡이 모두 결국 꿈의 기척을 품고 있다는 사실도 우연 같지 않다.


<중경삼림>은 꼭 그런 영화다. 이튿날이면 사라질 것 같은 푸르스름한 새벽, 잠깐 몰아쳤다가 흔적만 남기고 지나가는 청춘의 감정 같은 것. 다시 봐도 그 시절의 달달함과 어설픔, 설명하기 힘든 쓸쓸함을 그대로 끌어올린다.



기다림에 지친 경찰 223이 삐삐를 쇠창살 위에 두고 돌아서는 순간의 비스듬한 앵글과 흐릿한 질감이, 그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묘하게 잘 표현해낸다.



너무 많이 복제되고 소비돼 지금 보면 오히려 퇴색했을까 싶었지만, 막상 다시 본 <중경삼림>은 오늘의 어떤 영화와 나란히 놓아도 여전히 독보적이고 세련됐다. 예전의 나라면 예쁜 CF 컷을 이어붙인 영상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파편 같은 장면들, 개연성보다 분위기가 먼저 앞서는 순간들, 설명되지 않는 표정과 음악의 잔향이야말로 이 영화의 본체에 가깝다는 걸.


민간인이든 연예인이든 너나없이 다듬고 채워 넣는 시대에, 임청하의 단단한 턱선, 금성무의 맑은 홑쌍꺼풀, 삐걱거릴 듯 야윈 몸으로도 이상하게 사랑스러운 왕페이의 막춤, 키 따위 잊게 만드는 양조위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오리지널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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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유년기를 떠올릴 때 자신의 순수함보다 첫사랑의 감각을 함께 기억하는 것 같다. 세월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후 다시 본 <중경삼림>은, 도회 속 고독한 젊은이들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수많은 짝사랑꾼들의 서툴고 지워지기 쉬운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잊히기보다 삭제되기 쉬운 감정들, 스타일리시하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풋풋함과 쓸쓸함을 이 영화는 끝내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지금 다시 보면 더 오래된 작품 같고, 더 선명한 감정을 품은 영화처럼 느껴진다.


복고는 몇 년째 돌고 돌지만, 정신까지 복고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요즘처럼 배우의 얼굴부터 화면의 질감까지 거의 모든 것이 공들여 제조되는 영화들 속에서, 사람들은 포장되지 않은 옛날의 순수성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몸은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마음만 잠깐 그 시절에 담갔다 빼듯, 노래와 영화와 오래된 감성을 통해 잠시 위로받고 싶은 것. 아마 그게 요즘 사람들의 마음이고, 동시에 내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