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마저 떨어진 양복점
큰길을 따라 걷는데 아버지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통증이 심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마른 팔을 잡았고 나란히 걸었다. 아버지의 보폭에 맞춰 걷는 걸음. 우린 살면서 나란히 걸었던 적이 없다. 어렸을 땐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빨랐고 성인이 되었을 땐 나란히 걷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쫓기듯 바삐 걸었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어느 때고 양복점을 향해 있었다.
너와 여행은 처음인 것 같구나. 여행을 다닐 새가 없었지. 사느라 말이다.
아버지는 희망이라고는 없는 양복점 때문에 바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떤가? 나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해 있었을까. 정신없이 삶을 좇았다. 남들보다 잘살아 보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보통의 가정을 이루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걸으니 상쾌하고 좋구나. 소화도 시킬 겸 걷자.
다리 괜찮으시겠어요? 통증이 심하시죠?
통증이야 늘 달고 사는 거지. 걸어야 운동도 되고, 밤에 잠도 잘 오고 좋지.
우리는 목적지도 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대로변에서 좁은 길로 들어섰는데 허름한 양복점이 보였다.
미성라사. 라자의 모음 획이 떨어져 나가 간판은 미성리사로 읽혔다. 아버지는 마치 아는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양복점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조금 전과 달리 빠른 걸음으로, 속도만 빨라진 게 아니었다. 굽은 등이 쑥 펴진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유리문에 머리를 박은 채 안을 유심히 살폈다.
유리문 사이로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난방이 되지 않은지 돋보기를 쓴 노인은 두툼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옷감이 걸려 있어야 할 벽은 텅 비었고 전시된 마네킹 또한 유행이 한참 지난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노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깨를 웅크린 노인이 뭔가 떠오른 듯 서둘러 일어났다. 생각에 잠긴 노인이 양복점 안을 서성이더니 다시 재봉틀에 앉았다. 뭔가 분주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성라사는 리갈양복점과 비슷했다. 공간은 물론 노인 또한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그들은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유리문 밖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곧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여긴 양복점이 제법 남아 있다더구나.
옷을 맞추는 사람이 있나 봐요?
맞춤옷을 알아보는 거지.
아버지는 한숨을 쉰 뒤 길을 둘러보았다. 길이 좁아, 다니는 사람이 없겠어. 당혹감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미성라사가 대로변에 있다고 한들 그곳을 찾는 이가 있을까.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성라사 앞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아버지가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한 몸짓으로 돌아섰다. 아버지도 아셨겠지. 사라져가는 것들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참에 양복점을 접으실 생각일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아버지를 따라 걸었다.
군청 쪽으로 걸으니 공원이 보였다. 붉은 꽃이 떨어진 배롱나무가 추운지도 모르고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배롱나무 옆은 수령이 꽤 된 듯 보이는 모과나무가 있었다. 나무줄기에 울퉁불퉁한 골이 있었는데 다른 모과나무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날이 추워 그런지 공원은 너무나 고즈넉했다.
아버지와 나, 둘의 발소리만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바람 소리와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연못의 물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부르르, 전화벨이 울렸다. 주원이었다. 주원은 할아버지와 여행이 어떠냐고 물었다. 망설이다 좋구나, 짧게 말했다. 저도 가려고 했는데……. 저도 깨우지 그랬어요? 한소리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어제도 여러 번 여행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그는 어깨만 으쓱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나는 주원이 나와 거리를 두게 된 것이 한국에 돌아오면서부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릴 때도 다정한 아빠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주원은 정말 동행하려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