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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곡선이 아름다운 이유

페테르 파울 루벤스&렘브란트 판 레인




                                           곡선의 힘



                                                          서 안나   



                              남한 산성을 내려오다

                           곡선으로 휘어진 길을 만난다 

                                 차가 커브를 도는 동안

                            세상이 한쪽으로 허물어지고

                              풍경도 중심을 놓아 버린다

                          나는 나에게서 한참 멀어져 있다




                           나는 곡선과 격렬하게 싸운다 

                                  나를 붙잡으려

                                   내가 쏟아진다 




                                   커브길을 돌아 

                             나에게 되돌아오는

                                     몇 초 동안

                             나의 슬픈 배후까지

                               슬쩍 열어젖히는

                                    부드러운 

                                    곡선의 힘


                 -서안나, <곡선의 힘>, [립스틱 발달사], 천년의 시작, 2013


일반인들의 아리랑 곡선만큼 예술가들의 삶 또한 다양합니다. 루벤스처럼 평생을 큰 기복 없이 우상향으로 살아낸 화가가 있습니다. 고흐처럼 제수씨의 특별한 노력을 통해 죽은 후에야 명성을 얻고 재조명되는 화가도 있지요. 렘브란트처럼 젊을 때 최고 절정에 이르다 말년에 밑바닥으로 떨어져 초라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개인적으로 가장 최악일 때 예술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작품들도 많습니다. 








피 터지게 싸운 끝에 유럽은 베스트 팔렌 조약(구교와 신교 간의 30년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1648년 체결된 평화조약)이라는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적 협상을 맺게 됩니다. 전쟁의 후유증은 많많치 않습니다. 스페인이 역사 속으로 슬금슬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은 다시 쪼개지고요, 신성로마제국은 힘을 잃고 사실상 붕괴되고 맙니다. 프랑스만 이익을 보고 모두가 패배자가 된 전쟁이었습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명예혁명을 통해 영국이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제후의 종교를 따라 믿어야 했던 시민들은  이제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얽히고 설인 30년 종교전쟁(1618-1648)은 각자 독립을 해서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의 독립과 함께  베네치아에 있던 상권이 북부 유럽 네덜란드로 옮겨가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통한 국제무역과 금융의 융성으로 돈이 넘쳐납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 던 암스테르담에 여유자금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니 미술품에 투자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지금의 아트 재테크처럼 말입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 그림을 소유할 수 있는 계층은 군주나 귀족과 같은 부유층이었습니다. 반면 네덜란드에서 일반 서민들이 자신의 집 혹은 가게를 꾸미기 위해 미술시장이 활기를 띱니다. 렘브란트를 비롯한 유명화가들의 손이 모자랄 지경으로 말입니다.  





반면 루벤스가 활동하던 시기 유럽은 거의 모든 나라가 30년 전쟁에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 전쟁으로 교회 미술품들이 파손되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루벤스가 정착한 안트베르펜(벨기에)은 종교전쟁의 격전지였습니다.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도시가 안정을 되찾고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단장을 시작한 교회는 대형 종교화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유학파 화가 루벤스도 밀려드는 주문량을 소화하느라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제작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대형 제단화들은 루벤스 미술의 초기 양식이 잘 남아 있습니다. 스페인과 영국의 평화를 위해 양국을 오가며 외교관 역할도 탁월하게 완수합니다. 그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교양을 갖춘 모습으로 말이죠.




그림1. 종교개혁/나무위키 그림2. 30년 전쟁 전의 유럽의 정치 상황/News-정보톡








바로크 미술은 1600년에 시작되어 18세기 초까지 지속된 양식입니다.  사실주의, 풍부하고 강렬한 색채, 대조되는 빛과 그림자로 특징지어집니다.  드라마틱한 행위가 막 일어난 동적인 장면을 그려냅니다. 대중에게 종교적 감정을 더 고취시키려는 확실한 목적으로 말이죠.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 플랑드르 지역 : 벨기에 (루벤스), 네덜란드( 렘브란트, 베르메르),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 등이 있습니다.





  스케치나 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빛과 색상을 통해 공간의 깊이, 부피 그리고 원근감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빛의 강도를 통해 만들어 내는 명암법은 공간과 배경을 드러내거나 지워버림으로써 그림의 전체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림1. <십자가에 내리심>1612-14/나무위키 그림2. <세 개의 십자가>1653/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림1>정적이 감도는 루벤스의 작품 <그리스도를 내림>입니다. 그의 이탈리아 여행의 성과가 반영된 작품이고요.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 <라오콘>을 연구한 흔적이 보입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법은 카라바조의 화풍을 느끼게 하고요. 또 하나 십자가에 매달려 천이 흘러내리지 않게 물고 있는 남자는 고귀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죠.




천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예수의 시신이 고요함 속에서도 부드러운 운동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 같은 구성은 수난의 공포와 비통함을 극대화시켜 신지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감각적인 표현법입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취지와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만약 루벤스가 고전주의 자였다면 십자가 세우기가 '완료'장면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시신'을 안고 있는 장면을 담았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는 어떤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담아냈습니다.





루벤스는 끊임없는 주문에 바빴습니다. 그의 작품으로 기록된 그림은 소묘와 판화를 제외하고도 1300여 점에 이릅니다. 이렇게 다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공장 시스템에 가까운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벤스가 간단한 스케치와 작은 견본을 그리면 제자들이 그것을 거대한 화폭에 옮겼습니다. 그의 곁에는 실력이 뛰어난 동료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정물화에 탁월한 화가, 동물 그림에 재능 있는 화가 등 각종 전문가들이 루벤스와 함께 하며 그림으로 세부를 담당했습니다. 루벤스는 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는데, 그림의 값을 달리했다고 합니다. 이런 협업 과정의 마무리 작업은 루벤스가 맡았고요. 그의 작업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루벤스가 단 몇 번의 붓질만으로 그림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치게 만드는 장면을 보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붓과 기교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 제라드 드 레이생-





<그림2>렘브란트의 현존하는 작품은 유화 약 600점, 에칭 300여 점, 소묘 1000여 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생 외국생활을 한 적이 없었던 렘브란트의 작품과 명성을 암스테르담 밖으로 , 네덜란드 너머로 알린 것은 그의 판화였습니다. 





나무 위에 날아가는 아주 조그만 새, 먼 곳에 점처럼 보이는 사람의 묘사,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 세부 묘사의 달인이 바로  렘브란트였습니다. 화려한 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검은색 백색으로만 시각적 효과를 냅니다.  공간감, 입체감이 경이롭고 고급스럽습니다. 색도 없는 얇은 선과 면이 만들어 낸 탁월한 세부 묘사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건조한 선이 품은 의외의 따뜻한 느낌 때문에 한 번 더 놀라고요. 회화로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판화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에칭이야말로 그가 완성한 독특한 판화 장르이지요. 판화의 역사를 렘브란트 이전과 이후로 나뉠정도로 말입니다. 





에칭은 부식 방지제인 그라운드라는 부식 방지 액을 발라서 (동판) 표면을 까맣게 만들고 바늘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입니다. 섬세한 바늘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사람의 머리카락의 10분의 1 정도 되는 가는 선의 표현도 가능한 것이 에칭의 특징입니다. 부식에 의해서 (동판에) 섬세한 선의 파임을 만들어낸 후 나중에 프린팅을 하게 되면 가는 선 안에 들어갔던 소량의 잉크가 선명하게 찍힙니다. 드로잉보다도 더 섬세한 그런 소묘적인 선들을 감상할 수 있지요. 조금 차갑지만 쓸쓸한 듯하면서도 또 따뜻한 느낌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선으로 나타낼 수 있는 섬세한 표정들이 많아 매력적입니다. 작가가 그리는 선 중에서 가장 솔직하고 또 많은 것을 한 번에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동판화 종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렘브란트는 유화에서 미처 다루지 않았던 폭넓은 분야의 주제를 판화로 다룹니다. 수많은 선의 굵기 혹은 동판화의 부식 방법에 있어 연구를 가장 많이 했던 선구자입니다. 주위의 가난한 농부, 혹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담아냈습니다.  주변 풍경을  아름답게 담아낸 작품도 많습니다.





그의 작품 <세 개의 십자가, 1653> 판화 작품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른쪽 죄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목이 뒤로 젖혀 있습니다. 구원받게 된 왼쪽 죄수는 감히 바라보지 못하는 듯하고요. 예수님 발치 끝에 막달라 마리아, '이럴 순 없어'하는 요한제자의 모습, 실신한 모습의 어머니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를 부축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왼쪽으로 애도하는 무리들이 돌아가는 모습,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 급하게 자리를 뜨는 듯한 서기관과 바리사이인의 모습도 보이고요. 로마 병사 100명을 돌보던 현장감독 백 부장의 신앙고백 장면도 그려져 있습니다.   7년 뒤 같은 제목의 1660년 작품을 보면 구성이 훨씬 단순하게 표현하며 십자가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림1.<삼손과 데릴라>,1609-10/wikipedia 그림2. <Bathsheba at her Bath>, 1654/wikipedia





<그림1>핏빛 드레스를 입은 델릴라는 욕정으로 달아오른 가슴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정욕에 눈이 멀어 델릴라의 품에 잠든 삼손의 남성적인 팔과 매력적인 등판은 사실적입니다. 루벤스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르네상스 적인 인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화폭에 담아냅니다. 삼손이 잠든 찰나를 놓치지 않고 머리를 자르는 사내와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노파가 들고 있는 촛불은 마치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듯합니다.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요. 벽면에 그려진 비너스와 큐피드의 안타까운 표정, 문 밖에서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훔쳐보는 병사들의 표정이 실감 납니다. '쉿, 조용히 해, 삼손 일어나면 우리 모도 끝장이야'뭐 이런 말들이 소리 없이 오고 가는 것 같습니다. 작은 불빛 하나로 병사들은 조연역할 제대로 한 덕에 작품을 걸작으로 완성하고 있습니다.






<그림2>렘브란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실물크기의 캔버스는 성서의 등장인물, 다윗 왕과 군대의 장군 우리야의 부인 밧세바를 그림 작품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이기도 하지요. 성서의 이 인물은 대부분의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고뇌에 빠진 밧세바에 집중하여 표현해 냅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은 궁전 테라스에서 그녀가 목욕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요. 다윗왕은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오도록 소환합니다. 그녀가 자기 장군들 중 한 명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욕망이 다윗왕을 눈멀게 합니다.





젊은 밧세바는 옷을 벗은 채 흰 천 위에 앉아 오른손에 편지를 들고 있습니다. 오리엔탈 스타일의 두건을 쓰고 있는 그녀의 여종은 그녀의 발을 말없이 말리고 있고요. 그녀는 고민에 빠집니다. 만약 다윗 왕에게 간다면, 그녀는 그녀의 남편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녀의 난감하고 심란한 마음 상태가 옆모습을 통해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고민을 하던 밧세바는 결국 이에 응했고, 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그녀와 여러 차례 정을 통합니다. 결국 밧 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이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우리야(Uriah)를 내보내 죽게 합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은 즉시 밧 세바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신은  이 죄에 대해 다윗왕을 심하게 벌합니다. 밧세바는 임신했던 첫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고 저주하였고 아이는 일주일 만에 병으로 죽고 맙니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이야기 중 다윗의 욕망을 표현하거나 다른 세부적인 일화를 따로 넣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왕의 편지로 인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밧세바의 표정을 통해 상황을 전달할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보는 우리로  하여금 밑바닥에 숨어있던 인간 내면에 깃든 복잡한  감정을 공유하게 만듭니다.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를 그리기 위하여 모델은 렘브란트의 보모로 들어온  핸드리케에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였을 거라 추측합니다. 첫 부인 사스키아가 죽고 젖먹이 아들 티투스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도와줄 보모가 필요했습니다. 그들 중 핸드리케와 연인 사이로 발전을 했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헌신적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사스키야가 "재혼하면 아들 티투스에게 모든 유산을 남기겠다."라는 유언을 해 렘브란트는 그녀와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코넬리아'라는 딸가지 임신하게 되어, 당시 개혁파 교회가 주류였였던 암스테르담에 둘 사이의 관계는 이슈가 되었고, 그녀는 '간통'이란 이름으로 법정에 서야 했습니다.





관람자의 시선까지 외면한 밧세바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예술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던 렘브란트를 어떻게 하든  돕고 싶었던 사람이 핸드리케였습니다. 일거리가 없어 점점 잊힌 화가 취급 당하는 렘브란트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밧세바의 모습처럼 느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림1. <메디치가의 상류>1625/한국경제 그림2. <야경>1642/나무위키
바르톨로메우스 반 데르 헬스트가 그린 자경단의 그림/google arts &culture








<그림1>루벤스는 무미건조할 수 있는 주제를 특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능력을 갖춘 화가였습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은 그런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대한 기록화입니다. 이 그림들의 의뢰자 마리아 드 메디치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공주로 프랑스 앙리 4세와 결혼합니다. 그러다 앙리 4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아들을 대신하여 프랑스를 다스렸습니다. 그녀는 루벤스에게 자신의 삶의 주요 장면을 기록해 달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여왕의 삶에서 주요 장면이라 할 만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탄생과 교육, 결혼식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전부였죠. 그런데 루벤스에게는 이렇게 평범한 일화들을 비범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항>은 마리아 드 메디치가 프랑스의 한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신화와 우의를 동원하여 멋지게 윤색해 놓은 작품입니다. 황금으로 도금된 화려한 배에는 메디치가를 상징하는 여섯 개의 구슬이 있는 방패 문양의 문장이 달려있습니다. 공주가 배에서 내리자 군모를 쓴 남자가 영접을 합니다. 백합문양이 새겨진 푸른 망토를 두른 남자는 '프랑스'를 상징합니다. 선박 아래에는 바다의 신과 요정들이 마리아의 입항을 기뻐하고, 하늘에서는 명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두 개의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당당한 모습의 공주와 예를 갖춘 '프랑스', 관능적인 요정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그림은 피곤한 항해를 마치고 하선하는 평범한 사건에 극적인 인상을 심어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iPQBlB3LY








<그림2> 이 작품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절정이었던 164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요.  그 스타일과 엄청난 크기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초상화였지만 그의 인생후반부가  180도 꼬이게 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는 한낮에 일어나는 일을 그린 거라고 합니다. 이는 1940년까지 그것을 덮고 있었던 어두운 광택 때문에 이름이 잘못 붙여진 거라고 합니다. 납과 황 성분이 포함된 안료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그림이 전체적으로 어두 둬진 거라고 합니다.  높은 곳에 걸려 있어 먼지도 많이 쌓여 있어 더 그랬을지도 모르죠. 





민병대장의 명령 아래 부대가 출격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인물들이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하느라  부산스럽지요. 기다란 창병의 모습도 보이고, 머스켓 총병의 모습도 보입니다. 빼놓으면 큰 일 나는 북을 치는 병사의 모습도 보입니다. 개까지 보이네요.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중대>라는 제목이 더 어울립니다. 당시 활동했던 민병대의 그룹 초상화라고 합니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도시를 수호하거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집될 수 있는 건강한 남자들의 모입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도시를 지킨다는 자부심 또한 컸고요. 



16명의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붉은 허리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프란스 반닝 코크(Frans Banning Cocq) 대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암스테르당 시장의 사위로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가 독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낸 사람입니다. 흰색 허리띠와 노란 옷을 입고 있는 빌렘 반 라위턴뷔르흐(Willem van Ruytenburch) 중위의 모습도 보입니다. 




성문 위의 방패에는 초상화 속의 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작품 구성을 목적으로 캔버스 안에 18명의 민병대원들과  16명의 가상 인물들을 추가합니다. 렘브란트가 그동안 실험하고 연구한 모든 기법들을 총 동원해 그려낸 새로운 스타일의 그룹초상화였습니다.  이 그림으로 인정받았을 때가 렘브란트 인생의 최고점이었습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초상화를 본 주문자들은 당황스러워합니다. 일렬로 주르륵 앉아있는 단체사진 같은 초상화를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똑같은 돈을 내고 자신의 얼굴을 찾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렘브란트에게  돈을 내고 주문한 작품 속 인물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그룹 초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기가 금방이라도 부딪히며 소리를 낼 것 만 같고, 당장 한 걸음을 떼고 활기차게 걸어 나올 것 같은 자유스러운 모습을 당시 주문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시민군의 모습을 담고자 했던 렘브란트의 의도는 민병대로부터 악평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대중의 취향에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평론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명성이 떨어지며 그림 주문도 뜸해지기 시작합니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비싼 지역으로 고가의 집을 사 이사를 한 상태입니다. 잘 나갈 때라면 집을 살 때 빌린 돈 갚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 떨어지는 작품 가격과 투자 실패로  결국 개인 파산을 신청하고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그림은 그려지는 대로 족족 압류당하기 일쑤고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 마저 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림1.<Roman Charity>,1612/wikipedia 그림2. <루크레티아의 자살>,1666/중앙일보




<그림 1> 루벤스의 그림 속에 늙은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장면이 묘사돼 있습니다. 느낌이 좀 이상하지요? 보기에 따라 늙은 노인과 젊은 여자가 부적절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녀관계입니다. 시몬의 딸 페로는 굶어 죽게 하는 형벌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면회 갔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너무나 굶주린 탓에 거의 죽음에 이른 것을 보게 됩니다. 첫아이를 낳은 지 얼 마 안 된 딸 페로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버지 시몬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그녀의 숭고한 사랑에 감동해 시몬을 석방했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루벤스의 작품입니다.






<그림 2> 이 그림은 로마 여성인 루크레티아의 실화를  다뤘습니다. 약 2500년 전 로마 황제의 아들 타르퀴니우스 섹스투스가 정숙한 루크레티아를 성폭행한 사건입니다. 가해자 섹스투스는 사촌지간인 루크레티아의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호시탐탐 노리던 일을 벌였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인 뒤 하인과 간통해 죽였다는 소문을 내겠다며 협박합니다. 이 모함대로 된다면 루크레티아의 집안은 불명예로 풍비박산이 나게 될 기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그렸던 이 무거운 주제는 렘브란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는 루크레티아가 자결을 결심하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생생한 구도와 어두운 색감으로 여인의 참혹함을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몸은 치욕을 벗기 위해 죽음을 강요당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머리는 두려움의 무게만큼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고요. 칼 끝이 향한 심장만이 환하게 대비되어 여성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전합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창의적인 상황설정과 내면을 나타낸 표정, 질감 표현이란 세 가지 특징을 만들었습니다. 렘브란트 후기 작품의 특징이지요. 성폭행을 당한 수치심과 끔찍한 기억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이 말하고 있습니다. 차마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기가 힘이 듭니다. 



이 작품을 통해 렘브란트의 자유로운 질감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얀 리넨과 드레스 소매의 질감이 부딪히며 실제 옷처럼 살아납니다. 소매 부분에 사용된 나이프의 거친 질감이 보이시나요. 부드러운 리넨 사이로 붉은 피가 소리 없이 번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속울음 같이 말입니다.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 끈을 잡아당기면 자신의 가족들이 그녀 앞으로 달려오겠지요. 나이프로 표현된 거친 질감은 생생한 표현으로 느껴지게 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몰입하게 합니다. 남편은 자결해야 할 이유를 듣고 죽어가는 여인 앞에서 오열하다 복수하러 달려가 루크레티아의 치욕을 갚습니다. 시민들은 가해자를 죽였고, 그의 아버지는 추방했습니다.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한 여인이 기폭제가 돼 로마 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시작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림1.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1611-1612/wikipedia그림2. <The Stom on the Sea o f Galilee>1633/wikipedia





<그림 1> 그림에도 운명이란 것이 있나 봅니다. 미술품에 전혀 무지한 사람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작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대가의 작품으로 판명이 나면 로또 상금 받는 것처럼 큰돈을 거머쥐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전문가가 대가의 작품일 것으로 보이지만 확증이 없는 작품을 구매한 후 대가의 작품임을 밝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루벤스의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 작품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2002년 7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루벤스의 작품이 4950만 6648파운드에 낙찰되면서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습니다. 이 작품은 헤롯왕의 '영아 학살'의 순간을 그린 작품입니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베들레험에서 태어났을 때 그 당시 지배자인 헤롯왕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탐욕에서 비롯된 학살을 바로크 시대의 화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609-1611년 사이에 그린 것입니다. 총 8명의 응찰자가 경합을 한 끝에 영국의 기념품 전문 딜러인 샘 포그가 낙찰받았다고 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포그에게 응찰을 의뢰한 사람은 전 런던지부 <타임스> 소유자였던 캐나다 컬렉터 데이미즈 톰슨으로 폴게티 미술관을 비롯한 몇몇 미술관보다 가격을 높게 불러 이 작품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 소장자는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89세의 오스트리아 여성입니다. 그녀는 1923년 유산으로 이 작품을 물려받았지만 작품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오스트리아 북부 라이허스베르크에 위치한 수도원에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경매사 소더비의 플랑드르&네덜란드 미술 전문가인 조지 고든은 이메일로 본 이 작품의 이미지만으로 대단한 작품이라 판단하고  작품을 직접 보려고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손전등으로 비춰봐야 할 정도로 어두운 곳에 걸려 있었다고 해요. 이 작품이 루벤스의 < 삼손과 델릴라>와 비교해 보게 되고,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졌을 거라 판단합니다. 





그는 이 작품이 진짜 루벤스의 작품인지를 검증하기 위해 런던, 옥스퍼드, 앤트워프에 있는 저명한 루벤스 학자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들 모두는 이 작품이 루벤스가 그린 작품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소장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수도원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작품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대가가 그린 명작으로 판명된 것이죠. 더불어 세계적인 경매사에 출품되어 올드 페인팅 분야에서 최고의 낙찰가를 기록했습니다. 











<그림 2>.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풍경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갈릴리호수에서 일어난 결렬한 폭풍 속에서 기적을 일으킨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분명 호수에서 벌어진 일일 텐데 마치 큰 바다에서 험한 파도를 만나 휘청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어삼킬 듯이 말이죠.




이미 끊어져 버린 줄이 허공에서 춤을 춥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 매달립니다. 그 와중에 뱃멀미를 하는 제자의 모습도 보입니다. 배의 돛대가 대각선을 만들며 왼쪽에는 곧 닥칠 것처럼 보이는 암울한 상황에 불안해하는 모습들이 강렬한 빛 속에 드러납니다. 렘브란트의 이목구비를 닮은 인물 하나가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에 종종 카메오로 출연하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오른쪽 아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은 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도가 잠잠해집니다. 렘브란트는 이렇게 상반된 두 장면을 한 화폭에 담으며 그의 천재성을 드러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K4eimjJv04






<돌아온 탕자>1661-1669/UM News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인 1668-1669년 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의 일부분입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입니다.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 Museum)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크기가 262cm*205cm(103in*81in)로  대작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림 속 한 사람, 한 사람과 대면하는 느낌이 드니 말입니다. 6년 정도의 구상과 죽기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 위에 그려 넣을 인물들 하나하나에 깊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캔버스에 탕자를 그리며 자신의 지난날의 삶이 마치 탕자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오른쪽에 깍지 낀 손을 하고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첫째 아들을 그리며 지난날 무심코 내뱉은 자신의 말고 행동이 교만하고 이기적이었음을 발견합니다.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려졌습니다. 얼핏 보면 아버지의 품에 안긴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이 주인공처럼 보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 먼 곳으로 떠납니다.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유산을 다 탕진하지요. 굶주림과 곤궁함에 지쳐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몰골 좀 보세요. 한쪽 발에 신발조차 없습니다. 머리카락은 이미 다 빠져버렸고요.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야단치지 않습니다. 죽었다 살아왔다며 오히려 신발과 옷과 반지를 주며 크게 환대합니다. 





눈이 짓무른 듯한 아비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시선이 늘 밖을 향했을 겁니다. 언제라도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면 뛰어나갈 요량으로 말이죠. 작은 아들이 먼 곳에서 오고 있음을 알고 버선발로 뛰어나온 아비입니다.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아비의 양쪽 손이 좀 다르게 그려져 있다고 말입니다. 눈 밝은 작가님들 눈으로 한번 확인해 보세요.  탕자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는 손은 어머니 같은 치유의 손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마라.' 하는 듯 지그시 누르는 아비의 손은 용서하시는 손으로 표현되어 있고요.






아버지와 참 많이 닮은 첫째 아들 모습이 보입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양새가 동생의 귀환이 달갑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또 가져갈까 봐 경계하는 걸까요? 냉담한 시선이 동생에게 꽂힙니다.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벌이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첫째 아들은 화가 치밉니다. 자신은 그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늘 받았지만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 첫째를 보며 아버지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아들을 조용히 타이르며 잔치에 함께 가자 권유합니다. 아버지와 탕자에게 쏟아지는 빛처럼, 첫째 아들에게도 살짝 머문 빛이 따뜻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우리 삶 속에 두 사람의 탕자의 모습이 늘 외 줄타기를 해서 그런가 봅니다. 





렘브란트는 젊어서 탕자의 비유에 대한 그림을 여러 번 그렸습니다. 젊어서 그린 그림의 탕자의 모습은 방탕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노년에 그려 낸 <돌아온 탕자>의 모습은 모든 걸 잃고 바닥까지 내려가 본 렘브란트 자신의 경험담이 물씬 풍겨 나는 용서와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곡선의 시간들! 바닥에서 위로 때로는 꼭대기에서 아래로 크고 작은 곡선을 그리며 살아갑니다. 대칭의 시간에서 비대칭의 시간으로 수없이 옮겨가며 말입니다. 리듬을 타며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차츰 눈에 들어옵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공감이란 근사한 이름의 겉옷을 입고 각자의 감정선으로 파고듭니다. 작가님들의 곡선은 오늘 어떤 커브를 그리고 있을까요?  바로크 미술처럼 빛과 명암 속에 깊어졌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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