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실패는 내가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거나 없다는 확신을 하게 한다. 주저 앉을때 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하지만 내가 일어선 자리가 멈춰선 곳에서 다시 출발하는 곳이든, 돌아서 다른 곳으로 물러선 곳이든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내 20대는 실패로만 가득차 있었다. 무엇하나 이루지 못한채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었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정작은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은 탓이라, 너에게 무엇이 되고 싶었고 너에게 무엇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탓으로 허허롭고 텅빈 내 자신을 외면 한채 빈 의자를 살피며 그 무엇이든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홍대 앞에 기타 메고 다니던 힙스터 이다가 성격 나쁜 학생회장 오빠 였다가 뒤늦게 각성한 고시생 으로. 나는 내가 지나친 모든 자리에서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내 밴드는 고작 열번도 안 되는 공연으로 사라졌고 학생회장으로 나는 그 흔한 단톡방 하나 남기지 못했으니 내게 남은 건 흔적이 전부다. 고시생 흉내 끝에 남은 것은 몇권의 두꺼운 법률 서적과 이력서에서 쓸 수 없는 실패담와 술자리 안주꺼리가 전부다. 나는 모든 것에 실패 했고 그 무엇도, 어 누구도 남기지 못한 채 그저 유령처럼, 질투만 남긴 채 사랑을 찾아 헤맸다.
어쩌면 내가 바라던 것은 나를 사랑해줄 누군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성의 손길에 담긴 애정 따위, 어쩌면 인간과 세상으로 부터의 관심이 그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무정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가면을 쓰고 그것이 정직이고 솔직인양 꾸며내는 모습은 사랑 앞에 부끄러워진 소년의 위악이거나 위선이었다. 작은 세상에 쳐박혀 특별하고 훌륭한 사람인 체 할 수 있게 되는 걸로 내 젊음은 끊임없는 질투와 자위행위로 방황을 채웠다. 냉담하게 말하지 않으면 나는 내 젊은 날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말할 수 없다. 나는 세상이 나를 불러주길 바랐으나 그 세상과 맞설 자신이 없던 탓으로 반복해 실패로 나를 치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멋들어진 서사들로 가득한 자기소개서가 모조리 실패에 닿았을때 내 연애와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누구든 좋으니 날 사랑해 달라며 시작했던 연애였고 그 연애를 지속시키기 위해, 내 실패를 정당화 하기 위해, 시작한 취직이었다. 나는 그런대로 한국 사람들 가운데 의지가 강하고 목표를 위해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손쉽게 포기하는 사람이었던 까닭으로 시간과 몸을 바꿔 애정과 노동을 시작했다. 그때가 벌써 10년 전. 내 삶은 거기서 부터 다시 시작된다. 나는 선언했다. 이제 나는 일개미처럼 살거야. 너에게 맛있는 밥을 사먹이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으면 그만이란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를 던지겠다는 꿈 따위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야. 나는 존재하지 않은 사람 처럼 살거란다. 그저 너를 사랑할 수 있으면 돼. 내 직장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내 스스로를 꾸몄던 모든 말들의 잔치를 폐기하기로 했다. 내가 읽은 책들과 그간 쌓아온 지식들은 고작 사치품일 뿐이야. 철학 책이 한 인간의 인생을 제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니체여 안녕, 페테르 슬로터다이크여, 매킨타이어여, 내 정신과 세계를 떠돌던 언어 규범들은 일상의 규범들에게 패퇴할 것이다. 삶은 구체적이라 구질구질하다. 우리는 커피 한 잔에 애정을 구걸하고 반 한끼에 헌법이 정한 주권의 가치를 팔 수 있는 보통의 존재들이다. 그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 따위 내게 있지 않다. 규범으로 축적한 이론의 당위들이 나를 작동하게 하지 않겠다. 나는 그저 평범한 보통의 존재로, 자연인 김성원으로서 살아갈 뿐이다. 그저 너에게 맛있는 밥 한끼를 먹이기 위해서, 엄마와 아버지에게 사람 구실을 하는 아들이 되기 위해. 그간 내가 쌓았던 모든 신념의 말들은 거짓말이다. 그렇게 믿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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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긴 길을 돌아 다시 제자리에 도착했다. 지난 10년간 나는 냉담한 성실을 들고 출근길에 나섰고, 사극부터 부조리극의 주연 또는 조연이 됐다. 홀연히 등장한 해결사 였다가 빌런이 되기도 했다. 싸움에 복판에 서기도 했지만 더러는 수모와 굴욕도 피할 수 없었다. 무엇도 믿지 못하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싸움으로 시간을 버는 것 뿐이다. 반복해 포기했던 신념들이 구체와 내용을 채우고 당위와 이론 들이 실제 세계의 현실들 앞에서 어떻게 흩어지고 무너지는 지를 봤다. 그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나를 텅 비운다. 여기서 부터 나는 다시 나를 출발 시킬 계획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그간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들을 포기해야한다. 나는 그래서 잊기 위해 지나온 시간들을 써내려 갈 것이다. 분노와 열등감, 자기연민과 혐오로 가득차 있던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멋들어지게 해냈던 그 순간들, 그리고 다시금 실패 앞에 선 순간. 반성과 성찰들 그리고 다시 올 미래 앞에 더욱 더 자유롭고 진지하기 위해서.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