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 찾은 한국 사회의 힌트
대한민국의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격변하는 한국의 정치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스웨덴에 있으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치 이야기는 조심스러운 주제이기에, 오히려 이전부터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바로 양심과 신뢰에 관한 이야기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날카로운 한마디는 시간이 흘러도 우리 양심 한가운데를 겨냥한다. 우리는 과연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가?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고 있는가?
도덕과 양심은 법의 바깥에서 작동하는 마지막 울타리다. 법과 규칙은 결국 감시와 처벌을 전제로 만들어지지만, 모든 상황을 일일이 법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제어하는 내면의 기준, 곧 양심에 의존한다.
이 양심이 흔들릴 때 발생하는 것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다.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 '어차피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퍼질수록, 규칙은 형식으로 전락하고 공동체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 번 도덕적 해이가 자리잡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도 '나만 바보 될 수 없다'며 뒤따르고, 결국 모두가 손해 보는 악순환에 빠진다.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 친구와 맥주 한 잔을 나누며, "이곳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이 뭐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친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게 자연스러워."
그 한마디가 오래 맴돌았다. 같은 주제를 놓고 대화를 이어 가며 우리는 불법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피해자가 없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로 불법 복제 사실이나 우회경로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떠벌리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물론 스웨덴에서도 불법 이용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체감한 바로는, 적어도 그런 행동을 공공연히 드러내거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조심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사소한 규칙이라도 지키는 문화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나는 스웨덴 사회가 도덕성과 투명성에 투자한 긴 역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예컨대 1766년 세계 최초로 '언론, 공문서 공개법(Tryckfrihetsförordningen)'이 제정되어 국가 기록을 시민에게 열었고, 1809년에는 '옴부즈만(Ombudsmannen)' 제도가 도입되어 행정을 독립적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노동, 협동조합 운동(Folkrörelser)이 확산되며 공공재정에 대한 시민 통제가 일상화되었다. 이런 제도적 뿌리와 문화적 전통이 결합해 '부끄러움'과 '신뢰'가 사회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았다. 스웨덴의 '토블론 게이트'(1995)처럼 부총리가 공금을 들고 토블론 초콜릿 두 개를 산 사실도 크게 문제 삼는 문화는, 이 나라가 2024년 부패인식지수(CPI) 세계 8위를 차지할 만큼 투명성을 중시한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나는 종종 스웨덴에서 사는 게 부럽다고 말하는 한국 친구들에게, 오히려 스웨덴은 안전하지 않은 나라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거리에는 CCTV가 거의 없고, 유동인구가 적으며, 개인정보(주소 등)도 비교적 쉽게 공개되어 있다. 이런 환경이라면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치안 시스템이 과도하다 싶을 만큼 잘 갖춰져 있다.
스웨덴의 이런 모습은 때로 치안 불감증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키장이나 해수욕장 같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잠금장치가 없는 선반에 짐을 두고 자유롭게 놀러 나간다. '이렇게까지 믿어도 괜찮은 건가?' 싶은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그러나 결국 이는 상호 신뢰가 생활 깊숙이 뿌리내린 모습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신뢰 비용' 개념이 뚜렷해진다. 신뢰 비용이란,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발생하는 추가적인 시간과 자원의 낭비다. 거래할 때 계약서를 여러 번 검토하고 변호사를 동원하는 일, 택배가 도난당할까 CCTV를 설치하고 보안업체를 부르는 일 등이 그 사례다. 반대로 서로를 믿는 사회에서는 약속 하나로도 일이 진행된다. 편의점에서 셀프 계산대로 물건을 사는 풍경이 바로 신뢰가 비용을 줄여주는 대표적 장면이다.
이처럼 신뢰가 높은 사회는 감시 장치보다 양심과 문화가 더 큰 비용 절감 장치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선택들이 반복될 때, 비로소 신뢰는 서서히 쌓인다.
결국 이런 고민 끝에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양심을 지키는 것이 결국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양심을 지키는 일은 순간적으로는 손해처럼 보일 수 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해야 하고,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며, 손쉬운 길을 외면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작은 양심의 선택은 내 안의 응어리를 남기지 않는다. 규칙을 어길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쌓이는 찝찝한 감정이야말로 나를 가장 피곤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이런 선택이 타인에게도 신호가 된다는 점이다. 내가 신뢰를 지키면 주변 사람도 신뢰를 실천하게 된다. 그렇게 작은 정직함이 파급되어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신뢰 자본이 자라난다. 한 명의 양심 있는 사람이 열 명의 불신을 녹여낼 수 있다면, 이 작은 선택들은 결국 가장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세대 간, 성별 간 갈등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세대를 비난하거나, 성별에 따라 혐오 표현을 정당화하는 일이 인터넷과 정치 영역에서 공공연히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회 전체의 신뢰 자본을 갉아먹는다. 타인을 기본적으로 의심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공동체의 협력 가능성이 줄어들고, 사회적 비용은 더욱 높아진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적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양심과 신뢰는 설 자리를 잃는다.
결국, 양심은 단지 개인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나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출산율 역시 이런 불신과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다. 미래 세대가 살아갈 사회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수록, 아이를 낳고 기를 용기 역시 사라진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어떤 희망도 자라기 어렵다. 출산율은 단지 경제나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한 거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도덕성을 중요시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문화를 만들어간다면 출산율과 같은 복잡한 사회 문제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경제적 위기 역시 돌파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어떠한 정책이든 단점이나 부작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신뢰와 도덕이라는 문화적 기반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작용 없는 유일한 해법이자, 가장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대응 전략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개혁은, 다시 부끄러움을 배우는 것이다.
PS. 항상 글을 쓸 때, 농담을 섞고 가벼운 어조로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써왔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진지하게 글을 써보았다 (ChatGPT와 함께).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가장 하고싶은 말을 담았다. 조심스럽게 썼지만 혹시라도 불편하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