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 우리는 언제 젊은가?
이 영화는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다.
호흡으로 시작한다.
숨을 고르고, 걷고, 멈추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로.
스위스 알프스의 호텔.
은퇴한 지휘자 프레드와 영화감독 믹은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같은 길을 산책한다.
겉으로 보면 평온하다. 그러나 그 평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 아니라,
‘이미 많은 일이 지나간 뒤에만 가능한 정지’에 가깝다.
프레드는 음악을 멈췄다.
아내와의 약속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시간을 멈춘 채 살아간다.
아내의 병실을 찾을 때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창밖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은 마지막 인사처럼 텅 비어 있다.
그 장면은 죽음을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충분히 말해준다.
믹은 다르다.
그는 끝까지 무언가를 완성하고 싶어 한다.
‘마지막 영화’, ‘최고의 작품’.
믹은 창작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영화작업을 끝내면 자신도 함께 사라질까 두려워 도망치듯 붙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미래에 매달린다.
브렌다가 그를 찾아온다.
오랜 동지, 오랜 배우.
그녀는 말한다.
“선택해야 해요. 말할 가치가 있는 게 무엇인지를. 공포인지, 열망인지.”
그리고 덧붙인다.
‘난 열망을 택했어요. 쓸데없는 공포심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어요.’
이 장면에서 관계는 끝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진실이 시작된다.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도 인생의 후반부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을 선택한다는 사실.
그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담담히 보여준다.
산책길에서 믹은 환영을 본다.
자신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배우들이 안개 속에서 차례로 나타난다.
아름답고 찬란하지만, 손에 닿지 않는다.
그 장면은 말해준다.
예술은 남지만, 예술가의 시간은 지나간다는 것을.
한편 젊은 배우 지미는 히틀러 역할을 준비한다.
머리를 깎고 분장을 한 채 식탁을 세게 내려친다.
그건 연기가 아니다.
역할이 인간을 잠식할 때 나타나는 균열이다.
그는 말한다.
‘준비된 사람은 없어.’
그 말은 프레드를 향한 말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이기도 하다.
영화 곳곳에 젊음이 스친다.
마사지사가 춤을 출 때,
미스 유니버스가 아무 말 없이 등장할 때,
뚱뚱한 축구 선수가 여전히 공을 차고 있을 때.
젊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붙잡을 수 없기에 더 선명하다.
프레드와 믹은 ‘좋은 친구끼리는 좋은 이야기만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길다 블랙과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웃는다.
잠자리를 가졌다는 기억은 결국 사실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자전거를 함께 탔던 기억뿐.
그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처럼 느껴진다.
젊음은 성취가 아니라 감각이었음을,
화려한 사건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이었음을.
마지막 연주를 앞두고, 바이올리니스트는 여러 번 같은 부분을 연습한다.
완벽한 한 번은 우연이 아니라 반복 위에 놓인다는 사실을,
음악은 보여준다.
프레드가 다시 지휘봉을 드는 순간,
그는 젊어지지 않는다.
다만, 다시 살아 있다.
‘유스’는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말하는 젊음은 상태다.
열망을 아직 포기하지 않은 상태,
공포에 시간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상태.
그래서 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두려움인가, 열망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읊조린다.
젊음은 지나갔을지 모르지만,
‘젊어질 수 있는 순간’은 아직 남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