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악몽을 꾸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침대 시트가 흥건히 젖을 정도인 거 보니 어지간히 무서운 꿈이었나 보다. 몽롱한 채로 화장실로 향했다. 밤새 밀린 일을 보고, 양치와 세수를 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다. 우진은 본인 모습에 만족한 듯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거실로 나왔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다. 출근 전에 왜 안 깨우고 가셨지? 벌써 낮 12시가 넘었다. 이렇게 늦잠을 잔 적은 거의 없었다. '악몽, 다 그 악몽 때문이야.' 우진은 기분 나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면 하나 끓여 먹고 핸드폰을 켰다. 엄마에게 온 메세지를 확인했다. 학원 숙제 빼먹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우진은 인상을 찌푸린 채 방으로 들어갔다. 방학이라 학원에서 내주는 숙제가 너무 많았다. 3시까지 가려면 2시 반까지는 숙제를 끝내야 할 것이다. 어제 하고 잔다는 게 책을 읽다가 잠들어 버렸다. 고민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자세를 잡고 집중해서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겨우 시간 안에 끝냈다. 지금 집을 나서면 3시부터 쭉 학원에 있어야만 한다. 오늘은 영어, 수학 3시간씩 그리고 보충까지 있는 날이다. 11시가 넘어갈지도 모른다. 저녁 시간 30분 외에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겠지. 한숨이 나오지만,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삶이란. 쯧쯧.’ 혼자 뒤통수를 쓰다듬어준다.
우진의 엄마는 엄한 사람이다. 엄마는 대학에 관한 이야기 외에 다른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늘 잘해왔지만, 칭찬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공부는 그가 태어난 이유이자 목표였다. 당연한 걸 하는데 칭찬을 바라는 건 도리에 어긋나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아빠가 '어릴 때는 참 잘 웃었는데...' 라며 표정 없는 우진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질 때면 장난기 가득한 아들이 되어 아빠의 걱정을 덜어 주려 애썼다. 밝고 활발했던 우진은 성장하면서 밝은 척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마음속 어딘가의 공백이 가끔 낯선 물음표를 던졌지만, 상관없었다.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그런 소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 따윈 넘보지도 않았다. 서툰 감정은 내 목표를 멀어지게 할 뿐이다. 서일대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해가 바뀌었고 이제 곧 고3이다. 현재까지 등급은 1등급. 우진은 미국 유학을 원했지만, 엄마는 그 대학, 그 과만을 원했다. 무조건.
졸리는 걸 겨우 참았다. 우진은 민석이와 학원 앞에서 헤어진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안은 조용했다. 인기척 없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안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도 얼굴을 못 본 터라 인사라도 할 겸 안방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성민의 귀에 불안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우진은 더 듣고 싶었다.
“진짜 독했어, 너. 그때 내가 너 안 말렸으면,”
갑자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우진과 문을 열고 나오던 우진의 아빠는 둘 다 얼음이 된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야, 인마! 왔으면 왔다고 해야지! 장승처럼 뭐 하는 거야?”
아빠의 핀잔 섞인 웃음이 이어 나왔다. 우진도 머쓱하게 따라 웃었다.
“깜짝 놀라게 하려고 그랬죠. 엄마, 다녀왔습니다!”
“어.”
말끝에 억지스러움이 묻어났다. 대답하기 싫은데 분위기가 그러니 그냥 대답해 준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주방으로 향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등 돌린 채 묻는다.
“배고파?”
“아니요, 저녁 편의점에서 대충 먹어서, 배 안 고파요.”
“그럼, 들어가서 공부해.”
“네.”
“너 서일대학 꼭 붙어야 한다. 알지?”
엄마는 한 번 더 강조했다. 우진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하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공부하느라 고생했다는 소리는 오늘도 듣지 못했다.
‘버.렸.으.면.어.쩔.뻔.했.어.’
그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돌았다. 뭘 버리려고 한 걸까? 뭐였기에 숨기지? 우진은 계속되는 물음표를 애써 지우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악몽 꾸면서 흘린 땀을, 숙제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샤워기 물줄기에 잡다한 생각과 감정들을 다 씻어 보내고 싶었다. 속옷까지 벗고 샤워기 꼭지에 손을 대다가 성민은 기이한 걸 보았다.
reborn. 오른쪽 팔목에 새겨진 이상한 문자. 학원 저녁시간에 잠시 엎드려 졸았을 때 민석이가 장난친 건가? 클렌징을 덜어 빡빡 문질렀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볼펜이 아니었다. ‘아, 이 자식. 무슨 짓을 한 거야?’ 더 세게 문질렀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우진은 샤워기를 끄고 팔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오른팔 안쪽에 2cm 길이 정도로 가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리본? 이게 무슨 뜻이지? 이런 게 왜 있는 거야.’ 어제도 없었던 게 갑자기 그의 팔에 생겨났다. 어젯밤 악몽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일부러 걱정하는 편이 아닌 그는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차차 지워지겠지. 크지도 않은데 뭐.’ 우진은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학원에서 배운 걸 한 번 더 복습했다. 잡생각 떨치는 덴 수학 문제 풀이만 한 게 없다. 집중해서 풀다 보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꼬박 세 시간을 앉아 공부한 뒤 화장실에 가려다 엄마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후다닥 침대로 들어갔다.
‘버. 렸. 으. 면. 어. 쩔. 뻔. 했. 어.’
잠시 잊었던 그 문장이 다시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몇 시간을 상념에 쌓여 뒤척거렸다. 오른팔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현재진행형으로 누군가가 오른쪽 팔목에 가느다란 펜으로 그 낯선 문자를 천천히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진은 잠시 더 뒤척거리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또 기억나지 않는 악몽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