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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Apr 21. 2021

시아버님과 라면 사태


우리 시아버님은 한두 달에 한번쯤은
반드시 손주들을 보시러
서울에서 울산까지 오시곤 한다.
아버님의 방문이
이제는 익숙한 정기 행사가 되어
처음 겪었을 때처럼 긴장감이 넘치고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어릴 적 할아버지를 기다리듯,
아버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며느리가 되어 버렸다.


직장맘이 되기 전에는
아버님이 내려오시면,
아버님과 나는 거의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
집안에 머물며 집안일을 함께 했고,
장을 보러도 함께 갔으며,
산책을 하기도 하고,
조금 더 어릴 적의 우리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아버님과 함께 했다.


그러나 내가 출근을 하게 되고
아이들은 각자가 하루를 보내야 할
기관으로 흩어지게 되면서,
아버님은 낮시간을 오롯이 홀로 보내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님이 오시면
하루쯤은 휴가를 내기도 했고,
또 때론 점심시간이 되면 집까지 와서
아버님과 점심 데이트를 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
일이 조금 바빠지면서
점심시간에 빠져나오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도 일을 편하게 하라시며
퇴근해서 만나자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순종형 며느리는 아버님의 말씀을 넙죽 받아 들고서
이젠 점심시간도 가끔을 제외하면
아버님 홀로 보내실 때가 많다.


홀로 계시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아버님의 점심 식사가 늘 마음에 쓰인다.
볶음밥을 해 놓아 보기도 했고,
찌개를 끓여 놓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만들어 놓은 음식은 그대로 남겨져 있었고
집안 전체에 라면 냄새가 진하게 풍기곤 했다.
결국 몇 번의 시도 끝에
아버님만을 위한 점심 요리를
따로 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님은 라면을 참 좋아하신다.
서울 댁에 계실 때도 낮에는 주로
아버님의 주도로
어머님과 함께 라면을 끓여 드시곤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 오셔서도
점심 메뉴로 라면을 고집하신다.
그냥 라면도 아니다.
아버님의 휘뚜루마뚜루 표 특제 라면을 끓여 드신다.


여기서 잠깐,
아버님의 휘뚜루마뚜루 표 특제 라면이란?
먼저, 신라면이나 진라면을 준비하고 물을 끓인다.
다음으로 김치를 준비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냉파 재료들을 등장시킨다.
당면부터 시작해서 떡국떡, 파, 양파, 버섯, 햄,
계란, 양배추까지 냉장고에 숨죽이고 있는 것들이라면
뭐든지 라면에 넣으셔서 새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아버님의 라면을 보면
아버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
꽉 차오른 도전정신과
사나이 감성으로 재료를 막 집어넣으신다.
한마디로 휘뚜루마뚜루 요리사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예상치 못한
라면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한 번은 냉장고에 넣어둔 작은 베트남 고추를
라면에 넣으셔서 입속에 불이 난적이 있으시다.
그러곤 퇴근을 해서 온 나에게,
“에미야, 작은 고추 그거 뭐냐? 내가 오늘 그걸 라면에 넣었다가 혼났다 에미야.허허허..그런거 너무 매운 거 먹지 마라.” 하신다.


또 한 번은 냉장고 구석에서 화석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쫄면 1인분을 발견하시고
라면에 넣으셨다.
재료를 이것저것 찾아 넣으시는 사이
쫄면은 바닥에서 완전히 눌어붙어 다 타버린 모양이다.
그러곤 퇴근을 하니,
“에미야 내가 쫄면을 넣었다가 냄비를 다 태워 먹을 뻔했다. 그래서 철수세미로 긁었더니 이렇게 말끔해졌어. 에미한테 혼날까 봐 냄비 바닥 열심히 닦았다 에미야~ 껄껄껄”
하시며 냄비를 꺼내 보여 주신다.


그리고 엊그제,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서니..
“에미야 그 까만 라면 뭐니 그거? 하이구, 내가 큰일 날 뻔했다 에미야. 허이구 뭐 그런 걸 사다 먹어. 그거 누가 먹니? 에비가 먹는 거야? 허이구, 아주 무섭게 맵더라. 에미야. 그런 거 먹지 마라 너희들. 허이구 큰~일날 뻔했다 내가.”
라면 바구니에 넣어둔 불닭볶음면을 드셨나 보다.
설마 드시지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따로 말씀을 드리지 않고 출근을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다.
아버님의 싱그러운 호기심으로
불닭의 까만 봉지를 철커덕 뜯어내신 것이었다.
(하아- 아버님 죄송해요...)


이것 말고도 다양한 라면 사태가 있었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아름답게 느껴지므로
애써 자제해 본다.


우리 아버님은 그런 분이시다.
철없는 며느리가 아버님을 세심히 챙기지 못하는 사이
울산의 백주부가 되셔서 온갖 모험을 감당해 내신다.
며느리보다
며느리의 살림을 더 속속들이 아시고,
각종 라면 사태에도 의연히 대처하신다.


늘 더 잘 챙겨드리지 못함이
죄송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럼에도 사랑을 잔뜩 품고
잊지 않고 손주들을 찾아와 주시는
휘뚜루마뚜루 아버님이 계시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며느리가 되기를 꿈꿀 수 있고,
그 꿈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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