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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Apr 22. 2021

며늘, 이 세 가지는 무조건 무조건이야!


“에미야,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
중간중간 간을 보고, 잘 익었는지 먹어봐야 된대니깐.”
“너무 익으면 물러서 못써.”
“물 끓을 때 소금을 넣고 나면
자꾸만 숟가락으로 떠서 먹어봐.
에미가 간이 맞는지 확인을 해야지.”

아버님과 함께 하는 아이들 식사 준비 시간이다.
우리 아버님은 데친 브로콜리 1급 요리사 이시다.


첫째 아이의 첫돌 무렵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구독하시는 신문의
건강코너에서 세계의 슈퍼 푸드에 관한 기사가
실린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TV에서 세계 슈퍼 푸드 중 하나인 브로콜리의
효능에 대한 소개를 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아버님의 브로콜리에 대한 사랑과 무한 신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식사에는
매 끼니 데친 브로콜리를 올렸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했으면 좋겠다.” 정도가 아니라, “해야 한다.”였다. ㅎㅎ
불고기와 함께 데친 브로콜리,
생선과 함께 데친 브로콜리,
볶음밥과 함께 데친 브로콜리,
브로콜리, 브로콜리, 브로콜리...


게다가 브로콜리를 데치는
아버님만의 노하우가 있었으니,
그것을 전수받지 못하고는 주방에 들어설 수 없었다.
수십수백 번이나 브로콜리를 데치시면서도
데치는 물에 들어갈 정량화된 소금의 양이나,
정해진 요리 소요시간은 따로 알려주지 않으신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아버님의 요리 세계에 ‘정량화’된 것이란 없었다.
직접 찍어 먹어보고 결정하는
‘혓바닥 요리법’과
타이머보다 정확하다는 ‘감’으로 시간을 맞추신다.
아버님만의 휘뚜루마뚜루 브로콜리 요리법이다.


1. 브로콜리는 아이들 입에 쏙쏙 넣기 좋은 크기로 잘라
흐르는 물에 두세 번쯤 깨끗하게 씻는다.
2. 작은 냄비에 많지도 적지도 않은 물을 넣는다.
3. 물이 끓기 시작하면 소금을 넣어 간을 한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맛이 될 때까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물의 간을 본다.
4. 간을 맞추었고, 물이 팔팔 끓는다면
씻어둔 브로콜리를 투하한다.
5. 그리고 냄비 앞을 지키며
브로콜리의 딱딱함이 딱 사라지는 순간,
(수시로 브로콜리를 꺼내 익었는지 확인)
채반에 건져낸다.
이때! 절대로! 절대로!
브로콜리를 찬물에 헹궈서는 안 된다.
(우리 아버님께서 맛이 없어진다고 하셨어~워우워어어~)
6. 그리고 적당히 식혀진 브로콜리는
마침내 식탁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우리 아버님의
휘뚜루마뚜루 브로콜리 요리법이다.

*여기에 정량화/정시화(?)를 좋아하는 며느리는
아버님 몰래 규격화된 요리법을 만들어버린다.
브로콜리의 양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크기의 브로콜리 절반을 데칠 경우는
브로콜리 투하 후 1분 40초쯤 후에 건져낸다.
소금은 아빠 숟가락으로 1/6 정도의 양을 넣는다.
(조금 큰 한소끔)
 
여기까지가 우리 아버님의 무조건 무조건이야
아이템 1호인 브로콜리 이야기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의 무조건 무조건이야 아이템은,
어머님께서 직접 담그신 김치와
어머님 아버님의 합동 작품인 매실 엑기스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아이템 2호인 김치는,
당연히 매 끼니마다 식탁 한자리를 차지한다.


결혼 8,9년 차인 나와 동서는 아직까지도
우리 시댁의 김장벤져스로 초대받은 적이 없다.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님은 한사코 우리의 출입을 막으신다.
올해쯤엔 김장벤져스 멤버로 허락하실지 모를
김장 김치를 여태껏 손수 담가 주시고
아버님께서 아이스박스 포장까지 하셔서
매년 택배로 보내주신다.
“부지런히 잘 먹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그리고 아버님께서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식사 1회 당 2-3회씩 같은 말씀을 하신다.
"에미야, 우리 집 김장김치는
(엄지를 추켜세우시며) 이거야 이거!
어디 가서 이런 맛있는 김치 먹어본 적 있어?
이건 보약이라고 생각하고 많이씩 먹어 에미야."

"네 많이 먹을게요!"
하며 김치를 덥석 들어 올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김치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김치는,
아버님 말씀대로 보약이라 생각하고
잘 먹기로 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치얼쓰!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조건 무조건이야 아이템 3호인 매실엑기스
이야기를 좀 해보자.


아버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첫날 저녁, 혹은 둘째 날 저녁에 삼겹살을 굽는다.
"많이 좀 먹어 에미야!"
하며 내 등을
(토닥토닥보다는 세게) 텅텅 치시기 때문에,
나는 그날이 오면
내일이 없는 사람 마냥 삼겹살을 양껏 먹는다.


그러곤,
배가 부르다며 조금 전의 식탐을 후회하고 있자면
곧이어 아버님은 빅 머그잔에
매실 물을 가지고 오신다.
"에미야, 이거 무조건 한잔 다 마셔야 한다."
배가 터져나갈 지경이 되어도
최소 반잔은 마시는 성의를 아버님께 보여드려야 한다.


여기서만 고백하지만,
나는 매실엑기스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버님과의 티키타카를 위해서 라면
취향의 문제는 저기 저 우주쯤으로 보내 놓아야 한다.
찍 소리 없이 매실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가끔은 유치하게
한입을 꽉 채워 매실 물을 머금고는
화장실에 가서 와라락 뱉어낼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정말로 더 이상 그 무엇도
목구멍으로 들어갈 구석이 없는 날이다.
어릴 적 엄마 아빠 앞에서도 안 해보던,
뒤돌아서서 뱉어내기를
아들을 둘이나 낳고 나서
숨죽인 채로 시아버님을 상대로 감행해본다. ㅎㅎ


아버님의 무조건 무조건이야 아이템은
강력추천 이라기보다는
강제성을 띈 형태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나는 언어 순화하는 며늘아기니까..(^^)
아버님의 강력추천을 마주하다 보면
열 번에 아홉 번은 한숨부터 나오더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금세 적응을 해버렸다.
지금은 아버님이 침 튀기시며 강추하실 때마다
이게 다 사랑이구나~ 하며
더덩실 장단을 맞춰 드린다.


오늘도 수화기 너머로
'무조건 무조건이야'를 외치시는
사랑 많은 아버님이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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