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 이중섭
잠들기 10분 전, 침대맡에서 떠나는 게으른 여행 이야기.
<자정무렵 여행하기> 최픽션 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정의 상상 여행을 떠난지도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저는 이 상상의 여행법을 포르투갈의 시인 페소아에게서 배웠습니다. 살아생전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간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포르투갈을 떠나지 않았던 페소아. 그는 상상할 수만 있다면 어떤 여행이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리스본에서 인도나 베이징을 다녀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죠.
저는 이 여행법이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직접 발을 딛는 여행이라면 더할나위 없지만, 때때로 우리 삶은 그것을 악당처럼 방해하곤 하니까요. 예를들면 짧은 휴가나 부족한 통장잔고, 그리고 팬더믹 같은 것들 말이에요. 지금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계시는 모든 분들도 그런 악당들에게서 벗어나고자 이곳을 찾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가능하다면 이 여행법을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한 화가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중섭, 흔히 ‘황소’의 그림으로 알고 있는 화가죠. 오늘은 그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 서귀포의 이중섭 거리로 가볼까 하는데요. 같이 떠나보시죠.
서귀포하면 제주를 대표하는 수많은 호텔과 인기있는 올레길, 그리고 수많은 관광지가 있어서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발길을 옮기는 곳이죠. 하지만 먼 과거에 그곳은 그저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화려한 불빛도 다채로운 볼거리도, 아름다운 거리 풍경도 찾아볼 수 없는… 있는 것이라고는 바다와 파도, 바람이 전부인 그런 곳이었죠.
한국전쟁의 시기. 이곳에 이중섭과 그의 일본인 안내, 그리고 두 아들이 찾아옵니다. 그들로서는 피난의 마지막 장소로 찾은 곳이 서귀포였죠. 보통의 피난민들이라면 부산 정도에서 행락을 풀었겠지만 이중섭의 가족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도 있었고, 지독한 가난도 원인이었죠. 이 당시는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첨예하게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기에 가뜩이나 퍽퍽한 피난생활에서 사람들은 이중섭 가족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사람이 없는 곳으로 밀리고 밀린채, 제주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죠. 아, 그러고보니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의 이야기를 아직 해드리지 못했는데요.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의 이야기를 잠시 해드릴게요.
이중섭과 이남덕이 만난 것은 이중섭의 일본 유학생활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이중섭의 고향은 평안남도 였는데요. 그는 친가도 그렇고 외가도 그렇고 엄청난 재산이 있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힘든 시기였음에도 그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곳에서 그림을 배우며 아내가 될 이남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이중섭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이남덕이 직접 한국으로 찾아오면서 재회를 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죠.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때 북에 있던 재산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바람에 이중섭은 ‘가난’과 직면하게 되었죠. (교과서에서 봤던 은박지에 그린 이중섭의 그림 기억하시나요? 이것 역시 종이를 살 돈이 없어서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난에 허덕이던 이중섭 부부는 부산에서 잠시 터를 잡아보려다 실패하고 서귀포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중섭 거리를 걷다보면 나오는 낡은 초가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었죠. 큰 마음 먹고 제주도로 왔지만 가난을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조개를 갈아 먹으며 연명을 할 정도로 어려운 날들을 보내게 되죠. 이런 상황이다보니 이중섭은 물론이고 아내와 두 아이도 건강마저 악화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섭 가족은 이 시기를 인생의 화양연화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가난이 있을지언정, 이별같은 슬픈 단어는 없었으니까요. 다시는 서로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 그 행복감 때문이었을까요? 이중섭은 이 시기, 행복에 겨운 가족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냅니다. 그래서 그가 제주를 담은 작품들을 마주하면 기분이 최고조로 좋지 않을 때에도 미소를 짓게 되는데요. 그 그림들도 서귀포 이중섭 거리에서 만날 수 있으니 놓치지 말도록 하죠.
다시 이중섭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이제부터는 방금 전의 마주한 행복의 뒷면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 이후. 이중섭과 가족들은 한국과 일본을 사이에 두고 더는 만나지 못했으니까 말이에요.
아내와 아이의 몸이 좋아지지 못하는 탓에 이중섭은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잠시 일본에서 몸을 추스리는 동안 자신은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자리를 잡고, 다시 재회를 하기로 했던 것이죠. 하지만 생의 곳곳에 숨어있는 악마는 이중섭이 약해진 틈을 타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중섭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재회를 위한 일념으로 붓을 들었고, <흰 소>를 비롯한 수많은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무슨 일인지 그의 그림을 주목해주지 않았고, 이중섭은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좌절의 깊이만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런 좌절의 순간마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일본에 그림 편지를 끝없이 띄우고, 가족을 품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중섭의 그림 중에는 소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제외하면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이 가장 많습니다. 특별한 점은 이중섭이 그린 가족의 모습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이죠. 예를 들면 해변가의 꽃게가 사람만큼 크다든지, 자전거를 타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부의 팔이 지나치게 길다든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현실성을 무시한 구도의 그림을 그린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가족을 향한 이중섭의 마음. 그것이 그만큼 커다랬기 때문이죠.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점의 그림을 더 볼까요?
이중섭은 다행히 좋은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시인 구상은 그를 물심양면 도와준 친구였죠. 의사 부인과 함께 풍족하게 살던 구상은 홀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중섭을 집으로 들여 살곳을 마련해주었습니다.그런 구상에게도 자식이 있었는데요. 하루는 구상이 아이에게 자전거를 선물해 줍니다. 생전 처음 자전거가 생긴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죠. 그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중섭은 종이에 그 모습을 담습니다.
그림 속 아이는 고개가 완전히 돌아갈 정도로 기뻐하고 있고, 아이를 바라보는 구상 부부의 미소는 세상의 행복을 다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멀찍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중섭 자신도 그림에 담겨 있죠. 그림 속 이중섭은 옅은 미소를 띄고 있지만 눈은 공허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이중섭은 구상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만나지 못한 일본의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 공허한 눈빛에 마지막 희망이 비친 것은 그가 부두 노동을 통해 겨울 한 번, 일본에서 아주 짧은 재회를 한 후였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중섭은 김환기, 구상 같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죠. 45점이 출품된 이 개인전에서 26점이 예약판매 되는 등 개인전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듯했습니다. 이중섭도 그 돈으로 일본에 건너갈 수 있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꿈에 부풀어 있었죠. 하지만 예약을 한 구매자들이 실제 구매까지 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수금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이중섭은 또 한 번의 좌절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상처가 너무 컸던 나머지 대구로 돌아간 이중섭은 정신병을 앓게 되죠. 그리고 1956년. 적십자 병원에서 그는 다시 보지 못할 가족들을 눈에 담은 채, 세상과의 슬픈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서귀포 이중섭 거리에서 이중섭과 그의 가족 이야기를 짧게 나눠봤습니다. 이 이야기를 품고 이중섭 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이중섭이 서귀포를 배경으로 그린 가족 그림이 특히 눈에 잘 띄실 거예요. 그 그림은 감당하기 벅찰만큼 너무나 행복해 보이죠. 앞서 들려드린 이야기가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말이에요.
사실, 저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저의 장난스러운 소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힘든 페이지는 모두 덧칠하고 이렇게 적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제주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정 무렵 여행하기 최픽션이었습니다.
저희는 다음 자정의 여행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해요.
그때까지 잘지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