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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Oct 11. 2024

법의 시선, 인간의 마음

유죄 선고를 받고서

유죄라니. 재판에서 유죄를 무수히 받았지만, 이번 유죄가 제일 기분이 나빴다. 1심에서 무죄 선고가 나온 것을 뒤집고 벌금형이 선고되어서 그렇다. 2심에서 검사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지도 않았고, 심문조차 하지 않았고, 정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법관의 판단이 1심과 달라진 것이 당혹스러웠다. 


재판 소식을 들은 몇몇이 괜찮냐고 다정한 걱정의 말을 건넸는데,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다. 잠깐 기분 나쁘고 화가 났을 뿐 기운이 빠지거나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워낙에 정신승리대마왕이긴 하지만, 넓게 보자면 항소심까지 1승 1패를 한 것이다. 법정이 활동가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임을 생각한다면 원정 2연전에서 1승 1패를 한 것이니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2연패가 예상되었던 판에서 1승 1패면 잘한 거지. 대법 가서 다퉈볼 여지도 꽤나 높은 거니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너네가 아무리 나한테 벌금형 선고하고 징역형 선고해 봐라. 너네가 내 지갑을 털어가고 내 몸을 가둘 순 있어도 내 정신을 털어가거나 가둘 수는 없다. 너네는 결코 나를 가두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시민불복종을 하는 활동가. 시민불복종은 처벌받음으로써 법과 제도의 불의함을 세상에 알리는 전략. 너네가 나를 처벌하면 할수록 나와 친구들이 세상에 대고 했던 말들에 더더욱 정당성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활동가에게 전과는 흉이 아니라 훈장. 속상할 일이 아니다. 물론 이번 재판의 발단이 된 액션은 우리가 법적 리스크를 지지 않기 위해 굉장히 온건한 방식으로 기획했던 것인데, 고작 그 정도를 하고 대단한 결심을 하고 액션 한 것처럼 재판 받고 그러는 게 민망할 따름이다.


선고 공판이 끝나고 법원 앞 커피숍에서 동료들과 함께 유죄 선고를 비판하는 논평을 썼다. 논평을 써서 홈페이지와 SNS에 올리고 판결문을 신청하러 법원 민원실에 갔는데 아뿔싸, 점심시간에 딱 걸려버렸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인생 첫 전과가 생길 위기(?)에 놓인 쥬를 위해 두부집에 가서 두부음식을 시켜 먹었다. 우리가 죄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전과에는 두부가 딱 어울리는 퍼포먼스니까. 밥을 먹고 대충 시간을 때우다 다시 민원실에 가서 판결문을 받았다. 


판결문은, 여타의 많은 법조인들이 그렇듯 무성의하지 않았다. 우리가 1심 때 제출한 시위 영상을 꼼꼼하게 분석해서 써 내려간 판결문에서 법관의 성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성실함 말고는, 나는 그 판결문에서 다른 사회적인 고민 같은 것들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정치사상의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원리, 세계 평화와 우리 한국 시민의 책임 같은 것들 말이다. 판사가 이것들에 대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게 아니다. 정치사상의 자유를 얼마나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나 세계 평화와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도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다. 판사가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고민한 흔적 같은 것은 없어고, 오로지 법논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판결문을 뜯어보면, 항소심 재판부는 "업무방해죄는 추상적 위험범으로서 업무방해죄의 성립에 있어서는 업무방해의 결과가 실제로 발생함을 요하지 아니하며 업무방해의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발생하면 족하다"는 대법원 판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법알못이라 그런지 몰라도 나는 저 대법운 판례가 이상하다. 실제 업무방해가 발생하지 않아도 처벌이 가능하다는 건데, '초래할 위험'이라는 건 그야말로 법관의 뇌피셜에 근거한 것 아닌가? 물론 판사가 기계는 아니니 자신의 소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게 맞지만, 판사의 소신이 보장되는 것이 민주적인 재판이 되려면 판사의 구성이 훨씬 다양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 출신 판사, 여성 판사, 빈민 출신 판사, 이주민 출신 판사, 트랜스젠더 판사, 장애인 판사 등 다양한 법관이 있어야 법의 논리로만 보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재판에서 두루 살필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측면에서 이번 판사가 그저 성실하기만 한 법전문가(혹은 법기술자)라고 느낀 구절은 판결문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런 구절이다. 


"피고인들이 위와 같이 행동한 것은 무기 거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 목적이나 동기의 정당성은 일부 인정될 여지가 있으나, 헌법상 보호받는 집회시위의 자유는 타인 소유의 건물이나 동산 위에서 집회나 시위를 개최할 권리까지 보장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수인한도를 넘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집회나 시위도 헌법이 보장하는 것인 아닌 점 등을 고려할 때, 시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수단이나 방법이 없었다거나, 위와 같은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긴급한 상황이 있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판사가 사건에만 성실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도 성실함을 가졌다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전쟁터를 누비는 한국산 무기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성실하고 따뜻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결과적으로는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더라도 좀 다른 판결문을 쓰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의 법원이라는 안전한 곳, 방청객이든 피고인이든 법정에 입장할 때 가방까지 다 열어서 소지품 검사하는 곳에서 법관복을 입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할 긴급함이겠지만, 폭격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긴급한 문제라는 감각을 그는 보여주지 못했다. 헌법상 보호받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에 대해서 엄격하게 고민했지만, 침략전쟁의 부인하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헌법적 가치와 무기박람회 혹은 무기 산업에 대해서는 전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가 한 행동은 성실하게 분석했지만, 우리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고민한 흔적이 보이질 않는 판결문이었다. 


나는 판결문을 읽고 나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미국 망명 당시인 1943년에 쓴 시 '민주적인 판사'를 떠올렸다.


민주적인 판사

-베르톨트 브레히트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앤젤레스의 판사 앞에

이탈리아의 식당 주인도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 때문에 시험에서

보칙(補則)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시민권 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각하되었다. 3개월 뒤에

더 공부를 해가지고 다시 왔으나

물론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 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느냐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하여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판사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새 언어를

배울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회해 본 결과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네 번째로 나타났을 때 판사는 그에게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하여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서로 다른 욕구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법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법관의 역할을 법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법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어떻게 적용해서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없다면 처벌만을 남발하는 판사들만 넘치겠지. 노동하며 세금 내도 언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시민권을 주지 않는 판사들만 넘치겠지. (생각해 보니 임재성 변호사도 1심 때 변론하면서, 사법적 처벌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고 남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거 같다) 그런 세상이 과연 함께 살아가기 좋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판사는 자신의 결정으로 타인의 삶을 크게 뒤흔들 수 있는 만큼 중요하고 전문적인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전문성에 법관으로서 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법의 시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살펴보는 인간의 마음이라든지, 법의 서로 다른 해석이 부딪히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사건의 전후 맥락을 살필 수 있는 통찰력 같은 것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나. 법의 논리만을 성실하게 적용하는 판사라면, 차라리 AI 판사가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다. 


의정부 지방법원 앞에서 재판 마치고. 무죄 선고용 손피켓만 준비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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