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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짧은 리뷰

by 이용석

스포일러 있음


한편으로는 아껴뒀던,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무서워서 미뤄뒀던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마지막까지 다 봤다. 아니 드라마가 이러면 어쩌자는 건지. 드라마 시청은 나에게는 일종의 취미생활인데, 물론 머리 아프고 가슴 아픈 드라마 보는 거 좋아하지만, 이 정도로 감정이 세게 흔들리면 일상생활은 또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지속하라는 건지. 기억도 감정도 좀 많이 길게 남는 드라마가 될 거 같다.


드라마든, 영화든, 책이든 간에 보는 사람마다 같은 작품을 보고서도 다르게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은중과 상연은 충분히 그런 드라마다. 드라마가 공개되고 난 뒤 한동안 내 SNS에는 은중과 상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는데, 모두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로 자신의 삶에 포개어 드라마를 봤지만 각자의 삶은 고유하기 때문에 다른 점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들 있었다. '두 여성이 지지고 볶고 친하다가 절교하다가 다시 친해지는 이야기'라고만 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상연의 말을 빌리자면 "좋기도 하고 밉기도 한" 그런 감정이 드라마에 가득 차 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했고, 마지막화를 보면서는 '죽음'이 깊게 감정을 파고들었다.



관계


드라마 초반, 상연(박지현 분)과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써보면 어떻겠냐고 묻는 PD에게 은중(김고은 분)은 아무런 사건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은중의 말처럼 이 드라마는 둘 사이의 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 관계를 보여준다.


난 예전부터 단짝 친구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대신 나는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했고, 친구도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둘이 죽고 못살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되어 버리고, 또다시 서로 부둥켜안고 울다가도 또 어느 날에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리는 관계들이 신기했다.


여전히 그런 관계의 메커니즘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관계라는 게 노력이 없으면 지속되지 않고 노력하더라도 노력과 관계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인생의 경험으로 배워 알게 됐다. 내가 살아온 인생 속에서 어떤 관계는 내 잘못과 부주의로 단절이 되었고, 또 어떤 관계는 상대방의 노력 부족으로 멀어지기도 했다. 가장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떤 관계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결국 어긋나기도 한다는 것. 그런 관계의 악다구니를 죽을 때까지 반복하게 될 거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좋기만 한 관계는 없고 모든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처, 서운함, 미안함, 섭섭함, 속상함 같은 감정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런 감정들은 때로는 너무 강력해서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사람들은 결국 누군가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걸까.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고, 고통조차도 삶에서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고통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는데 말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내가 맺어온 관계, 어긋난 관계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누가 끝내 널 받아주겠니"라고 말하는 은중이나 "너가 망가지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하는 상연만큼은 아니겠지만, 은중과 상연이 서로 간의 관계로 고통받고 고통을 주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자꾸 내가 주고받은 고통이 떠올랐다. 실은 주로 내가 준 고통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그럴 때마다 드라마를 멈추고 선우정아의 '그러려니'를 들었다.



죽음


은중이 결국 상연과 함께 스위스로 가서 상연의 조력자살을 지켜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알고 보면서 도내 내 힘이 들었다. 죽음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매우 흔한 사건이고, 주인공의 죽음조차도 익숙한 레퍼토리인데 나는 뭐가 그리 무거웠는지 평소 생각하지도 않는 '죽음'의 이미지가 자꾸만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내가 상연이라면, 혹은 상연처럼 가능성이 1도 없이 죽음으로 가는 고통만 남은 길이라면 나는 조력자살을 택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뭐 운이 좋아서 마음이 몸보다 건강했던 덕분인데, 그렇더라도 어떤 학문적인 호기심이나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처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살아가고 일하고 노는 시간만으로도 부족한데 죽음까지 생각할 것이 뭐가 있겠나 싶었다.


아니면 내가 만약 은중이라면, 혹은 은중이처럼 나의 아주 가까운 이가 자신의 조력자살 여행에 동행해 달라면 나는 그와 함께 갈 수 있을까? 은중이 상연과 스위스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 그리고 마지막 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마치 내가 은중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숨 쉬기가 힘들고 두렵고 상황을 마주하기가 어려운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드라마 시청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감정일지,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무서운 것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살면서 나름의 죽음을 겪어봤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의 죽음은 없었다. 같이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우리집에서 돌아가셨고 장례식도 집에서 치렀지만(그때는 주택에 살고 있었고, 대개의 경우 장례식장이 아니라 자기집 마당에서 장례를 치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는 너무 어려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엔 무리였다.


그래서일까,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죽음을 마주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드라마를 본 뒤 계속 '죽음'이라는 두 음절 단어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있다. 나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준비조차 안 되어 있는데. 나의 죽음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조차도 말이다.


문득 딱 일 년 전 대만 자전거 여행에서 나동이 쓰러져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실려가고 의식을 뇌에 손상이 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가 생각난다. 친구들은 단 둘이 간 여행에서 나동은 쓰러지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 혼자 놓인 것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작 나는 너무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했다. 아무렇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아서 걱정일 정도로. 어쩌면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준비조차 안 되었기 때문에 나동의 죽음을 생각조차 못했던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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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이 깊게 남긴 이 감정들, 생각들,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드라마가 이래. 이렇게 힘들게 해도 되나. 사람의 마음을, 감정을 이렇게 후벼파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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