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이가 들수록 연애를 시작하기가 이토록 어려워지는가
* 이 글에서의 “나”는 설정상의 인물이며, 필자가 아님을 밝힙니다.
나는 엄마, 아빠라는 사이 좋은 50대 부부와 함께 살고 있는 30대 군식구이다. 군더더기 식구할 때의 그 군식구가 맞다. 나는 요즘 점점 더 내가 이 집의 침입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아빠와 갈등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내가 이 나이를 먹고, 참 사이 좋은 부부 사이에 끼여 그들이 돈 벌어서 산 집에서 월세 한 푼 안내고 산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새길 때면 내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건 이 나이에 술을 밤새 쳐먹고 그 다음날 엄마 아빠 앞에서 미친듯이 토를 할 때 솓구치는 자기혐오의 감정과는 조금 다른 은은하면서도 묵직한 종류의 자조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갓 대학을 졸업한 어린 (어렸던) 나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대학이라는 곳을 떠나 사회라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게 때로는 얼마나 거지같고, 두렵고, 비참한지이다. 나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대학이라는 좁은 공간을 떠나는 순간만을 꿈꿨었다. 하루 빨리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대학이 주는 그 특유의 안정감이 싫어서 얼른 예측불허한 상황들이 발생하는 사회로 나가고 싶었다. 대학에서 나는, 특히 고학년 시절의 나는 자신만만 그 자체였다. 수업에서 발표를 하면 앞에 앉은 사람들이 굳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 모두를 집중시키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내가 했던 말들이 너무 황당해서 얼굴을 확인한 건 아니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사회에 나온 나는 어딜가나 막내였고, 항상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학교에서의 나는 자신감과 패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사회에서의 나는 매일 주눅 들어있는 초년생이었다. 학교에서는 모두가 내 말에 집중했는데, 사회에서는 내가 존나 맞는 말을 해도 아무도 듣지 않았다.
두번째는 여성의 경우, 20대 후반이 될수록 연애하기가 미친듯이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다음은 연애의 어려움 정도에 대한 그래프다. 참고로 여기서 어려움을 판단한 기준은 연인관계를 유지하는 난이도가 아닌 연애를 시작하기까지의 난이도이다. 적당한 그래프를 찾다가 못 찾아서 결국 똥손인 내가 직접 그렸다. 절대 그 수고를 알아달라고 이 말을 굳이 덧붙인 건 아니다.
10대 때와 20대 때는 여자들이 연애를 시작하기에 비교적 쉬운 편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더 어렵게 시작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클럽이나 술집에서 평균적인 여자들은 여러 그룹의 남자들 중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지만 평균적인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그런데 20대 후반을 기점으로 연애가 급속도로 어려워지고, 30대가 되면 Fucking Hard 수준이 된다. 남자들은 오히려 20대 후반을 기점으로 갑자기 연애가 쉬워지고, 30대 이후로부터는 그냥 Hard 수준에 그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고, 그냥 나의 경험과 내 주위 사람들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으로 그린 야매 그래프다.
예전에 나는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결혼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 얘기를 해준 사람들이 주장하기로는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본인의 자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외모의 가치가 떨어지고, 남자는 본인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인 능력의 가치가 나이가 들수록 올라가기 때문에 외모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만회해준다고 했다.
나는 특정 사회 현상이 옳건 그르건 우선 그 사회 현상이 실존한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에 대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편이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여성의 결혼이 어려워지는 이유가 결국 여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외모가 퇴화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듣고 매우 불쾌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손해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인생의 동반자를 위한 서칭을 시작했다. 연애 경험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다. 사랑의 나그네처럼 내 마음을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주기 보다는 나에게 끈덕지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남자,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싶었다. 이 서칭을 시작한 게 26살이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적당한 남자를 찾지 못했다.
외모가 문제인 것일까? 분명히 나도 더 어릴 때는 인기가 꽤 많았는데. 혹시 최근 몇년간 한국 여성들의 외모가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은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실제로 유튜브를 찾아보니 키가 160 중반인데 몸무게를 40대 후반까지 감량했다는 다이어트 후기들이 매우 많았고, 나의 엉뚱한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나는 살을 뺐다. 외모가 확실히 예전보다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 찾기는 어려웠다.
늦었지만, 처음에 내가 세운 가설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자가 나이가 들수록 연애가 어려워지는 이유가 단순히 외모의 문제라면, 어릴 때부터 탐색을 시작하고 심지어 외모를 고도화한 내가 연애를 시작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20대 초반에는 연애를 시작하는 건 너무 쉬웠고, 유지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어려웠는데 20대 후반부터는 시작하는 것 조차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갔다. 아니 힘이 들어간걸 넘어서서 아예 시작하지 못했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주위 여자인 친구들이 같이 겪었고, 겪고 있는 문제이다. 다들 결혼했거나 몇년 째 솔로, 이렇게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만 있고 예전처럼 짧은 텀으로 연애를 연속해서 하는 친구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내 초기 가설이 틀렸다는 가정하에, 다른 이유들을 생각해보았다.
20대 후반에 접어들면 여자와 남자가 둘다 취직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취준생이었을 때와는 달리 연애를 할 여유가 생긴다. 그런데 평소 하던 연애와 목적이 달라지는 것 같다. 여자는 결혼을 염두해두고 미래를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는 남자를 찾기 시작한다면, 남자는 여전히 연애 그 자체만을 위한 연애를 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다. 평생 일할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직장을 고른다면 그 어느 직장도 완벽해보이지 않고, 취업이 망설여진다. 그러나 앞으로도 여러번 이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취직을 한다면 한번 직장을 고를 때 그렇게 목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자는 여자의 경우이고, 후자는 남자의 경우인 것 같다.
실제로 20대 초반에는 내가 만나는 모든 남자들이 (잘생겼다면) 잠재적 연애 대상자였다면, 결혼을 염두해두고 나서부터는 만나는 사람의 95%는 단순한 외모가 아닌 “느낌”에서 탈락하고, 그 모호하고 정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느낌” 테스트를 통과한 5% 중 4.7%는 연애 중이며, 연애를 안하고 있는 나머지 0.3%는 그냥 날 안 좋아한다. 그 0.3%의 불호에 대해서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잠재적인 연애 대상이라는 모수 자체의 급속한 감소에서 야기된 것이다. 이전에는 낯선 사람 중 내가 조금이라도 호감을 가지고, 그 사람도 연애를 안하고 있던 경우가 어림잡아 전체의 30% 였다면 지금은 0.3%로 그 확률이 1/10도 아닌 1/100로 감소해버렸을 뿐이니까. 원래 과녁 그 주변 어딘가를 맞추는 건 쉬워도 과녁 자체를 맞추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과녁범위의 지름이 100cm에서 1cm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워진 것 아니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건 나의 사격 또는 양궁 스킬이 아니다. 왜 나의 과녁이 이토록 좁아졌냐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나의 과녁을 좁히는 그 “느낌”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말한 결혼까지 고려할 수 있는 연애를 함에 있어 그게 왜 중요한지를 2번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을 정의한다면 아마 이 사람이 나에게 안정적으로 사랑을 공급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인지일 것이다. 20대 때는 너무나 불타올라 자각하지 못했던 사랑의 잠재적 폭력성과 무시무시함을 알아버렸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수십년을 투자해 설계하고 건설한 무지무지 아끼는 집의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여행을 가는 것과 같다. 나와 연애를 하는 사람은 마음 먹으면 나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그의 변덕스런 사랑, 무심함, 갑자기 식어버린 마음은 윤이 나던 나의 마음에 하루아침에 똥물을 끼얹는 것과 같다. 그로 인해 나의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고, 안정적이었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쉽게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원한다면 나의 일상을 행복으로도, 불행으로도 채울 수 있는 엄청난 파워를 건내줄만큼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연애는 굉장히 많은 시간, 돈,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성취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 입장에서는 이러한 연애의 특성이 부담이 되고, 사회에서 나의 가치를 부지런히 올려야할 20대 후반~30대 초반에는 더더욱 부담이 된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내가 궁금한 분야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에 내가 무슨 옷을 입었을 때 가장 예쁠지 생각해야하고 수시로 눈썹 정리, 수염 정리 (뭐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여자도 인중에 솜털 비슷한 수염이 난다), 다리털 제모, 피부관리 등에 시간을 써야 한다.
또한 그닥 맛있지도 않고 멋있지도 않은 장소에서의 식사에 한번에 수만원씩 지출해야 한다. 연애를 하면 분위기 있는 곳에서의 식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대학원과 내 집 마련을 염두해두고 열심히 저축과 재태크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렇게 안 나갈 수도 있는 돈이 나가는 건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면 그 사람과 보냈던 시간들이 그렇게 혐오스럽고, 세상에서 제일 아깝게 느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와는 갈등이 있어 멀어진다고 해도 그녀와 보냈던 시간들이 아련하게 느껴지지, 멀쩡한 시간을 허비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연인과 보냈던 시간은 정말이지 죽도록 아깝다. 어쩌면 전자는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는 사이이지만 후자는 다신 볼일 없는 사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정리하고보니 1번만 남녀의 연애 난이도 격차를 설명해주고, 2, 3번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합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2, 3번은 내 마음이 연애를 방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1번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타인의 목적이 개입된다. 그래서 2, 3번과 무관하게 애초에 1번이라는 배리어를 넘지 못한다면 연애는 성립될 수 없으며, 1번의 강력한 힘으로 인해 위와 같은 그래프가 형성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 군식구 얘기로 돌아온다면, 나는 하루빨리 군식구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다. 물론 지금도 원하면 독립할 수 있겠지만, 엄마 아빠 집에 얹혀사는 데서 오는 경제적 이익과 생활적 편리함을 고려했을 때 쉽게 나가겠다는 결정을 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나가고는 싶다. 그 집이 얼마나 작을지언정 어엿한 나의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나만의 가정을 꾸려서 살고 싶고, 다 큰 딸이 엄빠 사이에서 Thirdwheeling (커플 사이에서 깍두기 역할을 하는 것) 하는 장면을 더 이상 연출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다시 위 그래프로 돌아간다면 ….
아씨. 다 모르겠고,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