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ina Menzel - Let it go(겨울왕국 OST)
샌프란시스코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했던 일은 바로 영화보기.
토요일이면 눈이 부신 햇살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빨리 씻고 아파트 앞마당으로 나가면 파머스 마켓에서 사람들이 신선한 채소와 과일들을 구경하면서 사고판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서 과일과 채소를 한 아름 사서 집으로 올라온다. 그 재료들을 씻고 손질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단한 아침을 만들어 먹는다.
달달한 게 땡기면 고구마맛탕을, 밥이 먹고싶으면 참치김치볶음밥, 나갈 시간이 임박했다면 신선한 과일.
가볍게 지갑과 핸드폰만 가방에 넣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옷을 입고 영화관으로 출발!
몸이 무겁고 귀찮다면 필모어스트리트에서 가장 가까운 재팬타운이나 반네스 스트리트에 있는 AMC 영화관으로 간다(찾아보니 지금은 반네스 스트리트 점은 폐업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밖에서 놀 기운이 있다면 바로 AMC메트레온으로 간다. 다운타운 중심지에서 가깝고, 근처에 유니온 스퀘어가 있어 쇼핑몰이 밀집해 있고,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들이 많아서 좋아했다.
한식당 '서라벌'에서 현지 사람들도 좋아하는 한국 음식을 먹으며 '내가 바로 한국인이다!' 혼자 뿌듯하기도 하고, 크레페나 마카롱, 태국식 아이스티를 마시거나 영화관 스낵을 돌아가며 먹어보고, 아예 가는 길에 오패럴 스트리트 쪽에서 내려 당시 푹 빠져있던 태국 식당 '오샤'에서 배부르게 태국 음식을 먹고 영화관으로 향하기도 했다.
영화관 건물에 있는 '타겟(우리나라의 이마트같은)'에서 한참 돌아다니며 사람 구경, 상품 구경을 하기도 하고, 근처의 공원에서 햇빛을 즐기기도 했다.
이 스물다섯의 영화광(을 자처하는 모든 분야의 호기심천국)은 뽀송뽀송하고 시원한 늦가을, 마음 깊숙한 곳에 넘실대는 댐을 툭 터트릴 영화를 만나게 된다.
겨울왕국. 당시에는 미국에서 <FROZEN>이라는 제목으로 자막도 설명도 없이 영화관에 가서 봤는데 가슴이 벅차서 그 다음주에 다시 봤다. 무엇보다 화면 속의 엘사가 내 모습을 빼다박아서 눈물도 찔끔 났다. 주변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 능력을 감추고, 숨기고,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던 엘사. 대관식 날 결국 엘사는 예민하게 반응하다 그 능력을 자기도 모르게 쓰게 되고, 힘을 컨트롤할 줄 몰라 두렵고, 사람들의 시선도 견딜 수가 없어 도망친다.
한참을 도망쳐 눈이 쌓인 설산에 얼음으로 성을 만들고, 얼음으로 만든 성에 스스로를 가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얼음괴물들을 만들어 자기를 보호하려는 엘사의 모습이 마치 내 모습 같아서 두 번째 볼 때는 보고싶지 않은 내 모습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슴이 따끔따끔 아팠다.
엘사가 얼음으로 성을 만들며 Let it go를 부르는데, 노래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갈수록 엘사는 더 힘차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견고하고 아름다운 얼음성을 완성해간다. 이제 나다운 모습을 마음을 보이면서 살거고, 예전의 그 착한 아이는 없다고 외친다. 이제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눈과 바람, 얼음이 가득한 이 곳에서 내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살거라 온 마음을 풀어헤쳐 절규하듯 노래한다.
그래서인지 얼음 성에 스스로를 가둔 엘사의 모습은 외적으로 더 빛나고 아름다워진다. 마치 눈의 여왕처럼(겨울왕국의 처음 모티브가 눈의 여왕이라고 하던데 정말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눈의 여왕이 만들어졌다). 더 세고 더 아름다워지고 더 빛나는 엘사는, 마음 속의 상처와 두려움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나도 그랬다. 나를 감추고자 만들어낸 공들여 꾸민 외모, 아무리 아픈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 나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면서까지 쌓은 스펙같은 건 내가 나를 극복할 수 있는 단단한 사다리가 되지 못했다. 마음 속 상처받고 두렵고 이기적인 작은 아이가 위로받지 못하고 방어기제를 펼쳐 스스로를 보호하며 타인에게 가시를 세운 탓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 속의 노래 한 곡을 들으면서 이렇게나 깊숙하게 내 마음 속이 무방비하게 까발려지는 느낌을 받다니.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반항적인 방어기제가 다시 작동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멀쩡하게 살면 됐지.
하지만 아름다운 눈의 여왕의 심장에 박힌 얼음조각은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눈사람 올라프와, 예민하고 날카로운 언니를 사랑한 유일한 가족 안나 덕분에 녹는다.
이 노래를 들으며 가시를 세우고,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내 모습과 마주했다. 그리고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언니를 사랑한 안나의 마음이 엘사가 용기내어 안나를 안고 울게한다. 내 모난 부분에 찔려 상처받고 아파하면서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이런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노래를 듣고 한 번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한 계기가 되어주었고, 나 스스로 모난 내 모습을 깎아내고 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잃은 사람들도 있고, 그들에게 나는 마음의 짐과 미리 변하지 못한 모습에 미안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돌이킬 수는 없다. 대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내게 올 사람들은 더 넓고 깊고 따뜻하게 녹아내린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다.
십여년 전의 더 뾰족하고 날카로웠던 내게 선물같이 찾아온 엘사와 안나, 사랑이 넘치는 동물친구들과 한스. 여러 종류의 사랑이 결국 마음 속의 얼음 조각을 녹이고, 얼음성을 녹인다.
오늘도 폭염을 이겨보려고 Let it go를 들으며 아직도 뾰족하고 날카로운 내 모습이 어디에 또 남아있나 살펴본다. 샌프란시스코의 자칭 영화광, 많이 부드러워지고 성장했어 칭찬해! 그리고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