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라가 쪽지를 펼치고 환하게 웃는다. 그 속에는 "하이스타 비투"라는 핀란드어가 적혀 있다. 사실은 욕이지만, 료하는 "사랑해"로 알고 쓴 말!
이 장면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오해에서 시작된 고백이 진심으로 완성되는 순간. 세상에서 둘만 아는 비밀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은 아닐는지.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영화 "6번 칸"은 이렇게 역설로 가득한 영화다. 두 사람만의 관계 속에서 친숙한 것은 낯설어지고, 낯선 것은 친밀해진다. 하이스타 비투라는 욕이 사랑의 고백이 되는 것처럼.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이 영화는 그랑프리를 받았다.
료하와 라우라는 직업, 학력, 국적 등 그 어느 것으로도 쉽게 매칭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며칠간의 기차 여행이 그들을 이어준다.
쿠오스마넨 감은 이미 전작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로 칸의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대상을 받은 바 있다. 두 번째 장편으로 경쟁 부문 그랑프리를 거머쥔 그는, 루벤 외스틀룬드와 함께 칸이 주목하는 북유럽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외스틀룬드의 냉소적 풍자와 달리, 쿠오스마넨의 카메라는 따뜻하다. 자동차 불빛과 가로등이 공간 안으로 스며드는 장면들!... 그의 영화는 차가운 북유럽의 풍경 속에서도 인간적 온기를 찾아낸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실제로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촬영했다는 사실이다. 스튜디오 세트가 아니다. 러시아 국영 철도청에서 빌린 1990년대식 열차를 실제 선로 위에서 달리게 하여 찍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쿠오스마넨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스튜디오나 실제 움직이는 기차 중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기차죠. 스튜디오는 지루해요." 촬영 감독 JP 파시는 다큐멘터리 작가 출신답게 통제된 이미지보다 현실이 주는 것을 선호했다.
하루 열두 시간씩 기차를 타고 러시아를 돌며 촬영했다. 어떤 날은 시골 풍경을, 어떤 날은 도시 건물을 배경으로 담기 위해 노선을 짰다고 한다. 밤 장면들만 기차 격납고에서 촬영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공간의 협소함이었다. 감독은 배우들과 같은 칸에 있을 수 없었다. 모니터로만 연출해야 했는데, 쿠오스마넨은 이를 싫어했다고 한다. "배우들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고 싶은데, 모니터에서는 프레임 안의 물체처럼 대해야 했어요."
촬영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러시아 북부에서 찾아왔다. 해변에서 두 사람이 걷는 장면을 찍으려던 중, 점심시간에 갑자기 극심한 눈보라가 몰아쳐서 텐트들이 날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쿠오스마넨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너무 장관이어서 뭔가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촬영 감독과 배우들도 동의했다. 그렇게 탄생한 장면이 바로 암각화를 보고 돌아오는 설원 장면이다!
각본에는 없던 장면이었다. 자연이 준 선물이었다. 쿠오스마넨의 말처럼 "영화의 창의성은 사전에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발휘하는 것"이 라는 게, 영화를 보면 저절로 느껴진다.
러시아 기차의 황록색, 희미한 조명, 창밖으로 스며드는 빛!... 이 모든 것이 90년대 후반의 러시아의 질감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쿠오스마넨은 로사 릭솜의 소설을 2011년 출간 당시 읽었다. 하지만 처음엔 망설였다. "소설은 영화로 만들 잠재력은 있었지만, 너무 많은 걸 덜어내야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라고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기차를 탈 때마다, 특히 러시아에 있을 때마다 이 책이 생각났어요. 다시 읽었고, 이 이야기가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감독에게는 오랜 꿈이 두 가지 있었다. "기차에서 영화를 찍는 것", 그리고 "러시아에서 영화를 찍는 것"이 그것인데, 이 소설은 두 꿈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기회였다.
영화는 라우라의 전 연인 이리나를 통해 '사랑의 허구'를 드러낸다. 문학 교수인 이리나는 지적이고 우아하다. 좋은 아파트에서 파티를 열고, 문화적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이 관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우라는 이리나의 세계에서 늘 주변에 있었다. 파티의 구경꾼, 조연. 권력의 비대칭성이 사랑처럼 포장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리나가 여행을 취소하고, 라우라의 전화를 건성으로 받는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이를 통해 말한다. 세련됨이 곧 사랑은 아니라고.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 거칠고 혼란스러운 이 시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료하라는 인물 자체가 이 시대의 메타포다.
예측 불가능하고 불친절하지만, 묘하게 진실한. 포장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믿을 수 있는. 모스크바발 무르만스크행 기차가 느리고 불편하지만 확실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듯이.
반면 이리나는 세련된 모스크바 문명의 상징이다. 아름답지만 피상적이고, 따뜻해 보이지만 실은 차갑다.
라우라가 같은 핀란드인에게 캠코더를 도둑맞는 순간, 관객은 라우라의 상실을 걱정한다. 이리나와의 추억이 다 담긴 물건이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는 이를 상실이 아닌 해방으로 그린다. 기록된 과거를 잃음으로써 라우라는 비로소 현재를 살게 된다. 렌즈 너머가 아닌 맨눈으로 료하를 보기 시작한다.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의 가치. 이것이 영화의 핵심 테마다. 그것은 사진으로 남길 수 없지만 가슴에 새겨지는 순간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들이라고나 할까.
원작 소설에서는 몽골행 열차가 배경이었다. 쿠오스마넨 감독은 이를 무르만스크행으로 바꾸고, 캐릭터들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
더 중요한 변화는 로맨스의 온도다. 원작이 여행의 고단함에 집중했다면, 영화는 그 안에서 싹트는 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이것은 판타지가 아니다.
영화는 해피엔딩을 약속하지 않는다. 료하와 라우라가 다시 만날 거라는 암시도 없다. 대신 영화가 말하는 건 이거다. 짧은 순간의 진심이 오랜 시간의 거짓보다 낫다는 것.
이것이 로맨스 영화의 새로운 정직함이다!
많은 이들이 <비포 선라이즈>와 비교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이 떠올랐다. 예정했던 것과는 다른 혼자만의 여행, 그러다가 우연한 동행, 그리고 마지막에 목격하는 상징적 장면까지!...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녹색광선"의 여주 델핀이 일몰의 녹색 섬광을 기다렸다면, 라우라는 설원 속 고대 암각화를 기다린다.. 둘 다 기다림의 끝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것까지 유사하지 않나.
하지만 "6번 칸"은 로메르의 녹색광선보다 더 투박하다. 더 거칠다. 그래서 오히려 더 진실하다. 로메르의 영화가 "프랑스 여름 휴양지의 세련된 멜랑콜리"라면, 이 영화는 "시베리아 설원의 날것:과 같은 온기라고나 할까.
건설 노동자 료하는 전형적 로맨틱 히어로의 정반대 인물이다. 술 마시고, 거칠게 말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라우라가 "엿먹어"를 "사랑해"로 가르쳐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료하의 진심이 드러난다. 라우라를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행동력. 암각화 앞에서 그녀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섬세함까지!
료하는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체다. 이것이 이리나와의 결정적 차이다.
영화의 절정은 암각화를 보러 가는 장면! 이리나와 함께였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여정이다. 겨울엔 통행 금지였고, 료하의 인맥이 없었다면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도 없이 고대의 암각화 앞에 선 라우라! 이 경험은 오롯이 그녀만의 것이 된다. 누구에게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영원히 기억될 순간...
흥미롭게도 영화는 암각화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료하가 "이게 다냐?"라고 묻자 라우라는 "이게 다예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설원에서 함께 뛰논다.
암각화는 어쩌면 시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은 완벽했다. 목적은 실망스러웠지만, 과정은 충만했듯이... 라우라가 찾던 건 고고학적 유물이 아니라 료하와의 이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암각화는 료하의 은유가 아닐까?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지만 가슴에 새겨진 이미지이며 누구에게 자랑할 수 없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더욱!
추운 겨울날 독한 위스키를 마시면 목은 칼칼하지만 몸은 따뜻해진다. "6번 칸"이 그런 영화다.
거친 표면 아래 숨은 따뜻함. 불친절해 보이지만 결국 마음을 녹이는 온기. 감상적이지 않지만 가슴을 뜨겁게 하는 영화.
마지막 장면, 라우라의 얼굴에 비치는 후광 같은 빛. 그 빛은 료하가 준 사랑의 온도가 아닐까? 증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온기 말이다...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한다. 료하와 라우라는 헤어진다. 다시 만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6번 칸에서의 시간은 라우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머문다. 암각화처럼.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지만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미지처럼.
쌀쌀한 계절이 되면 이 영화가 생각난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온기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여행이라는 것을 영화는 가르쳐준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랑인가, 우정인가, 동료애인가?
라우라는 동성 연인이 있는 사람이다. 료하와의 관계는 전형적인 이성애 로맨스의 틀에 맞지 않는다. 택시 안에서 다정히 머리를 맞대고 자고, 설원에서 함께 뛰놀지만, 그들의 감정은 어느 한가지로 규정되지 않는다.
키스 한 번, 끝까지 모호한 감정선. 하지만 이 모호함이야말로 진짜 인간관계의 본질이 아닐까. 사랑과 우정의 경계는 생각보다 불분명하고, 그 불분명함 속에 가장 진실한 연결이 존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증명할 수 있는 사랑과 증명할 수 없는 사랑 중, 어느 것이 더 진짜인가? 명확하게 규정된 관계와 모호하지만 진심 어린 관계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라고!...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멋진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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