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르레기 한 마리가 날아오르다
로저 미첼 감독의 2021년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제목에 먼저 시선이 멈췄다. '완벽한 가족'이라니. 안락사를 다룬 영화에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건 반어법이었다. 원제 'Blackbird'가 오히려 더 직접적이다. 검은 새, 찌르레기. 작지만 두려움 없이 비상하는 새. 그게 바로 수잔 서랜든이 연기한 릴리였다.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 건 배우도 대사도 아닌 음악이었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이 흐르는 순간, 화면은 아직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이미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적인 선율과 격렬한 선율이 교차한다. 평온과 혼돈. 받아들임과 거부. 릴리 안에 공존하는 모순된 감정들이 음표 하나하나에 녹아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음악이 결코 감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기도처럼, 조용히 흐를 뿐이다.
많은 영화가 음악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려 든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바흐의 첼로가 천국의 문 앞에서 연주되는 것 같은 절제된 아름다움. 그게 릴리라는 인물의 품격과 정확히 일치했다.
릴리네 가족은 가을에 크리스마스를 연다. 계절에 맞지 않는 이 축제는 이상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딸들은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장식을 하고, 캐럴을 튼다.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을까. 생일을 일주일 앞당기거나, 새해를 미리 맞이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릴리는 그렇게 한다. 크리스마스를 당기고, 자신의 마지막 날도 당긴다. 이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다. 그런데 가족들이 그 크리스마스를 함께 즐기는 순간, 그들은 이미 릴리의 또 다른 선택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우회적으로, 아주 부드럽게 관객을 준비시킨다.
케이트 윈슬렛과 미아 와시코브스카가 연기한 두 딸. 이들의 관계는 편안하지 않다. 언니는 완벽주의자처럼 보이고, 동생은 최근 자살을 시도했다. 표면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 아래는 금이 가 있다.
'완벽한 가족'이라는 제목의 아이러니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들은 완벽하지 않다. 상처투성이고, 서로에게 미안하고, 말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본다.
이 영화가 단순히 안락사 논쟁을 넘어서는 지점이 여기다. 죽음은 남은 자들을 변화시킨다. 릴리의 선택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직면해야 하는 시험이다.
"내가 선택한 거야. 내 마지막 선택을 막아서지 말아 줘!"
릴리의 이 대사를 들으며 나는 불편했다. 동의하기도, 반대하기도 어려운 명제 앞에 선 기분이었다.
릴리는 한쪽 팔을 쓸 수 없고, 곧 호흡도 불가능해진다. 기계에 의존해 살아가는 미래를 거부한다. 그녀에게 그건 삶이 아니다. 그런데 누가 그 기준을 정할 수 있을까.
영화는 다만 릴리라는 한 사람의 결단을 담담히 따라갈 뿐이다. 찬성도 반대도 아닌, 그저 경청하는 태도로.
미국에서 안락사는 불법이다. 그래서 릴리가 약을 먹으면 남편 폴(샘 닐)은 911에 전화해서 "산책 나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기로 약속한다.
이 거짓말의 무게를 생각해 본다. 평생을 함께한 아내가 죽음을 택하는 순간, 남편은 법을 어기면서까지 그녀의 뜻을 지켜준다. 이건 단순한 공범 관계가 아니다. 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사랑의 영역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죽음을 법으로 관리하려 한다. 언제, 어떻게, 누가 죽을 수 있는지를. 그런데 릴리와 폴은 그 법 너머에서 서로를 선택한다. 제도와 윤리 사이, 그 좁은 틈에서 가족이 내리는 결정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이 영화는 조용히 증언한다.
릴리의 마지막 순간, 두 딸은 침실 밖에서 문을 지킨다.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어준다.
이 장면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죽음을 '함께한다'는 건 무엇일까.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손을 잡아주는 것? 아니면 그저 곁에 머무는 것?...
딸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막지도, 방해하지도 않는다. 동의한다기보다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선다. 이건 일종의 증인이 되어주는 행위다. "당신의 선택을 우리가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족이란 결국 서로의 선택을 증명해 주는 사람들 인지도 모른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 순간을 함께 견디는 것. 그게 사랑의 한 형태라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내 절친과 남편이 사랑하는 게 어떻게 괜찮냐고? 그 덕에 내가 갈 수 있는 거야!"
릴리의 이 대사는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편과 절친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릴리는 평온하다. 아니, 오히려 감사해한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릴리가 가족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자신이 떠난 뒤 남편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릴리는 자신의 죽음이 남긴 사람들에게 죄책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바라기 때문에...
보통의 드라마라면 이 삼각관계를 갈등의 중심에 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죽음 앞에서 인간관계의 형태가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는지, 사랑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보여준다.
딸들이 침실 문 앞을 지킨다. 릴리가 약을 먹고 잠든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극적인 클라이맥스 없이 조용히 끝난다. 남은 사람들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슬픔을 안은 채로.
이 담담함이 오히려 더 강렬하게 남았다. 죽음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할 순간이라는 것!...
나이가 들면 이 영화를 다시 볼 것 같다. 그때는 지금과 다른 감정으로 볼 것이다. 어쩌면 릴리의 선택이 더 깊이 이해될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당기는 것에 대한 찬반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살아내려는 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 그게 이 영화가 나에게 남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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