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리뷰

by 필름과 펜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Film #51)

common (4).jpg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와 딸(줄리엣 비노쉬)

"엄마, 이 책에는 진실이라고는 없네요."


딸 뤼미르가 회고록을 내던지며 말한다. 전설적 여배우 파비안느가 쓴 자서전은 거짓투성이다. 함께 있던 추억은 날조되었고, 중요한 사람들은 지워졌으며,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거짓말이 아니다. 문제는 파비안느가 왜 거짓말을 썼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설명할 생각조차 없다는 것이다.


배우는 거짓말할 권리가 있는가


"난 배우라서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 진실은 전혀 재미없거든."


파비안느의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배우는 거짓을 연기하는 사람이다. 무대 위에서 거짓 감정을 진짜처럼 표현한다. 그렇다면 무대 아래에서도 거짓말할 권리가 있는 걸까?

common (5).jpg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배우들과 함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던지는 질문은 더 날카롭다. 배우라는 직업이 한 인간의 진실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파비안느는 평생 다른 사람이 되는 훈련을 받았다. 카메라 앞에서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재능이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꺼진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연기하고 있는 걸까?


영화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어쩌면 파비안느에게는 연기와 진실의 경계 자체가 흐릿한지도 모른다는!...


회고록이라는 자기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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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느의 회고록은 객관적 기록이 아니라 자기 연출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작품처럼 편집했다. 불편한 장면은 삭제하고, 미흡한 부분은 각색하고, 원하는 이미지를 창조했다.


이것은 거짓말일까, 예술일까?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의 편집자다. SNS에 올리는 사진을 고르고, 이력서에 쓸 경력을 선별하고, 타인에게 보여줄 자아를 연출한다. 파비안느가 한 일은 이것을 조금 더 대담하게, 조금 더 노골적으로 했을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편집에서 지워진 사람들이다. 40년을 함께한 매니저는 한 줄도 없다. 가장 친했던 배우 사라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파비안느의 자서전에서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을 지운다는 것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파비안느는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지웠다.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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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사라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언급된다. 파비안느와 뤼미르, 두 사람 모두에게 사라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뤼미르에게 사라는 엄마가 주지 못한 사랑을 준 사람이었다. 차갑고 일에만 몰두하는 엄마 대신, 사라는 어린 뤼미르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엄마의 친구가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다.


파비안느에게 사라는 무엇이었을까? 친구? 라이벌? 경쟁자? 영화는 파비안느가 감독과 관계를 맺어 사라의 역할을 빼앗았다고 암시한다. 그 후 사라는 죽었다.


뤼미르는 엄마가 사라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직접 죽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비안느의 배신이 사라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믿는다.


영화가 교묘한 것은, 이것이 사실인지 뤼미르의 해석인지 명확히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라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파비안느가 정말 역할을 빼앗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뤼미르가 그렇게 믿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모녀 관계 전체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뤼미르가 전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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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르가 자신의 딸 샤를로트를 대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그녀는 놀랍도록 다정하다. 항상 아이의 높이에 맞춰 앉아서 대화하고, 아이의 말을 경청하고, 아이를 안아준다.


이것은 뤼미르가 어릴 적 받지 못한 사랑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사라가 어린 뤼미르에게 주었던 사랑이기도 하다.


뤼미르는 엄마를 복제하지 않았다. 엄마의 친구를 복제했다. 그녀는 파비안느의 딸이 아니라 사라의 딸이 되려고 한다. 혈연의 어머니를 거부하고 정서적 어머니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평생 탐구해 온 주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가족이란 혈연이 아니라 선택이다. 진짜 부모는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사랑을 준 사람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뤼미르는 사라를 선택했지만, 사라는 이미 없다. 그녀는 죽은 사람의 사랑을 재현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인가!...


영화 속 영화: 늙지 않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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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느가 출연하는 SF 영화 "내 어머니의 추억"은 메타적 장치다. 병 때문에 우주에서 살아야 하는 엄마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지구로 돌아온다. 하지만 엄마는 늙지 않는다.


딸은 17세에서 38세가 되고, 마침내 73세가 된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젊다. 딸은 늙어가지만 엄마는 영원히 아름답다.


이것은 명백히 파비안느와 뤼미르의 관계를 반영한다. 파비안느는 전설적 여배우다. 스크린 속에서 그녀는 늙지 않는다. 과거의 영화를 보면 젊고 아름다운 파비안느가 영원히 그곳에 있다.


하지만 뤼미르는 늙는다. 평범한 인간처럼. 스크린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영화 속 73세 딸을 연기하는 파비안느.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강렬하다. 실제로는 엄마 역할의 배우가 훨씬 젊지만, 스크린 속에서는 늙은 딸이 젊은 엄마를 맞이한다.


파비안느는 왜 이 역할을 수락했을까? 늙은 딸을 연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노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엄마가 아니라, 결국 늙어가는 딸의 역할을.


이것은 파비안느의 변화를 암시하는가? 아니면 단지 좋은 역할이어서 받아들인 것일까?


마농, 혹은 사라의 환생

common (13).jpg 마농 역의 "마농 끌라벨"

젊은 배우 마농은 사라를 닮았다고 평가받는다. 차세대 사라. 파비안느는 마농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에 출연했다.


파비안느가 마농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질투, 그리움, 죄책감. 그녀는 마농에게서 사라를 본다. 젊고 재능 있고, 자신이 빼앗지 않았더라면 더 빛났을 사라를.


파비안느가 사라의 옷을 마농에게 주는 장면. 이것은 상징적 계승이다. 파비안느는 마농을 사라의 후계자로 인정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용서를 구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농은 사라가 아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다. 파비안느는 마농을 보며 사라를 재현하려 하지만, 그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또 다른 착취로 볼 수도 있다. 산 사람을 죽은 사람의 그림자로 만드는 것이므로...


행크의 침묵, 혹은 가장 현명한 대처

common (14).jpg 행크 역의 "에단 호크"

미국 배우 행크는 프랑스어를 거의 못 한다. 파비안느가 2시간 동안 프랑스어로 넋두리를 하는데, 그는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그냥 듣는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지혜로운 순간이다. 행크는 파비안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녀가 말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한다. 때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뤼미르는 엄마의 말을 모두 이해한다. 프랑스어도 완벽하고, 엄마의 맥락도 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상처받는다. 이해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


행크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파비안느를 시어머니가 아니라 말이 필요한 한 인간으로 대한다.


이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통찰이다. 가족이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믿음이 오히려 독이 된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너무 많이 기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에게 가장 잔인해진다.


때로는 낯선 사람의 무지가 가족의 이해보다 더 큰 위로가 된다.


거북이 피에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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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느는 손녀에게 거북이 피에르가 사실은 할아버지라고 말한다. 마법으로 거북이가 되었다고. 손녀는 믿는다.


이것은 순수한 거짓말이다. 악의도 없고, 목적도 없는. 그냥 상상력을 자극하는 놀이 같은 거짓말.


하지만 뤼미르에게 이것은 또 다른 거짓말일 뿐이다. 엄마는 평생 거짓말을 해왔다. 회고록도, 관계도, 기억도 모두 거짓으로 채웠다. 이제 손녀에게까지 거짓말을 가르치는가?


하지만 아이는 행복하다. 할아버지가 거북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슬픔을 마법으로 바꾼다. 죽음을 변신으로, 상실을 모험으로.


이것은 예술이 하는 일이 아닌가? 진실을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진실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


어쩌면 파비안느의 모든 거짓말에는 이런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실이 너무 아프니까, 조금 덜 아픈 버전을 만드는 것은 아닐는지...


파비안느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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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느는 감독에게 한 장면을 재촬영하자고 요구한다. 73세의 나이에도 완벽한 연기에 대한 욕심은 식지 않았다.


이것은 파비안느의 본질이다. 그녀는 배우다. 엄마보다, 친구보다, 인간보다 먼저 배우다. 인생의 다른 장면은 망쳐도 영화 장면만은 완벽해야 한다.


뤼미르는 이것을 이기심이라고 본다. 딸에게는 무관심하면서 연기에만 집착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파비안느가 선택한 삶이다.


모든 예술가는 선택한다. 예술과 인간관계 사이에서. 완벽한 작품과 완벽한 가족 사이에서. 파비안느는 예술을 택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딸의 원망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는다. 파비안느의 선택은 잘못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다만 그 방식이 남긴 상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고록에 없는 진실: 파비안느의 외로움


매니저가 그만두겠다고 할 때, 파비안느는 당황한다. 40년을 함께한 사람이 떠난다. 회고록에 한 줄도 쓰지 않았던 사람.


파비안느는 매니저를 설득한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파비안느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이해한다.


전설적 여배우, 모두가 아는 얼굴, 화려한 경력. 하지만 정작 그 옆에 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남편은 떠났고, 친구는 죽었고, 딸은 미국에 있다.


파비안느가 중국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는 장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했다. 옆 테이블에서는 중국 가족이 행복하게 기념일을 축하한다. 파비안느는 그들을 본다.


그녀의 얼굴에 무슨 감정이 지나가는가? 부러움? 후회? 아니면 단지 관찰? 우리는 알 수 없다. 까뜨린느 드뇌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본다.


이것이 파비안느의 진실이다. 회고록에는 화려한 경력과 성공담만 가득하지만, 정작 그녀의 인생은 고독하다. 선택의 대가라고나 할까!...


뤼미르가 용서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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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끝, 뤼미르는 엄마에게 말할 대사를 써달라고 요청받는다.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파비안느가 할 말을 대신 써주는 것.


뤼미르는 쓴다. 엄마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을. 엄마가 느끼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이것은 용서의 시작이다. 뤼미르는 엄마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엄마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엄마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파비안느는 뤼미르가 쓴 대사를 읽는다. 연기하듯. 하지만 그 연기 속에 진심이 있다. 연기와 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화해라고 생각되었다.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럼에도 함께 있는 것!...


마지막 질문: 파비안느가 천국에서 듣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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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손녀 샤를로트가 묻는다. "할머니가 우주선 타시면 좋겠어요. 그럼 제가 배우가 된 모습을 보실 수 있잖아요."


파비안느가 천국에서 돌아와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아마도 좋은 엄마였다는 칭찬이 아닐까?


파비안느는 좋은 배우였다. 성공한 배우였다. 전설적 배우였다. 하지만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회고록에 거짓으로 행복한 모녀 관계를 쓴 이유도 어쩌면 이것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했으니, 적어도 책 속에서라도 좋은 엄마이고 싶었던 것.


하지만 영화는 이것도 거부한다. 샤를로트는 "배우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행복한 모습"이 아니라. 파비안느의 손녀는 파비안느처럼 배우가 되려 한다.


하늘을 보는 이유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족들이 모두 하늘을 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특유의 엔딩이다.


왜 하늘인가?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다. 답도 없고, 해결책도 없다. 그냥 하늘.


하지만 그래서 의미 있다. 인생의 모든 질문이 답을 갖는 것은 아니다. 파비안느는 왜 그렇게 살았는가? 뤼미르는 엄마를 용서했는가? 사라는 정말 파비안느 때문에 죽었는가?


우리는 모른다. 영화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하늘을 본다.


이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지혜다. 인생은 해결되지 않는다. 갈등은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함께 하늘을 보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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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가장 교묘한 점은 배우론과 가족 이야기를 겹쳐놓은 것이다.


파비안느는 배우다. 거짓을 연기한다. 하지만 그 거짓 속에 진심을 담는다. 관객은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동한다. 가짜 눈물에 진짜로 운다.


파비안느의 회고록은 거짓이다. 하지만 그 거짓 속에 파비안느의 진심이 있다. 좋은 엄마이고 싶었던 마음, 딸과 행복했기를 바라는 소망.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형태의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배우가 자신과 비슷한 배우 역할을 연기할 때,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다.


이 영화는 완벽하지 않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일본 영화들에 비하면 깊이가 얕다는 평가도 있다. 프랑스라는 낯선 문화, 외국어 대사, 일본 배우가 아닌 할리우드 스타들이 출연한다는 특별함이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여전히 중요하다. 진실과 거짓, 연기와 진심, 예술과 인생.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지우는 상처들!...


완벽하지 않지만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고 그래서 인상적이었던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