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도 '안토니아 브리코'라는 여성 지휘자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라모폰지(誌)가 선정한 역대 위대한 지휘자 50인. 그 목록에서 여성은 마린 알솝 단 한 명뿐이다. 수십 명의 남성 지휘자들 사이에서 겨우 한 자리. 그마저도 최근에야 이루어진 일이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여성이 지휘봉을 잡지 못했던 게 아니다. 잡았지만 기억되지 않은 것이다.
안토니아 브리코는 1930년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최초의 여성이었고, 1934년 여성으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창단했으며, 1938년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한 첫 번째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녀를 지웠다.
"지휘자"를 뜻하는 ("The Conductor": 지휘자), "마리아 피터스" 여성 감독의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워진 이름을 스크린 위에 불러내는 영화다.
1926년 뉴욕, 콘서트홀 좌석 안내원으로 일하며 지휘자를 꿈꾸는 '윌리'. 어느 날 공연 중 악보를 들고 맨 앞자리에 간이 의자를 놓고 앉는 당돌한 행동 등으로 해고당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이후 자신이 입양아임을 알게 된 그녀는 '안토니아 브리코'라는 본명을 되찾고 네덜란드와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국립 음악원 지휘 클래스에서 수학하며 베를린 필하모닉 데뷔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여성 심포니를 창단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삶의 고비마다 음악이 흐르고, 그 음악 사이사이에 사랑과 우정과 각성이 교차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대사보다 음악이 먼저 말한다는 점이다.
말러 교향곡 4번이 흐르는 도입부에서 안토니아가 악보를 품에 안고 홀로 앉는 장면,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2악장 '고잉 홈'이 그녀의 갈등을 대신 표현하는 순간, 엘가의 '사랑의 인사'로 마무리되는 엔딩까지.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안토니아의 내면을 직접 통역하는 언어로 기능한다.
클래식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각 장면에서 선곡된 작품이 얼마나 정교하게 감정의 결을 따라 배치되었는지 발견하는 재미를 얻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도 이 음악들은 충분히 감각적으로 전달된다. 오히려 장르를 초월하는 영화의 힘이 여기에 있다.
극 중, "지휘자가 되고 싶다"라는 안토니아의 말에 파티 손님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게 강렬한 순간 중 하나다.
어처구니없다고 비웃는 사람들은 악인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시대의 상식을 내면화했을 뿐이다. 여성이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들!...
영화 '더 컨덕터'는 차별을 히스테리컬 하게 고발하지 않는다. 대신 그 차별이 얼마나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억압은 항상 괴물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웃음, 침묵, 관행, 무관심의 얼굴로 온다. 이것이 이 영화의 탁월한 지점이다.
안토니아의 친구 로빈이 사실은 여성임이 밝혀지는 장면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다. 더블베이스를 연주하고 싶어서 남성으로 위장해야 했던 로버타의 이야기는, 음악계의 성차별이 지휘봉 하나의 문제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무대 위에서 악기를 드는 일조차 성별이 검문소가 되는 세계. 안토니아가 싸워온 벽이 얼마나 두텁고 넓은지, 로빈의 존재가 조용히 증언한다.
극 중, 안토니아는 사랑을 포기하고 음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사랑과 음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결국 음악을 놓지 않았다.
그 차이는 중요하다. 영화는 그녀를 냉철한 커리어우먼으로 그리지 않는다. 프랭크를 그리워하고, 청혼에 답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그러면서도 지휘봉을 내려놓지 않는 안토니아는 훨씬 더 입체적인 인간이다.
이것은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이중의 증명이기도 하다. 남성 지휘자가 사랑을 선택했는지 음악을 선택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안토니아의 모든 선택은 그 자체로 이미 기록이 된다!...
이 영화가 첫 영화 출연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크리스탄 드 브루인의 연기는 안정적이다. 수개월간 지휘 레슨을 받았다는 후일담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무대 위 장면마다 실감할 수 있다.
그녀는 지휘봉을 드는 순간 다른 사람이 된다. 무대 밖에서는 흔들리고 망설이던 안토니아가, 지휘대에 오르는 순간 어떤 확신으로 빛나는지를 몸으로 표현한다.
전기 영화는 종종 위인전의 함정에 빠진다. 인물을 과도하게 영웅화하거나, 반대로 수난사로만 축소하는 것이다. 마리아 피터스 감독은 이 두 함정을 모두 피한다.
안토니아는 완벽하지 않다. 사랑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현실적 두려움을 느끼며, 때로는 결정을 미루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녀의 용기가 더 빛난다. 두렵지 않아서 하는 선택이 아니라, 두려우면서도 하는 선택이기 때문에.
139분의 러닝타임은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각 장면이 음악과 함께 호흡하며 흐르기 때문에 체감은 다르다.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본래 그러하듯, 이 영화도 서두르지 않는다.
지휘봉은 불과 10그램이다. 무겁지 않다. 체력이 필요한 것도, 특별한 신체 조건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지휘대 위의 사람을 보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왜 여성 지휘자는 여전히 드문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관객의 가슴 한가운데 조용히 놓아두고 퇴장한다.
영화가 끝날 때 흐르는 자막은 담담하다. 안토니아는 평생 상임 지휘자 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것.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구조가 그녀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성 지휘자의 비율은 클래식 음악계 전체에서 여전히 현저히 낮다.
안토니아가 들었던 지휘봉은 그 이후 지휘대에 오른 모든 여성들의 것이기도 하다. 재능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늘 그것을 보는 눈, 그리고 그것을 허용하는 구조였다.
단, 영화에서 프랭크와의 로맨스는 허구라고 하니 그것을 인지하고 감상하도록!
안토니아의 내면이 음악을 통해 충분히 전달되는 반면, 주변 인물들의 서사는 다소 밋밋하다. 프랭크의 로맨스는 극에 온기를 더하지만, 실화가 아닌 허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또한 역사적 맥락—1930년대 클래식 음악계의 구체적인 작동 방식—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배경 지식이 없는 관객은 차별의 구조적 심각성을 온전히 체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일부 장면에서는 갈등이 다소 도식적으로 해소되어 극적 긴장이 충분히 유지되지 않는 아쉬움도 있다.
영화 '더 컨덕터'는 말러와 드보르작 그리고 엘가 음악 사이에서, 한 여성이 세상을 향해 지휘봉을 들어 올리는, 장르적으로는 전기 드라마이나 그 본질은 기록이다.
잊힌 이름을 기억하는 것. 당연하게 여겨진 장벽을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 말을 음악으로 하는 것. 영화 '더 컨덕터'는 그 조용하고 단단한 방식으로 오래 기억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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