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는 존재와 들을 줄 모르는 세상
마크 터틀타웁은 블록버스터의 언어를 쓰지 않는 감독이다.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2006), 세이프티 낫 개런티드(2012), 페어웰(2019),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2019) 등을 제작했고, 연출가로도 같은 결을 이어간다. 거대한 사건보다 그 사건이 작은 삶에 스며드는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시선이다.
영화 "줄스"는 퍼즐(2018)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UFO가 등장하고 외계인이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SF가 아니라고 본다. 외계인은 도구이고, 진짜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있다. 터틀타웁은 화려한 소재를 고요한 드라마로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절제된 시선으로 인간 내면의 정서를 조명한다는 것, 그것이 이 감독의 언어다.
밀턴은 79세다. 아내와는 사별했고, 아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딸 데니스가 가끔 들르지만, 그것은 애정보다 감시에 가깝다. 욕실 캐비닛에서 통조림을 발견한 딸은 아버지를 치매 초기로 의심한다. 밀턴의 말은, 그가 존재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매주 시의회에 참석해 건의사항을 제출한다. 새 횡단보도, 마을 표어 수정. 사소해 보이는 요구들이다. 그러나 시의회는 번번이 그의 발언을 흘려듣는다. 노인의 목소리는 의제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지역 행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노년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다.
샌디와 조이스도 다르지 않다. 세 사람은 모두 고립되어 있고, 외롭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 샌디의 딸은 3년째 연락을 끊었다.
조이스는 과거의 트라우마 속에 혼자 살아간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어느 날 밤, 밀턴의 뒷마당에 우주선이 불시착한다. 외계인이 쓰러져 있다.
밀턴은 즉시 911에 신고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 시의회에도 알린다. 역시 묵살된다. 딸에게 전화한다. 받지 않는다. 결국 그는 혼자 외계인을 집 안으로 데려와 담요를 덮어주고, 물을 주고, 사과를 잘라 내민다. 외계인은 사과만 먹는다.
이웃 샌디가 먼저 눈치챈다. 놀라지만, 이내 받아들인다. 마치 딸을 대하듯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샌디는 외계인에게 이름을 붙인다. 줄스. 그게 영화 제목이 되었다.
조이스도 합류한다. 세 노인은 함께 줄스를 돌본다. 줄스는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을 읽고, 감정을 느끼고, 교감한다. 샌디가 강도에게 목이 졸릴 위기에 처했을 때, 줄스는 먼 곳에서 그것을 초능력으로 감지하고 강도의 머리를 폭발시켜 그를 구한다. 이 사건이 NSA(미국 국방부 소속 국가안보국)의 레이더에 잡히면서 정부는 본격적으로 추적을 시작한다.
NSA가 줄스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세 사람은 결정을 내린다. 줄스를 안전하게 떠나보내자고. 우주선에 올라탈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남았다. 아무리 서로 소원해도, 자식들이 지구에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줄스가 떠나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 사람이 그를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줄스는 말을 못 한다. 그러나 줄스는 가장 잘 듣는다.
밀턴의 반복되는 일상, 샌디의 오랜 상처, 조이스의 감춰진 슬픔. 줄스는 이 모든 것을 말없이 받아들인다.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곁에 있는다. 세 노인이 줄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삶에서 그런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역설적인 구조를 갖는다. 가장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존재, 즉 언어조차 공유하지 않는 외계인이, 가장 깊은 교감을 이끌어낸다. 반대로, 가족이고 이웃이고 행정기관이라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소통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감독은 그것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줄스'가 진짜 건드리는 것은 노년의 고독이다. 밀턴, 샌디, 조이스는 사회적으로 거의 투명인간에 가깝다. 그들의 발언은 흘려지고, 그들의 경험은 치매의 증거로 처리되며, 그들의 감정은 노인성 과민으로 해석된다.
줄스가 뒷마당에 불시착했을 때 밀턴이 신고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장면은 노인의 말은 사회적으로 신뢰받지 못한다는 현실의 반영이다. 가장 놀라운 진실을 말해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노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된다. 시의회 장면과 911 신고 장면이 같은 맥락 위에 놓이는 이유다.
세 사람은 줄스와 함께 우주선에 올라탔다.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왔다. 연락도 잘 안 되는 자식들이 지구에 있다는 이유로.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깊은 대목이다. 부모의 사랑은 방향이 없다. 자식이 외면해도, 자식이 멀어져도, 부모는 그 자식이 숨 쉬는 곳에 남는다. 거창한 대사 없이 이 진실을 전달하는 방식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벤 킹슬리는 아카데미 수상 경력을 가진 배우다. 그가 밀턴을 연기하는 방식은 과장이 없다.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 조금씩 흐려지는 기억,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예의와 품위. 밀턴은 우스꽝스럽지 않다. 불쌍하지도 않다. 그는 그냥 한 사람이다. 오래 살아온, 많은 것을 잃은, 그러나 여전히 타인을 환대할 줄 아는 사람!...
킹슬리의 연기는 시의회 장면에서 빛난다. 매번 무시당하면서도 다음 주에 다시 나타나는 밀턴. 그 반복 속에서 우스움과 연민이 동시에 솟아오른다. 그것은 연출이기도 하지만, 배우의 섬세함이기도 하다.
샌디와 조이스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외로움을 품고 있다. 샌디는 밝고 수다스럽지만, 그 명랑함은 아픔을 덮는 껍데기다. 조이스는 날카롭고 직선적이지만, 그 안에 오래된 슬픔이 있다. 두 배우는 이 차이를 자연스럽게 살려낸다.
세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줄스를 위해 고민하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심장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 과정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세 사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이렇게 따뜻하게 구현되기도 한다.
줄스 역의 제이드 콴은 매번 4시간의 특수 분장을 소화했다. 그리고 그 무거운 분장 안에서 단 한 마디의 대사 없이 감정을 전달한다. 눈빛, 고개의 기울기, 손의 움직임. 관객이 줄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은, 배우가 표정만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는 존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줄스가 떠나는 순간, 아쉬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는 장면. 그 짧은 순간이 오래 남는다.
터틀타웁 감독은 설명하지 않는다. UFO가 어디서 왔는지, 줄스가 무슨 목적으로 지구에 왔는지, 정부 요원들이 어떻게 되는지. 이 영화는 그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외계인이 아니라 그 외계인을 둘러싼 세 노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촬영은 뉴저지(Boonton 등)에서 이루어졌지만, 영화 속 펜실베이니아의 평범한 거리, 밀턴의 소박한 집, 시의회의 형광등 아래 공간은 완벽하게 설득력 있는 소도시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화려함 없이 일상을 담아내고, 그 일상 안에서 비일상적인 사건을 녹여낸다. SF적 설정을 따뜻한 드라마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이 감독의 솜씨다.
고령화 사회는 통계로 이야기되지만, '줄스'는 개인으로 이야기한다. 밀턴 한 사람, 샌디 한 사람, 조이스 한 사람. 숫자가 아니라 얼굴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여전히 무언가를 바라고, 느끼고, 기억하고, 사랑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과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이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진지하게 묻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실제로 듣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나이를, 그 사람의 조건을 먼저 보고 있는가...
세 노인이 줄스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을 보면서, 관객은 묻게 된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만큼 열려 있는가? 우리는 말 못 하는 존재 앞에서는 판단을 내려놓지만, 말 잘하는 사람에게는 왜 그러지 못하는가.
줄스가 외계인이라는 설정은 이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낯선 존재이기에,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 있다. 그 낯섦이 오히려 진실한 교감의 조건이 된다.
이 영화의 조용한 호흡은 미덕이기도 하지만 한계이기도 하다. 8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이 없는 서사를 원하지 않는 관객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NSA 요원 캐릭터들은 충분히 활용되지 않는다. 긴장 요소로 도입되었지만, 결말에서 허술하게 처리된다. 이 부분은 영화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
SF적 설정의 논리적 완결성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도 이 영화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왜"를 묻지 않는다. "어떻게"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철학이지만, 동시에 호불호를 가를 지점이다.
'줄스'는 소란스럽지 않다. 폭발도 없고, 반전도 없고, 눈물을 강요하는 장면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무언가가 마음에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줄스의 눈빛 때문일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표정. 우리는 그 눈빛을 어디선가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판단 없이 들어주는 누군가를. 나이와 조건과 관계없이 그냥 곁에 있어주는 존재를...
"이 영화는 외계인 이야기가 아니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던 이들이 마침내 들어주는 존재를 만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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