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과 침묵 그리고 세대의 죄
마이클은 한나에게 책을 읽어준다. 호메로스, 톨스토이, 체홉... 위대한 문학이 사춘기 소년의 목소리를 통해 30대 여인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단순한 낭독이 아니다. 책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언어다. 나이 차이, 계급 차이, 경험의 차이를 넘어서는 소통의 통로!
한나는 마이클과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는 걸 더 원한다.
육체적 결합보다 이야기를 통한 정신적 연결이 그녀에게는 더 절실하다.
하지만 책은 동시에 두 사람을 분리한다. 마이클은 읽을 수 있고 한나는 읽을 수 없다. 이 능력의 차이는 권력의 차이다. 문자 해독 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자와 타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 원작의 저자는 작품 의도를 명확히 밝혔다. "전쟁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의 차이를 그려내고 싶었다!"
마이클과 한나는 개인이 아니라, 두 세대의 메타포다. 이것이 이 소설이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이유다.
단순한 금지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독일이라는 국가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의 문맹은 단순한 교육 결핍이 아니다. 이것은 나치 시대 독일인들의 집단적 맹목에 대한 은유다.
그들은 정말 몰랐을까? 유대인들이 어디로 가는지,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굴뚝 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보지 않기로 선택했을까? 알고 싶지 않았을까?
능력이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기. 질문할 수 있음에도 질문하지 않기. 안 보는 걸로 선택한 눈들...
한나는 지멘스 공장에서 승진 제안을 받았을 때, 문맹이 들킬까 봐 SS(나치 친위대)로 자원했다. 개인적 비밀을 지키기 위해 더 큰 죄악의 체계에 들어간 것. 이것은 많은 평범한 독일인들의 선택이었다. 생계, 안전, 체면을 위해...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다.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거대한 악을 가능하게 만든 거였다!
법정 장면은 영화의 핵심이다. 마이클은 법대생이 되었고 전범 재판을 참관하러 갔다가 피고석에 앉은 한나를 발견한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300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해자로 서 있다. 이 순간 마이클의 혼란은 전후 세대 독일인 전체의 혼란이다.
법정은 한 세대가 이전 세대를 심판하는 공간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전쟁을 치른 세대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왜 그랬습니까?" 하지만 심판하는 자들도 불편하다.
판사들, 검사들 중 일부는 나치 시대를 살았다. 그들은 정말 완전히 결백한가? 단지 더 잘 숨겼을 뿐 아닌가? 전후 독일 사회 전체가 이 불편한 질문 앞에 서 있다.
한나와 다른 피고들의 태도 차이가 확연한데, 다른 피고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한나는 다른 피고인들과 다르다. 한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이 무서운 정직함! 회피하지 않고 인정하는 태도! 그런데 이 정직함이 그녀에게 가장 무거운 형을 안긴다. 다른 피고들은 보고서 작성자가 누구였는지 서로 떠넘기지만 한나는 자신이 썼다고 인정한다.
물론 그녀는 쓰지 않았다. 쓸 수도 없었다! 문맹이므로... 하지만 문맹이 들킬까 봐 거짓 자백을 한다.
한나에게 문맹은 전쟁 범죄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300명을 죽인 것보다 글을 못 읽는 것이 더 수치스러울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심리다. 우리는 거대한 추상적 죄보다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결함을 더 부끄러워한다. 전쟁 범죄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희석될 수 있지만 문맹은 오직 "나만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 한나의 세대에는 문맹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계급의 표식이었다. 그녀는 평생 그것을 감추고 살았다. 직장에서, 일상에서, 모든 관계에서,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회로를 택했을까. 얼마나 많은 기회를 포기했을까...
마이클은 법정에서 깨닫는다. 한나가 왜 그렇게 책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는지, 왜 직접 메뉴를 안 보고 자신에게 주문을 시켰는지, 왜 갑자기 떠났는지... 전차검표원이었던 그녀는 사무직으로의 승진이 눈앞에 있었는데 승진으로 인해 서류 작업을 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문맹이 들킬 것이므로 갑자기 떠났던 거였다...
마이클은 이 사실을 법정에 알리지 못한다. 물론 알리게 되면 형량이 줄어들 테지만, 그는 침묵한다. 왜? 한나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안다. 그녀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과 그녀를 구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이 선택이 마이클을 평생 괴롭힌다. 그는 옳은 결정을 했는가? 아니면 비겁했는가?
한나가 수감된 후, 마이클은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
대신 책 내용을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 테이프만 보낸다. 메모 없이...
이것은 냉정하면서도 온정이다. 완전히 버리지 않지만, 감정적으로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한나는 이 테이프로 스스로 글을 배운다. 소리를 들으며 문자를 따라간다. 하지만 읽을 수 있게 되면서 홀로코스트 증언록들을 읽는다. 무지의 보호막이 사라진다. "알게 됨"은... 더 무거운 짐이 된다.
한나의 형기가 끝나간다. 마이클은 그녀를 위해 집을 구한다. 출소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것은 용서인가?
두 사람은 면회실에서 만난다. 오랜만에 대면하는 순간, 한나는 늙었다. 마이클도 중년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한나는 마이클에게 왜 테이프를 보냈느냐고 묻지만 마이클은 명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그도 모른다. 의무감? 죄책감? 아직 남은 애정? 아마 다 섞여있지 않을까?
그리고 한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출소 하루 전, 왜?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지만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밖에 나가도 살 수 없다는 절망,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자각, 마이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혹은 이 모든 것... 자신이 저지른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한나는 유산을 남긴다. 돈이 든 통과 메모. 마이클은 그 돈을 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 전달하러 뉴욕에 간다. 한나의 재판에서 증언했던 생존자를 찾아간다. 그 여성은 작가가 되었고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마이클은 한나의 돈을 전하러 간다.
하지만 생존자는 거부한다. 결국 돈은 유대인 문맹 퇴치 단체에 전달된다.
이 장면은 독일의 집단적 속죄 과정을 보여준다. 독일은 전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이스라엘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책임을 졌다.
하지만 돈으로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가? 물론 돈도 지불하지 않는 국가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은 복구되지 않는다. 배상은 필요하지만 절대 충분하지 않다.
생존자가 돈을 거부한 것은 "어떠한 것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용서는 의무가 아니며 피해자는 가해자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은 없으니까...
영화는 명시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중요한 디테일이 있다. 한나의 유품 중에서 마이클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이 실린 신문 기사가 발견된다...
한나는 마이클을 떠났지만 완전히 떠나지 못했다. 그의 소식을 몰래 추적했다. 신문에서 그의 사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나도 마이클을 사랑했다는 것? 단지 집착? 회한?
마이클 역시 한나를 놓지 못했다. 그는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지만 진정으로 가까워지지 못한다. 첫 아내와도 이혼한다. 딸과도 거리가 있다.
그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한나와의 여름에서 멈춰 있다. 그는 계속 그곳으로 돌아간다. 죄책감, 혼란,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과 함께.
영화의 마지막! 마이클은 어른이 된 딸에게 이야기한다. 한나에 대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 이것은 치유의 시작이라고 나는 생각되었다.
전쟁 세대는 무엇을 겪었는가? 파괴, 폭력, 생존의 절박함...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제한된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의 결과와 평생 살아야 했다.
전후 세대는 무엇을 물려받았는가?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 그들은 부모 세대에게 묻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다.
마이클과 한나의 관계는 이 대화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랑했지만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했다. 나이 차이, 경험의 차이가 너무 컸다. 마이클이 한나를 이해했다고 생각할 때 그는 착각하고 있었다.
재판 장면이 이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원작 저자인 "슐링크"가 영화화가 되는 과정에서 "케이트 윈슬렛"을 적극 추천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역할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역할이 아니었다. 한나는 공감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전범이자 나이 많은 연상녀가 십 대 소년과 성적 관계를 맺는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논란적이다.
그녀는 한나를 괴물로도 희생자로도 그리지 않았다. 그녀를 복잡한 인간으로 연기했다. 강인하면서도 취약하고 냉정하면서도 감정적이며 가해자이면서도 자신의 방식으로 고통받는...
특히 그녀의 신체 연기가 중요하다. 젊은 한나의 당당함과 늙은 한나의 움츠러듦. 법정에서의 경직된 자세와 감옥에서의 굽은 어깨. 말없이 많은 것을 전달한다.
데이비드 크로스는 17~18세 사이의 나이였는데 베드신은 그가 만 18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촬영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제는 중년남이 되었다. 그의 마이클 연기도 섬세했다 욕망, 혼란, 죄책감, 애정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랄프 파인즈는 늙은 마이클로 마지막 1/3에만 등장하지만 존재감이 크다. 그는 평생의 무게를 짊어진 남자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중심적 질문인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했다면?"
마이클은 한나를 사랑했다. 그것은 진실이다. 소년의 첫사랑, 가장 강렬한 감정, 그리고 한나도 그를 사랑했다. 그것 역시 진실이다. 하지만 한나 또한 300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것도 진실이다.
이 두 진실을 어떻게 함께 품을 수 있는가? 마이클의 평생 과제가 이것이다. 그는 한나를 버릴 수도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래서 테이프를 보냈다. 거리를 두고 연결을 유지한다.
이것은 독일 사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부모, 조부모 세대가 끔찍한 일을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다루는가?
완전히 단죄할 수도 완전히 용서할 수도 없다. 그 불편한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 기억하되 증오하지 않고 이해하되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영화는 책에서 책으로 끝난다. 나치 시대보다 오래전에 살았던 작가들의 작품들이 소개가 된다.
책은 정권이 바뀌고 이데올로기가 변해도 존속한다. 인간의 보편적 경험- 사랑, 고통, 도덕적 갈등 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한나에게 읽어준 책들은 모두 도덕적 복잡성을 다룬다. 오디세우스는 영웅이지만 교활하며 체홉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나약함과 자기기만을 탐구한다.
이 책들은 한나와 마이클의 이야기와도 궤를 같이 하는데 가해자, 피해자, 사랑과 죄, 이해와 판단이 뒤엉켜 있다.
이 소설이 독일 고교 교과 과정에 포함된 건 우연이 아니다. 독일은 자국의 과거와 대면하는 것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았으므로...
다른 나라들이 역사의 어두운 면을 축소하거나 회피할 때 독일은 정면으로 다룬다. 모든 학생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배운다. 가해자의 후손으로 책임을 배운다.
"더 리더"는 이 교육에 완벽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흑백논리로 단순화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나를 순수한 악으로 그리지 않고 마이클을 순수한 선으로 그리지 않으며 복잡성을 유지하므로 더더욱...
세 주연 배우의 연기도 빛났고 원작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연출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도 뛰어났던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였다. 정말 이 영화는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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