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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리퀄이자 뮤지컬, 그리고 영화화

2024_48. 영화 <위키드>

by 주유소가맥

1.

<위키드>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원작 소설까지는 모르더라도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공연이 브로드웨이 역대 흥행 톱에 든다고 하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오즈의 마법사>의 프리퀄이지 않는가. 애당초 뮤지컬에 큰 관심이 없는 이역만리 타지의 나 같은 사람조차 알고 있을 정도니 <위키드>의 명성은 높다 못해 압도적일 정도다.


포스트모던이니 뭐니 장르의 구분이 희미해졌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요즘같이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장르의 영화가 극장가를 차지하는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시대에 살수록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몇몇 부류의 영화들은 극장에서 봐줘야 나중에 아쉬움이 없다. 뮤지컬 영화는 과거 헐리웃을 주름잡던 시기가 분명 있었으나 지금은 주류에서 확실히 벗어난 장르다. 게다가 <위키드>는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은 주목할만한 올해의 대형 영화 중 하나였으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말을 어느 정도 납득시켜 주는 만듦새를 보여준다.


2.

영화 <위키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볼거리다. 미술, 소품, CG 등 여러 부분에서 고심한 흔적들이 보인다. 영화 초반 글린다가 방문하는 마을은 세트를 아기자기하게 구성하여 1930년대 뮤지컬 영화의 향수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 일행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마을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 향수가 극대화된다. 본격적으로 극이 진행되는 시즈 대학교는 영화의 스케일을 보여주려는 듯 널찍하고 웅장하게 꾸며놓는데, 과거 영화의 향수에서 현대 영화의 웅장함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세트 구성이 꽤 영리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컴퓨터 그래픽에서는 구현하기 힘든 실제 소품만의 감성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CG에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 말미, 엘파바가 'Defying Gravity'를 부르며 빗자루를 타고 활공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다. 일반관에서 봤음에도 뺨을 스치는 바람의 청량함이 느껴지는 것 같이 시원시원하다. 단순히 소품 혹은 CG를 고집하지 않고 각자 필요한 부분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완성도를 높인다. 오랜만에 소위 '돈 냄새나는' 뮤지컬 영화를 본 것 같아 꽤 만족스러운 기분이다.


3.

뮤지컬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음악인데, 그 부분에서도 큰 만족감을 선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원곡보다 웅장함이 더욱 크게 느껴지도록 편곡을 한 것 같다고 평가하는데, 원작 뮤지컬을 보지 않았기에 원곡과의 직접적인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영화 곡들만 듣더라도 어떤 의도로 그런 감상이 나오는지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애초에 뮤지컬을 했던 신시아 에리보는 당연하고, 아리아나 그란데는 뮤지컬 경험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음에도 자기 몫을 충분히 해낸다. 2시간 30분이 넘어가는 상당히 긴 러닝타임을 환기시켜 주는 것들은 이 곡들이다. 아마 한두 곡만 빠지더라도 영화를 끝까지 감상하는 데 부침을 느꼈을 관객들이 꽤 되었을 것이다.


4.

영화 <위키드>

그냥 <위키드>라는 제목으로 개봉했기 때문에 다른 사전 정보 없이 극장에 방문한 관객들은 영화가 2부로 나뉜다는 것을 몰랐을 수 있다. 나 또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파트가 나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파트를 나누기 위해 맥없이 영화를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아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위키드>는 나름의 완결성을 가지고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앞서 언급한 'Defying Gravity' 부르며 관객들을 충분히 고조시킨 직후 극을 마무리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만약 이후 엘파바가 도착한 어딘가를 보여주며 마무리했다면 굉장한 사족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5.

또한 영화가 던지는 주제나 질문 또한 시의적절하다. 주인공 엘파바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등장인물을 통해 인종과 소수자, 파시즘 등을 굉장히 직관적으로 상정해놓은 것을 쉽게 읽어낼 수 있으며 그들이 핍박받는 과정과 연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사 속에 이에 대한 비판이 아주 직접적으로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점을 마냥 좋다고 얘기하기엔 애매하다. <위키드>가 30여 년 전에 출판된 책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 비판이 지금도 적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한편으론 씁쓸한 부분이다.


6.

아쉬운 점은 영화가 너무 길다. 물론 요즘에야 두 시간은 기본에 그 이상도 훌쩍훌쩍 넘기곤 하지만, 2시간 40분은 그중에서도 더더욱 긴 편이다. 영화가 단순히 길기 때문에 단점이라기보다는, 덜어낼 수 있는 장면들 생각보다 눈에 자주 띈다는 의미다. 뮤지컬과 영화 사이에는 카메라 활용의 유무라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이로 인해 영화가 얻은 시점의 자유를 적극 활용하는 것은 연극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압도적인 장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품이나 액션의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보여주며, 배우들의 감정선을 묘사하기 위해 얼굴만 따로 따기도 한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구현해 놨으니 배경이나 세트 또한 다른 영화들보다 한두 번쯤 더 과시해야 한다. 나쁜 것도 아니고 이해도 하지만, 그런 장면들 중 편집해도 될 부분들이 눈에 띈다. 조금 덜어내고 보다 빠르게 극을 진행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7.

영화 <위키드>

덧붙이는 말로 자막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짚고 넘어갈까 한다. 자막에 관해선 이미 많은 국내 관객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큰 주제는 '파퓰러', '언리미티드' 등 그 의미를 풀이해서 정보를 전달해도 문제가 없을 어휘들을 굳이 음차 한 부분인데, 국내 뮤지컬 공연 시 번안되었던 가사를 참고한 것이 그 이유로 보인다. 아마 자막 번역가의 고심이 컸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가사를 통해 듣는 경험을 재현하며 한국어로 불렸을 때 느낄 수 있는 말맛을 살리는 것과 번안곡이 아니라 원어 곡에 자막을 입힌 이상 음절 수의 한계에서 벗어나 정확한 한국어 정보를 전달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쉽게 고르기 어려운 선지였을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얘기하자면 후자를 따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실 귀로 들었을 때 'popular'라 발음하고 맥락 상으로도 그 뜻의 단어임을 유추할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다만, popular가 어려운 단어가 아님에도 음차 해서 쓸 일은 비교적 적은 단어기 때문에 '파퓰러'라고만 쓰여있을 때 'popular'가 바로 떠오르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다. 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음차와 뜻풀이 사이의 고민은 아마 언어와 대중문화의 개념이 사라지기 전까지 계속 진행될 고민일 것이다.


8.

잘 만든 뮤지컬 영화임은 확실하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개봉 시기도 그렇고, 올해를 흥겹게 마무리할 수 있는 영화를 고민하고 있다면 영화 <위키드>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파트 2를 보기 위해 내년 이맘때쯤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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