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개성, 포용금융을 실천하다

by 늘보박사

새벽이면 개성 장터는 온갖 소리와 냄새로 가득 찼다. 갓 구운 떡 냄새, 소달구지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 행상들의 고함과 주판알이 튕기는 소리까지 뒤섞이며 도시 전체가 깨어났다. 송방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곡식을 머리에 이고 온 농민, 손바닥만 한 돈주머니를 움켜쥔 여성, 일자리를 찾는 젊은 짐꾼, 며칠 전 장사에 실패한 상인까지—누구든 이 줄에 설 수 있었다. 줄 맨 끝에서는 아이들이 뛰놀았고, 국밥집에서 새어 나오는 김이 바람을 타고 흘러 장터를 감쌌다.


오늘날 세계은행이나 IMF, 각국 정부가 내세우는 ‘포용금융(inclusive finance)’은 새로운 화두처럼 들리지만, 200년 전 개성에서는 이미 그것이 일상의 질서였다. 오늘날의 포용금융이 종종 제도 외곽의 보조장치에 머무는 반면, 개성에서는 그것이 금융의 중심 원리였다. 금융은 배제가 아니라 품음으로 작동했다. 신분과 자산이 아니라 신뢰와 평판이 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그 질서 속에서 다시 기회를 얻었다.


1. 열린 장터, 누구에게나 열린 금융


19세기 개성 장터는 단순한 물품 교환의 장소가 아니었다. 금융이 작동하는 열린 광장이었다. 송방 앞에 늘어선 줄은 오늘날 은행 창구와 비슷했지만, 참여자의 폭은 훨씬 넓었다.


농민은 곡식을 송방에 맡기고 어음을 받아 세금을 대신 냈다. 세금을 내는 동시에 금융의 고객이 된 셈이다. 중년 여성들은 한 달에 1냥씩 모아 열 달 뒤 10냥을 받는 식으로 계에 참여했다. 계 모임 날이면 수건에 돈을 싸 들고 와, 장터 구석에 앉아 서로가 낸 돈을 확인하며 목소리를 맞췄다. 단순한 돈의 순환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묶는 사회적 의식이었다.


젊은 짐꾼은 성실히 일하며 신뢰를 쌓아 차인(용어해설 참조)으로 성장했다. 차인은 장부를 필사하고 거래를 대리하는 자리였으며, 일부는 결국 송방 주인으로 독립했다. 나이 든 상인들은 젊은 이들에게 보증을 서주며 신뢰를 전승했다. 장터는 세대와 계층을 넘어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또한 개성은 교통의 요지였다. 여각(용어해설 참조)을 드나드는 외지 손님, 장돌뱅이, 때로는 유학길에 오른 청년도 장터 금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들이라도 개성에서는 줄에 설 수 있었다. 금융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이런 풍경이 조선 전역에서 보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의 장시(場市)에서는 금융 참여가 제한적이었고, 신분이나 자산의 장벽이 높았다. 개성은 예외였다. 수도 한양이 권력과 제도의 중심지였다면, 개성은 상업과 금융의 실험장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포용금융이 가장 발달한 특수한 질서가 자리 잡았다.

2. 계·보증·낙변 — 포용을 가능케 한 장치들


낯선 이조차 금융의 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비밀은 계, 보증, 낙변에 있었다.


계(契)는 성실히 불입만 하면 언젠가 목돈을 쥘 수 있는 회전식 기금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추첨으로 순번을 정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미리 정한 순서대로 돌려 받았다. 모임 날에는 술과 음식을 나누며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단순한 돈거래가 아니라 신뢰를 축적하는 장치였다.


보증은 기존 거래자가 신규 참여자의 신뢰를 대신 서주는 구조였다. 그러나 단순한 서명이 아니었다. 보증이 성립하는 순간, 송방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내가 이 사람을 책임지겠다”는 선언은 곧 공동체 앞에서 평판을 거는 일이었다. 만약 차인이 부도를 내면 보증인은 자신의 체면과 자산을 함께 잃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보증은 도덕적 압력이자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낙변(용어해설 참조)**은 한층 제도화된 방식이었다. 장부에 “○○의 신용은 내가 책임진다”라고 붓으로 적히는 순간, 그것은 법적 문서보다 무겁게 작동했다. 먹물이 번진 글씨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지켜보는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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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장치는 각각 다른 층을 포용했지만, 동시에 서로 얽히며 거대한 신뢰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작은 돈에서 큰 신뢰가, 개인의 이름에서 공동체의 안전망이 만들어진 것이다.


개성상인들은 단순히 이윤을 쫓는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윤은 목표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를 지탱하는 수단이었다. 계와 보증, 낙변 같은 장치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금융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 곧 포용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금융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길이었다. 이윤과 포용은 대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용이 있었기에 이윤도 이어질 수 있었다.


3. 이윤을 넘어선 포용, 실패자도 다시 서다


개성 금융의 포용성은 신규 참여자뿐 아니라, 한 번 무너진 사람에게도 기회를 열어주었다. 장사가 망한 상인도 계에 다시 참여하거나 송방의 잡무를 맡으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몇 해 뒤 그는 소규모 무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개성에서는 실패가 곧 퇴출을 의미하지 않았다. 성실히 책임을 다하면 공동체 안에서 다시 설 수 있었다. 실패 관리와 재기의 구체적 장치들은 별도의 이야기다.



오늘날 금융은 여전히 배제의 문제를 안고 있다. 마이크로크레딧, 소액대출, 신용회복위원회 같은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제도 밖에 머문다. 효율성과 수익성을 우선하는 시스템 속에서 포용은 구호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신용점수와 담보,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오늘의 금융은 여전히 수많은 이들을 문턱 밖에 세운다.


그러나 개성은 달랐다. 여성도, 서민도, 실패자도 금융의 주체였다. 작은 계, 평판 보증, 두 번째 기회—이 단순한 장치들이 금융의 문을 열었다. 개성의 실험은 우리에게 묻는다.


“포용은 제도의 덧붙임이 아니라, 금융의 본질이어야 하지 않은가?”


200년 전 개성은 이미 포용을 금융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 금융은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를 지키는 질서였다. 포용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였고, 신뢰는 위험이 아니라 자산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실험이자 오늘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미래의 원형이다.


� 다음 편에서는 개성이 어떻게 실패를 흡수하고, 실패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금융을 설계했는지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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