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자리

by 소리빛


봄.

피아노 건반 위를 가볍게 뛰어다니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떠오른다. 봄바람 날리던 음악실, 멀리서 들리던 아이들의 함성이 엷은 햇살에 부서져 내리던 그 운동장이 그립다.

오래된 기와가 머리를 맞대고 겸손히 엎드려 있던 동네.

아무 걱정 없던 그 시간들이 그립다.

검은 도시, 검은색 책상과 차가운 형광 등을 무작정 뒤로 하고 기차를 탄다. 나는 고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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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피던 나의 고향.

작은 방들이 줄 지어 늘어서 있고 함께 쓰던 밥상이 요란했던 우리 집, 흰 창호지로 어스름 해가 들고 지는 할아버지의 방, 뒹굴뒹굴 붉은 해가 넘어갈 즈음 어머니 치맛자락이 보드랍게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하던 나의 집.

바람을 삼켰다 뱉어낼 때마다 힘찬 울림으로 뒷마당을 지키던 대나무밭과 작은 맨발을 내어놓을 때마다 머리카락 쭈뼛한 시간을 느낄 수 있던 툇마루.

고향을 나와 도시생활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지금 거울 속 나의 모습은 표정이 없다. 각 진 건물처럼 메말라 있다. 고향처럼 아늑하지 않다. 어느덧 도시인이 되어 그들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험한 말을 거침없이 쏘아붙인다. 시대를 탓하며 다시 안 볼 사람들처럼.

‘피아노의 봄’이라는 카페. 자개가 있는 곳이다.

‘뎅그러엉~’

여운이 긴 풍경 소리를 밀고 들어가니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피아노 앞에 있던 그는 놀라지도 않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희고 긴 손가락을 건반에서 들어 손 인사를 건넨다. 이 곳, 그에게 잘 어울린다.

“왔냐?”

첫인사치곤 간결하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좋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과 직장을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런데 자개는 이곳에 남았다. 시간이 지나는 곳을 볼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며. 여전히 사춘기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그 덕분에 간간이 친구들이 모이게 된다.

“오늘 모두 온대?”

“응”

카페 출입구에 있는 작은 폐점 간판을 뒤집으며 대답한다.

“오늘은 끝!”

그가 눈을 찡긋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카페 옆으로 통하는 베란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상쾌한 바람이 코를 통해 머릿속을 한 바퀴 돌고 지나간다. 베란다 옆의 복숭아나무가 굵은 선을 그리고 서 있다. 투명한 복숭아 꽃잎이 볕을 가늘게 썰어 내린다.

눈이 부. 시. 다.

‘아직 물이 차겠지?’

“물이 차. 뛰어내릴 생각, 하지 마. 안보다는 여기가 좋지?”

녀석은 내 속마음을 읽는 묘한 재주가 있다. 나는 들킨 속마음을 집어넣듯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응.”

나에겐 네 명의 오랜 친구가 있다. 장독대에 쌓이는 겨울눈처럼 우리의 우정은 포근하다. 봄날의 꽃잎처럼 저마다의 색이 있고 깊은 계곡의 여름날 폭포처럼 요란하다. 그리고 높은 가을 하늘처럼 순수하다. 나는 우리의 우정을 사랑한다.

재가는 그의 군 복무 시절, 친부모의 상(喪)이 아니면 휴가를 낼 수 없었던 중에도 억지 휴가를 내어 나의 아버지 장례식에 왔었다.

내리꽂는 빗속을 군모 하나로 뚫고 와서는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것이 군인정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 지금 저 빗속을 뛰쳐나가고 싶겠지만 내가 경험해 봤는데, 춥더라. 그리고 내일도 비 맞지 마라. 지금 오는 비는 내일이면 멈출 거야. 비 맞은 것처럼 젖어 있을 필요 없다. 자군아.”

같은 나이임에도 왜 저 녀석은 커 보이는 걸까. 왜소한 나의 왼쪽 어깨를 잡아본다.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재가의 등이 넓다.

파란색 승용차 한 대가 좁은 골목길로 천천히 들어온다. 건물 옆에 주차를 하는 것을 보니 여희와 덕여, 이지가 곧 들이닥치겠다.

나는 그 녀석들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난다.

“야, 커피 향이 나는 남자의 집이로군. 다방에 왜 이리 책이 많아? 이거 엿 바꿔 먹자니까 말을 안 듣네. 자개야, 형님들이 왔다.”

가장 시끄러운 여희가 먼저 인사한다. 그 뒤에 덕여와 이지가 손을 들어 보인다. 각각의 색을 가진 친구들이지만 언제나 어릴 적 모습 그대로이다. 바로 몇 시간 전 헤어진 아이들처럼.

“왔냐?”

자개는 내게 하듯 다른 친구들에게도 똑같이 인사를 한다. 그리곤

“어서 앉아. 이거 내가 만든 술이야.”

작은 소반에 주병과 술잔, 안주가 얌전히 차려졌다.

“진짜? 네가 술도 만들어? 별걸 다 하는구나? 자개군! 나는 자네가 있어 이 땅에 사는 것이 자랑스럽네.”

자개가 여희의 입을 긴 검지로 꾹 누른다. 녀석들을 보니 잘 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자, 이제 우리의 <송춘회(送春會)>를 시작해 볼까요? 한잔 돌려 보게나.”

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덕여는 코를 찡그려 굵은 뿔테 안경을 위로 올린다. 자개의 긴 손가락이 백자 주병의 고운 목을 잡아 기울인다.

“똘똘똘똘... 야! 향이 아주 그냥 막! 야~.”

“그게 너의 최선이냐? 좀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없냐?”

덕여가 여희에게 핀잔을 준다.

“이 술, 그러니까 이름이 뭐야?”

이지는 잔을 코에 대며 눈을 감는다. 이지는 도자기를 빚는다. 아마도 저 백자 주병과 술잔도, 이 카페의 커피잔들도 이지의 작품들일 게다.

“소주야, 그냥. 마을 어른에게 배웠어.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좋은 쌀과 누룩이 있으면 돼. 무엇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지.”

길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개가 설명을 한다. 술 만드는 일이 재미있나 보다. 그런 자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너 술도 잘 못하면서 술을 만든다고? 네가? 누가 가르쳐 주셨어?”

여희가 빠르게 묻는다.

“응. 너희들 주려고 배웠어. 윗마을 김씨 어르신께.”

늘 그랬다. 자개는 우리들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예전처럼 재잘대었다. 달이 뜰 때까지.

“나 여기서 살 거야. 너희들이랑 술 마시고 수다하면서.”

“왜, 너 잘렸냐? 무슨 일이야? 누가 너 따 시키냐?”

역시 여희다운 질문이다.

“아냐, 인마. 그냥 쉬고 싶어서.”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웠다. 모난 직장 생활에 더 이상 마음이 가지 않는다. 잔속에 어리는 혼란스런 상황들이 파장을 만든다. 삼켜버리자.

“내가 집 알아봐 줘? 언제 옮기려고?”

덕여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친구이다.

자개는 손안에 든 잔을 조용히 돌리기만 한다.

이지는 큰 눈을 정지하고 얼어버렸다. 나는 분위기를 돌리고자 덕여가 사온 어포를 이지에게 던졌다.

“심각한 거 아냐. 아무 일 없어. 이제 사람처럼 살고 싶은 거야. 철들었나 봐.”

나는 대수로운 일이 아닌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산다는 것이 별거 아니더라고. 이렇게 술 한 잔 하며 세상을 이야기하고 책도 읽으며 살고 싶어. 아등바등... 피곤해.”

“야, 야, 야. 뭐 우린 자준이 네가 오면 너무 좋지~ 이렇게, 이렇게 환영한다고.”

여희는 건배를 외쳤다.

“자, 우리 영웅의 귀향을 위하여.”

덕여와 이지도 잔을 높이 들었다. 어느새 얼굴들이 복숭아꽃 빛이 되었다.

“어? 술이 없다. 우리 2차 갈까? 괜찮으면 우리 집으로 가자.”

이지의 집. 복숭아 과수원을 하고 있는 이지네.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이지네 복숭아꽃을 보면서 분홍색의 다양함에 놀랐다. 세상의 분홍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이지네 집에 자주 가지 못했다. 형형색색의 복숭아꽃 앞에서는 함부로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는 얌전한 여자아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이지네 집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과수원 앞의 작은 정자까지는 가 주었다.

“오늘 정자에서 2차 해? 내가 복숭아 술 가지고 나올게.”

“와~ 역시 이지는 선녀야. 가자! 우리 빨리 가자. 무릉도원으로.”

과수원 정자로 향했다. 어깨를 걸고 앞서 가는 여희와 덕여의 수다가 어두운 밤길을 깨웠다. 작은 시내를 벗어나자 오른쪽으로 휜 샛길이 나왔다. 아직 쌀쌀한 밤공기가 술기운을 깨운다. 저기 어린 우리들이 뛰어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 때는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길가의 구불구불한 복숭아나무 가지에 달빛 꽃들이 바다를 이룬다.

정자 난간에 다리를 길게 빼고 다섯 사내가 앉았다. 이지가 내 온 복숭아 술을 한 잔씩 들고.

“와~ 잔 크다. 한 방에 가자 이거지. 좋아.”

“근데, 이지야, 이거 네 아부지가 담그신 거 아니냐? 이러다 엉덩이 차이는 거면 곤란한데...”

여희와 덕여가 건성으로 물어본다.

“괜찮아. 자군이가 와서 한 잔 한다고 말씀드렸어. 아버지가 자군이 걱정하시더라.”

“나? 괜찮아. 걱정 마시라고 전해드려.”

나는 내 잔을 이지의 잔에 부딪혔다.

“참, 자군아. 아버지께서 너 주라고 하시던데. 이거 받아. 붓이야.”

“붓?”

“응. 아버지가 만드셨어. 너 예전에 붓글씨 잘 썼잖아. 정자에 걸 현판 만드신다고 이름 지어서 써달라고 하시더라.”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지네 아버지께서 내게 마음을 써 주시는 것 같다. 코가 먹먹하여 달을 쳐다본다.

“오늘 달빛이 참 좋다.”

“응.”

누가 물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함께 대답하였다.

너무 좋을 때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딱히 마음에 드는 형용사가 없다. ‘좋다’가 가장 좋다. 형용을 더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볕 좋은 어느 날, 붓털을 고르시던 이지네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신문을 펼친 마루에 앉아 고운 빛의 털들을 빗질하여 흰 명주실로 묶던 어른. 너른 이를 보이며 웃어주시던 이지네 아버지. 종종 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셨다.

이 봄, 어린 날들이 부쩍 생각나는 것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밟아야 할 고향땅과 돌보아야 할 계절,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어디보자. 이지네 정자에 이제 이름이 생긴 거네. 멋지다. 역시 자군의 필체가 살아있네. 그럼, 이제 매일 밤 달빛 아래에서 자개가 내린 술과 이지네 복숭아 술을 여기서 먹어주면 되는 거야?”

“그렇지!”

“매일?”

“그러다 동네 주정뱅이 되겠다.”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수다를 해 대는 여희에게 한 마디씩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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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맞이하는 곳, 영춘재(迎春齎).

이렇게 우리는, 달빛 아래 봄이 오는 자리에 다시 모였다. 끝.



에필로그 Epilogue

과거와 현재, 미래는 끊을 수 없는 시간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양한 역사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시대적 상황들은 반복되어 오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낙향한 선비의 일상. 어느 날, 지인들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어려움을 덜어주는 모임, <송춘회(送春會)>를 통해 결속(結束)을 다졌다고 전해진다.

17세기 당시의 모습을 현재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귀농귀촌’하고 있는 중장년층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향을 찾은 현대의 자준(김령의 자(字))을 통해 당시 일기에 표현되지 않았던 자준의 심정을 상상하였고 자준의 입장에서 지인들의 성격도 각각 부여해 표현해 보았다.

당시의 등장인물들은 현재라는 시간에 환생하였지만 그것은 현대라는 시대적 배경일뿐, 그들이 사용하는 생활도구(주병과 붓, 술 등)와 자연환경(안동의 복숭아꽃, 달 등)은 1622년의 시대적 상황과 많이 다르지 않다. 즉 과거와 현재가 병존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그림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따라서 김령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봄이 오는 자리’ (Ⅰ)

1622년 3월 19일 맑음.

앞산의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살구꽃은 이미 시들고 복숭아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여희(汝熙)·덕여(德輿)·이지(以志)가 차례로 왔다.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령 <계암일록>


‘봄이 오는 자리’ (Ⅱ)

1622년 3월 29일 흐림.

자개(子開)가 그의 서당으로 초청하여 그곳에서 물가로 나가 봄을 보내는 모임[送春會]을 가지려고 하였다. 마침 참(墋)이 와서 마침내 그와 같이 갔다. 현동(玄洞)을 지나 도착하였다. 여희(汝熙)·덕여(德輿) 및 이지(以志) 또한 서로 잇따라 도착하였다. 이때 봄기운은 이미 지났는데, 유독 이곳만은 붉은 복숭아꽃과 세 가지 빛깔의 복숭아꽃이 바야흐로 피어 못에 어리 비치니 더욱 볼 만하였다. 김령 <계암일록>


도자기(陶瓷器)에 그려진 그림은 1622년 3월의 어느 밤, ‘봄이 오는 자리’이다. 그림의 시간은 과거이지만 그 시간을 감싸고 있는 푸른 시간의 틀은 또 다른 미래의 시간을 상징한다. 따라서 글과 그림에 나타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도자 그릇에 담겨 있음을 표현해 보았다.

서정화 글.

2008년 환경일보의 「월간 환경」 동화‧그림 연재를 시작으로 자연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작업하고 있으며 박물관, 공예/디자인과 관련한 일들을 하고 있다.


박시현 그림.

현재 핸드페인팅 도자공방 ‘시현스튜디오’에서 자연을 소재로 한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국내외 전시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