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이면 충분하다, 대화로 이어지는 제안서

by 크리

한 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예전에는 기획 제안을 할 때, 어떻게 보이느냐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글의 구성도 물론 중요했지만, 그걸 담는 '그릇'의 시각적 완성도가 설득의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PPT 파일의 흐름, 이미지의 톤, 키워드의 배치까지 세심하게 조율했고, 그렇게 만든 제안서를 보며 스스로 만족하곤 했다. 내 안에 있는 아이디어와 의도를 최대한 보기 좋게 포장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이자 실력이라고 여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전달’보다 ‘표현’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설득보다는 증명하려는 마음이 컸던 걸지도 모른다.




표현이 아닌 전달, 전달이 아닌 대화


그렇게 PPT로 공들여 만든 제안들이 어떤 반응을 끌어냈는지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돌아오는 피드백 대부분은 ‘내용 요약본 없냐’는 질문이었다. 정작 중심이 되는 의도는 충분히 읽히지 않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간단히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부터 형식보다 ‘도달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떤 제안이 더 잘 도달하는가? 어떤 방식이 상대의 시간을 덜 빼앗고, 더 깊은 반응을 이끌어내는가? 그런 질문 속에서, 나는 점점 더 간단한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한 장이면 충분하다는 확신까지 가지게 됐다. 목적은 결국 대화로 가닿는 것이고, 그 시작은 지나치게 정제된 무언가보다 솔직하고 직접적인 구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 가지 원칙: 단순하게, 그리고 여백을 남기자


내가 지금 제안을 만들 때 스스로 지키는 기준은 딱 두 가지다. 첫째, 용건은 단순하고 분명하게. 둘째, 물음표가 들어설 여백은 남겨둘 것.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바쁘다. 하루에 수십 개의 메일과 메시지를 넘기며 일하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많은 문서보다 ‘한눈에 들어오는 핵심’이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간다. 그리고 ‘다 말하지 않는 용기’도 중요하다. 모든 걸 다 설명해버리면 상대가 참여할 여지가 없다. 궁금해지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상대가 묻도록 유도하는 제안이 결국 더 오래 기억에 남고, 더 빠르게 대화로 이어진다. 내가 한 장으로 제안서를 갈무리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여백에 있다.




짧아졌지만, 깊어졌다


한 장이면 단순하고 간결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가볍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내용을 정리한 뒤, 그 안에서 가장 본질적인 한 줄, 하나의 구조, 하나의 질문을 남겨두는 작업은 훨씬 더 많은 사고와 판단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고, 그게 곧 제안서의 밀도를 높여주었다. 짧아졌지만, 더 깊어졌다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이제는 ‘한 장’이라는 제한이 오히려 내 생각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프레임이 되어준다. 상대에게 짧고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그게 지금 파인하랑이 지향하는 제안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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