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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허영감 Dec 21. 2024

3. 오지않는 전화번호를 지우다

비어진 인연 자리는 새로운 인연으로 다시 채워진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


작년 7월 은퇴 후 벌써 1년 하고 반이나 지났다

그동안 나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직장을 다니 맺었던 인연과의 단절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다   

현직 때 시도 때도 없이 많이 울리던 핸드폰 벨소리를 이제는 듣기 힘들다

은퇴자들이 출연한 유튜브 영상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내용이라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현실로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다


은퇴 후 첫 명절이었던 작년 추석

현직 때 받았던 그 많던 안부 전화나 문자가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물론 감사하게도 몇 명의 직원들이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 주었지만

다섯 손가락이 남을 정도로 적은 수였다

수많은 문자에 일일이 답장해 주는 것이 조금은 귀찮았었는데

오히려 잘되었다 위안을 삼아 보았지만 

그래도 세상인심이 이런 것이구나 직접 겪어보니

인간이기에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올라오는 허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또 한편으로는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 같다

나란 사람도 현직 때는

직장 동료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안부를 전한곤 했지

은퇴한 선배들에게 안부를 전한 기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는데 그 친구들도

바쁘게 돌아가는 직장생활에서 일단 챙겨야 할 사람들부터 챙기다 보니

은퇴한 사람들까지 챙길 마음이 여유가 없었겠지라고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잠시 올라왔던 허한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그래 이참에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정리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2년 동안 서로 통화가 없었던 전화번호와

폰에 저장은 되어있으나 누구인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직장을 매개체로 연결되어

퇴직 후에는 전혀 통화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로 기준을 정했다

다만 장시간 서로 연락이 없었더라도 친척분들은 예외로 하였다


핸드폰에는 놀랍게도 1500개가 넘는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고

그것은 내가 인맥이 넓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명함을 받으면 무조건 핸드폰에 전번을 저장하는 버릇이 있어

티끌모안 태산처럼 전화번호도 쌓여있었던 것이다


남는 게 시간인 은퇴자의 하루인지라

전화번호 지우는 것도 소일거리로 삼으면 될 것 같아

한꺼번에 지우지 않고 짬날 때마다 지우기로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전화번호를 지우면서

이 사람은 과연 누굴까 하는 의문스러운 이름도 있었고

정말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 감사했던 사람도 많이 있어서

조금은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과감히 지우기로 했다


전화번호를 지우는 것이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끝내는 것도 아닌데

삭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오묘한 감정들이 올라왔다


그렇게 며칠을 지우고 나니

1500개가 넘던 전화번호는 200개 조금 안되게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런데 전화번호들을 정리하고 나니 후련하긴 한데

가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전화번호로 경조사 알림이 올 때인데

보내는 분이 자기 이름이라도 알리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종종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 알림이 모바일 부고장이나 청첩장이라

링크를 클릭해 보면 누군지 알 수가 있지만

현직 때 직원 이름으로 도착한 모바일 부고장의 링크를 눌렀다가

보이스피싱을 당해 고초를 격은 경험이 있어서

링크를 누르기가 망설여져서 추가로 알림이 오지 않는 한

미안하고 찝찝하지만 가깝지 않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고 무시하기로 했다


또 이런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얼마 전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와서 망설이다 받았는데

알듯 모를듯한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하며 안부를 전한다

아 누구일까

모른 척하면 상대편이 기분이 상할까 봐

통화를 하며 좋지 않은 두 되를 마구 굴려 누구인지 겨우 생각낼 수 있었다

그분은 몇 년 전 올림픽 때 교류가 있던 분이었는데

고맙게도 불현듯 제가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고

그분도 처음에 당황하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아

전화번호 정리를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고맙게도 흔쾌히 이해해 주셨고

통화 후 그분의 전화번호는 다시 내 폰에 새로운 인연으로 저장되었다


전화번호 지움으로

이런저런 웃지 못할 일들도 많아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은퇴 후 잘한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은퇴 후 여러 가지 사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분들의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다시 하나하나 채워지며

작년 1500개에서 190개 정리되었던 전화번호는

다시 200개를 넘기고 300개를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워진 인연의 자리는

새로운 인연으로 채워진다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은퇴 후 내려놓기 중 하나로 해본 전화번호 지우기

함께했던 인연들을

잠시나마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비록 전화번호는 없지만 

그분들과 함께한 추억은 지워지지 않고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비워진 인연의 자리는 새로운 인연으로 다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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