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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제 Sep 10. 2024

택시기사

첫 번째 꿈

- 난 책을 접어 놓으며 창문을 열어…


진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택시 안에서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족여행을 떠날 때 뒷좌석에 앉아 지도책을 펼쳐 가는 곳을 찾아보고 있을 때면,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중 하나였다. 운전하며 흥얼거리던 아빠의 뒷모습,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금세 귤을 까서 형과 나에게 나눠주던 엄마. 나의 어린 시절 여행의 기억은 항상 차 안에 머물러있다.




나는 이빨을 괜히 톡톡 건드렸다. 신경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이빨에 신경이라는 게 있나 보구나, 하는 정도. 달리는 창문 너머로 처음 보는 서울의 풍경이 이어졌다.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연세대학교 치과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중학년 무렵, 점심시간에 학교 놀이터에서 친구와 함께 미끄럼틀을 타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같이 떨어진 친구는 머리로 떨어져 열바늘을 넘게 꿰매는 시술을 받았고, 나는 입으로 떨어져 영구치 앞니 신경이 손상되고 말았다(이때부터 턱의 주장이 강해진 것 같다).


그때부터 몇 달간 택시를 타고 병원을 다니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맞벌이 부부였던 내 부모님은 진료 시간에 맞춰 서로 반차를 내어가며 나를 병원에 등원시켰다. 가동 가능한 차는 한대였던지라 주로 택시를 타고 다녔었고,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택시를 마주할 수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작금의 택시와는 달리, 유년 시절 기억 속의 택시는 기사님의 성격에 따라 정말 각양각색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노래방에서나 볼 수 있었던 미러볼이 좌석 천장에 매달려있는 택시, 어디에서 수집하셨는지 모를 불상들이 대시보드를 가득 채운 택시,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건 불량식품 '꾀돌이'를 닮은 대나무 알들로 수놓아진 등받이 커버가 있는 택시였다(요즘도 볼 수 있다). 특유의 차가운 감촉의 동글동글한 알갱이들을 만지고 있다 보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있곤 했다.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을 생각을 하면 정말 가기 싫었지만, 택시를 타는 것만큼은 그 두려움을 잊게 해 줄 만큼 흥미롭고 재미난 일이었다. 오늘은 어떤 택시를 타고, 어떤 풍경을 보며 가게 될까. 오늘은 차 안에서 무슨 냄새가 날까, 삼촌 냄새(담배)? 아빠방 냄새(남성 향수)? 엄마방 냄새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꽤나 여러 택시를 타봤을 무렵, 문득 택시 기사님이 부러워졌다. 자기가 원하는 데로 꾸며놓은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그저 액셀을 밟으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가끔씩 손님을 태워다 주면 돈도 벌 수 있고, 쉬고 싶을 땐 잠깐 차를 세워두면 될 테고,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을까?


"나 택시기사아저씨 할래."


집에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던 교회를 다녀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난 내 기억 속의 첫 장래희망을 말했다.


"음… 이제는 택시기사가 왜 하고 싶어?"

"택시는 어디든지 갈 수 있잖아!"




처음으로 생각해 본 내 꿈이었던 만큼, 지금의 내 삶에도 여전히 내가 상상했던 택시기사의 면모가 남아있다. 또래에 비해 여행 다니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때마다 반드시 새로운 음악을 들어야만 하며,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중요시하고, 때때로 새롭게 가구배치를 바꿔 환기시키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난 정확히는 택시기사가 아니라 택시승객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매번 새로운 택시를 탈 수 있다는 기대감, 기사님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요소들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목적지는 같지만 때때로 처음 보는 길을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희열감을 좋아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의 난 운전면허는 있지만 장롱이며, 운전석보다는 조수석이나 뒷좌석을 몹시 선호한다(어차피 운전을 못한다). 또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운전 잘하는 친구 옆에 앉아서 어떤 플레이리스트를 틀어야 차창 너머의 풍경과 어울릴지, 실시간 도로상황을 체크하며 국도를 탈지 고속도로를 탈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첫 번째 꿈은 조금 수정되었지만 현재진행형이다.




p.s) 다행히도 내 영구치 앞니는 신경이 되살아나서 지금도 잘 있다. 앞으로도 건강히 잘 있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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