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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제 Sep 13. 2024

두 번째 꿈

"이제는 동생 갖고 싶지 않아?"


어린 시절,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동생 대신 형을 바꿔달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에겐 세 살 터울의 형이 있다. 그리고 형은 종종 나를 때렸다.


언제부터 형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을까. 이전에 본 짤막한 영상이 떠오른다. 동생이 태어나고 자신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자 부모가 모르는 사이 질투심에 아직 아기인 동생을 꼬집는 귀여운 형의 모습.


이젠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형이 나를 때릴 때 내가 무슨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어떤 표정을 지으며 형에게 대들었는지 그려지지 않는다. 오래되었다. 더 이상 같은 방을 쓰지 않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형의 키를 넘어서고 학원을 다니면서 밤늦게 귀가하기 시작했을 무렵, 형의 폭행은 멈추었으니.




"그래도 네 형이 너 어릴 때 얼마나 업고 다녔는지 알아? 산 올라가기 싫다고 찡찡거리는 너를 등에 업고 등산도 했었어."


기억나지 않아.


"또 너 중학생 때인가, 무서운 선배가 괴롭힌다고 하교 시간에 형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었잖아."


그래, 그건 기억이 나.


고마워. 고마운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을 거야. 내가 모르는 일들도 많았겠지. 가령 형이 나 대신 포기한 것들이 있었을 테고, 나를 위해 양보한 것들이 분명히 많았을 거야. 형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받고 대접받은 순간들이 있었어. 그래.




그런 순간들을 빌미로 형이 나를 때릴 수 있었던 거라면, 다 없던 일로 하고 싶어.




집에 돌아가는 길이 무서웠다. 현관문을 열면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뒷모습, 혹시라도 게임에 져서 나를 때리러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베란다에 숨었다. 화장실에 숨었다. 형은 그런 나를 따라와 잠긴 문을 부실 듯이 쾅쾅 내리쳤다.


남들 앞에서는 나를 때리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형은 누가 있든, 오히려 보란 듯이 나의 얼굴을 때렸다. 옆에 있던 형의 친구가 말렸지만, 내 동생을 때리는 데 무슨 상관이냐고 대꾸하며 나를 형의 소유물 취급했다.




형은 나에게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해도, 난 사과를 받을 수 없다. 이제 그때의 감정들은 모두 삭아버렸으니. 더 이상 사과를 받아줄 나는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가족의 어두운 면을 글로 담아낸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나이 서른 살을 먹고도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사냐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을 테다. 형제는 원래 다 서로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 그러다 보면 주먹다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나도 그랬었다고, 우리 아버지도 그랬을 거고, 내 자식들도 그럴 거라고.


그렇지만 그때의 난 정말 아팠고, 무서웠고, 두려웠다. 형이 나를 때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형의 발목을 붙잡고 최대한 덜 맞으려고 웅크리는 것. 뿌리치려고 발길질을 해대다가 내 손톱에 긁혀 피가 나던 형의 발목이 눈에 선하다. 강렬한 기억, 아마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기억.




나는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한 뒤 집을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형과 거리를 두고 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형에 대한 감정이 무뎌졌다. 가족에게서 떨어져 사는 것은 외롭지만 편안했다. 몸은 힘들고 가끔씩은 굶주렸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새로운 감정들로 풍성해졌다.


그 시절의 나를 버려두고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젠 형을 마주해도 더 이상 괴롭고 아팠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형이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분노할까, 슬퍼할까, 창피해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상처 입을까, 어이없어할까, 미안해할까.




"K는 잘 있어?"


가족 모임을 마치고 기차를 타러 가는 길, 형이 내게 물었다.


"응."


우린 더 이상 대화를 잇지 않은 채 같은 열차를 타고 각자의 집을 향해 갔다.


"가."

"어."


외마디 인사를 나눈 형은 먼저 열차에서 내렸다. 난 열차에서 내리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았다.


과연 형은 그 시절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린 걸까. 형에겐 기억에 남을 만큼의 사건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기억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지, 다 기억하지만 애써 모르는 척 나를 대하는 건지.


이제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난 창문 밖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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