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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제 Sep 20. 2024

바기오 최연소 대학생

세 번째 꿈

한 여름에 에어컨 없이 살 수 있는 도시들이 있다. 도시의 고도가 해발 800미터 정도를 넘기면 다른 곳과 크게는 10도씨 정도까지 평균 기온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에는 태백이 그런 도시 중 하나이고, 필리핀에는 바기오라는 도시가 그렇다. 바기오는 해발 고도 1,500미터에 있는 도시이기에, 가장 더울 때에도 평균 기온이 20도씨 남짓이다. 오히려 밤에는 바람막이를 입고 다녀야 할 정도이니.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초등학교 고학년 여름방학에 온 가족이 바기오로 휴가를 떠났다. 형은 영어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먼저 떠났고, 나는 부모님과 함께 바기오로 향했다. 마닐라 공항에서부터 차를 타고 절벽으로 나있는 길을 곡예하듯이 세 시간 정도 오르다 보면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기오의 첫인상은 내가 살던 아파트 뒷산에 집들을 테트리스하듯이 쌓아놓은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플레이어가 고수라서 거의 쌓이다 만 듯한 모습.


아스콘 도로를 벗어나 흙길 위를 몇 분 더 달리자 우리가 지낼 선교사 스테이가 보였다. 치안이 좋지 않은 동네였는지 현관은 가드가 지키고 서있었고, 가사도우미 분들이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10대 후반의 형누나들이 우리 가족을 반겼다. 모두 상냥했지만 때로는 거칠었던 사람들로 기억한다.


형이 캠프를 마치고 난 이후, 우리는 스테이 형누나들과 같은 현지 학교를 체험차 다니게 되었는데 무려 지하 6층에 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태원의 현대카드 라이브러리처럼 건물 양쪽 지면의 높이차가 극심한 건물이었고, 창문이 나있었기에 환경이 나쁘진 않았다(가끔 쥐가 교실로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눈을 반짝할 일이 생겼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나는 한국에 있을 당시 따로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었다. 형도 마찬가지. 다만 한국의 교육 문화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듯이, 정부 지침대로 교육과정을 거치게 되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수학 실력이 월등히 높게 된다. 난 그 사실을 현지 학교에서 몸소 체험했다.


우리가 다닌 학교는 흔히 '학습지'라 불리는 것을 교육 과정의 주된 골자로 삼고 있었는데, 과목별로 학습지가 1권부터 많게는 120권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 학습지들을 일정 레벨 이상 풀게 되면 시험을 보고, 이를 통과하면 해당 과목 합격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인증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형과 나는 누가 질세라 초고속으로 학습지를 풀어나가기 시작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쯤 전 과목이 20권대에 진입해 있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즉, 이 속도로 계속해나간다면 나는 바기오에 있는 대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할 수 있었다(누군가 그렇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어렸던 내가 꿈꿀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내가 최연소 대학생이 될 수 있다고? 이거 완전 짱이잖아!'




"나 한국 안 갈래."

"뭐?"

"나 여기 남아서 대학교 갈래."

"… 정말 남고 싶어?"

"남을래!"


어릴 적 나는 고집이 무척 셌고, 교직에 계셨던 부모님은 어릴 때 가능한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을 중요시했기에, 일단은 내가 남는 것을 허락했다. 다만, 형도 함께 남는다는 조건으로.


그 뒤로 약 5개월 동안 바기오에서 시간을 보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은 학습지는 결국 일종의 교육과정이었고, 당연히 풀수록 난이도가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60권쯤 지나자 한국에서 배우지 않았던 과정(중학교 교육과정)이 나왔고, 풀이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천재인 줄만 알았던 나는 생각보다 별거 없는 사우스코리아 출신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것이다.




스테이를 떠나던 날, 형누나들이 우리 형제를 배웅해 줬다. "돌아올 거지?"라는 말에 우리는 거짓으로 답했다. 한국 과자(특히 초코파이)를 많이 사 오라고 했었는데, 잘 지내고 있을까. 20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만약 내가 그곳에 남았다면 난 정말 최연소 대학생이 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테다.


그래도 유년 시절에 부모와 떨어져 반년가까이, 그것도 해외에서 살아본 것은 내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내 가치관의 기반이 되었다. 바기오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내 욕심, 최연소 대학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꿈꿨던 내 마음, 그리고 나의 고집을 허락해 준 부모의 용감한 결정과 결국 좌절되었던 내 어릴 적 꿈.


비록 이룰 수 없을지라도, 어쩌면 내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꿈꿔도 되고, 이를 위해 시간을 투자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 감사하다. 나도 누군가의 결정을 용감하게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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