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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제 Sep 24. 2024

애니메이터

네 번째 꿈

중학교 시절, 판타지 소설을 읽었다. 차마 부모님께 책을 사달라 할 자신은 없어서 아이리버 전자사전에 다운로드하여 읽곤 했다. 매일 학원을 마치고 이불속에 숨어서 그 조그마한 화면으로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세상 속을 들여다봤다.


그중 기억에 남는 작품은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이다. 게임 '테일즈위버'의 초창기 배경이기도 한 이 소설은 방대한 양의 판타지 세계관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나이가 당시의 나와 비슷했기에 감정 이입이 너무나도 잘 됐고, 이따금씩 숨죽여 울며 소설을 읽곤 했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음악을 들으며 읽으면 눈물이 배가 됐다.




동 시절의 나는 애니메이션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엄청 깊게 파고들었던 건 아니지만,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희귀한 작품을 더 즐겨 보았다(집에 투니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훨씬 판타지스러운, 현실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이따금씩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보곤 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룬의 아이들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정말 멋질 것 같은데, 왜 안 만들지?'




현재의 나는 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 흘려 만드는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저 멋진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내가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세계를 다른 사람들과 시각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큼 기대되는 일은 없었다. 소설 속 문장 하나하나를 어떤 장면으로 만들면 좋을지 고민하며 만화 학원에 등록을 하러 갔다(당시 애니메이션 전공을 하기 위해서는 만화 학원을 다녀야만 했다).


"이제가 좋아하는 만화 속 캐릭터를 한 번 그려볼래?"


상담을 해주던 원장님이 내게 연필을 쥐어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한 번도 만화 캐릭터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학교 멀티미디어 교육 시간에 그림판으로 졸라맨 낙서를 하던 게 전부였고, 뼈대에 살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몰랐다.


내 상상과 현실 속 그림의 괴리는 처참했다.


"음… 어머니, 일단 반년 정도 다녀보고 판단해 보시면 어떨까요?"

"딱, 반년."




6개월의 시간은 충분치 못했다. 아니, 더 다녔더라도 결과는 같았다. 관련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선 실기 시험이 필수였는데, 나는 인물화에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계란만 그리다 어느새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되었다.


"이제가 그린 거 선생님이 한 장 가져가도 될까? 혹시 모르잖아. 네가 대가가 될지."


선생님은 1년 뒤 네이버 웹툰에 데뷔하였고,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지금도 내가 상상하는 무언가를 현실로 옮겨놓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건축을 전공했던 것도, 뮤지컬, 연극 동아리를 했던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여전히 애니메이션 영화를 사랑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내 상상 속 세계를 탁월하게 구현해내고 싶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초대하고 싶다.


이토록 화려하고 풍부한 세상이 있다고. 당신을 눈물짓게 할 찬란한 이야기가 있다고.




p.s) '룬의 아이들'은 현재 카카오페이지 웹툰에서 연재 중이다. 대리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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