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The King reigns but does not govern.’
현대의 입헌군주국들은 국가적 시그니처로 존재하기에 정치활동보다 전통 수행으로서의 대중적 관심이 높다. 이미 망해버렸음에도 되풀이되는 여러 왕조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우리가 왕실 판타지를 즐기는 것은 구세대 전통에 대한 쾌락적 이미지 소비일 것이다.
한신후 작가의 <로열패밀리>는 1992년 윈저 성 대화재를 모티브로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영국 왕실의 궁전들도 여러 번 화재가 났지만 이때의 복구비용은 천문학적 액수로 추산되었다. 전통 유산이긴 해도 구시대 계급 특권에 세금을 쏟아붓는다는 비판이 일며 여론은 험해졌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2세는 왕실이 가지고 있던 면세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이후로 영국 왕실은 납세를 하고 있다. 당연한 의무인 납세가 뭐 그리 대단할까 싶겠지만 영국 계급사회의 완고함을 떠올리면 퍽 놀랍다.
순정만화답게 <로열패밀리>에도 왕실이 등장하지만 이 작품 속 로열패밀리들은 기존 왕족들과 다소 다르다. 계급차이에 세대차이를 접목시킨 소동극은 지나간 시기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젊은 세대에 대한 희망을 잇는다.
오늘도 모든 일간지는 경마에 여념이 없는 여왕님의 기사로 도배된다. 왕족의 품위는 어디로 간 건지, 노골적으로 상금에만 열 올리는 늙은 여왕의 경마 사랑은 비웃음 속에 지탄받는다.
안 그래도 내내 입헌군주제 존폐에 시달리고 있는데! 까칠한 국왕 ‘헨리’는 어머니가 경마장에 나설 수 없도록 감시한다. 그런데 이 못 말리는 여왕님은 아예 자신의 ‘전용 말’을 사버린다.
여왕 전용 왕실 기수로 스카우트된 기수는 욱하는 성격에 사고를 쳐 무소속이 된 ‘요크’이다.
왕실 기수라곤 하지만 여왕이 직접 사 온 말 ‘피핀’은 곡마단 출신으로 더럽게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식탐 많고 느려 터진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왕의 손녀 ‘리슐리외 공주’까지 설득에 나서자 요크는 피핀을 훈련시켜보기로 한다.
상금 타령만 하는 철없는 여왕님은 뻔뻔할 정도로 요지부동인 피핀을 애지중지하고 요크는 지쳐간다. 산책에 나선 리슐리외 공주는 요크를 폐허가 된 예전 본궁으로 데려간다.
아름답던 왕실의 본궁은 몇십 년 전 왕정 반대파들이 불을 질러 소실되었다. 천문학적 복구 비용도 비용이지만 당연히 세금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기에 폐허로 방치된 것이다. 전통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여왕은 한 시대의 상징이 폐허로 스러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여왕은 사유재산을 써 혼자라도 본궁을 복원하려 한다.
그 비용 마련 방법이 ‘경마’라는 것이 문제지만.
철없어 보이던 여왕의 진심을 알게 된 요크는 다시 한번 의지를 다진다. 우연히 간식 앞에 엄청난 속도를 내는 피핀을 목격한 요크는 맞춤형 훈련을 준비한다.
바로 낚싯줄에 매단 사과 미끼를 이용해 피핀을 달리게 하는 것.
드디어 레이스의 날, 모습부터 우스꽝스러운 여왕의 말은 어느 때보다 비웃음을 산다. 그러나 요크의 훈련은 효과가 있었고 (사과를 먹기 위해) 죽도록 달리는 피핀은 상위 그룹에 다가선다.
가열차게 달려 나가던 그때! 사과를 먹는 데 성공한 피핀의 급정거로 말들이 충돌하고 경마장은 난장판이 된다. 이 사고로 요크는 징계받고 여왕에 대한 여론은 어느 때보다 나빠진다.
대형사고를 치고도 해실해실 즐거운 피핀과는 반대로 실의에 빠진 여왕님을 찾은 요크.
“여왕님, 윌리엄 궁 재건에 대해 그렇게 집착하지 마세요.
그건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여왕님 혼자 힘으론 무리라구요. 그러니까 경마의 즐거움보다 다른 데 신경이 쓰이고 사람들이 돈 밖에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 그 일을 여왕님이 못하신다면 리슐리외 공주님이나 다른 후손들이 꼭 해줄 거예요. 나도 도울 수 있다면 꼭 도와드릴 거구요..”
모두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후로 피핀은 미끼가 없이도 곧잘 달린다. 심지어 다시 경기에 나서자 열정적으로 달리며 우승후보와 접전을 펼친다. 끝내 우승에는 실패하지만 달리는 즐거움을 알게 된 피핀이 요크는 자랑스럽다.
내심 피핀을 못 믿고 다른 말에게 돈을 건 공주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마권을 찢어버리려 한다.
그 마권은 우승한 말 ‘삼박사일’의 것이었다.
<로열패밀리> 속 인물들은 모두 계급적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이다. 구세대 자체인 여왕, 제도와 편견에 묶인 국왕, 계급 면에서 동일시되는 피핀과 요크, 여성이란 제약까지 더해진 리슐리외 공주.
그럼에도 이들은 대의를 위한 공명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회생을 시도한다.
시각적 화려함 때문에라도 미디어들은 왕실 판타지를 즐겨 변주한다. 그러나 손예진이 아무리 처연한 연기력을 뽐내도 박보검이 장면마다 눈부셔도 우리는 갸우뚱거린다. 책임을 다하지 않은 위정자들이 꾸려온 대한민국에서 왕실 서사란 역사왜곡을 동반하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까면 깔수록 놀라운 사실들을 쏟아내는 ‘여왕의 기수’까지 나타났다.
입헌군주국조차 아닌 나라에서 전제왕정 후계자처럼 행동하는 국가의 대표자와 거기에 기생하는 비선실세들. 국정농단으로 너덜너덜해진 국가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될 다음 세대들.
가치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분명 생존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삶’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분명 매일의 식사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삶으로써의 날들이 온전히, 가급적 절대다수에게 평등하게 구현되도록 애써야 하는 것이 국가의 대표들이 할 일이다.
개인의 삶은 각각의 모습대로 소중하다. 그런 개인을 스스로 지우고 대의를 선택하는 신념, 희생을 불사한 투신과 조력이야 말로 ‘로열패밀리’의 조건이라는 진부한 교훈은 지금도 진부할 만큼 무시당하고 있다.
스스로가 로열패밀리라 착각하는 천박한 이들에게는 더더욱.
이것이 과연 국가인가 싶은 난장판 속에 살지만 박탈감을 이유로 방관하진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국정농단과 맞닿은 부정에 최초로 의문을 제기했음에도 미디어에서 지워진 이화여대생들의 아픈 연대에서 품위와 미래를 본다. 대의에 투신하고 좌절에도 시도하는 이들을 응원한다. 가려져 있는 희망을 함께 소망한다.
상실감에 매몰되어 방관하는 이가 되지 않겠다고, 타고난 로열티는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품위와 공명심을 저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출처/ 로열패밀리, 한신후
댕기, 로열패밀리 (육영재단, 199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