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The Songs 연작
프린스 판을 바탕으로 비교적 상세한 내용, 결말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권별 부제는 작품 속에서 임의로 발췌한 문구입니다.
#1815,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https://brunch.co.kr/@flatb201/105
#바람 숲의 헤리에타, 그때 바람이 속삭여주었다 https://brunch.co.kr/@flatb201/111
#가브리엘의 숲, 바람이 분다 https://brunch.co.kr/@flatb201/108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의 첫날, 수많은 전사자 속에 한 장교가 발견된다. 프로이센의 군벌 귀족 라인하르트 백작 가의 장남 루드비히이다. 공포에 질린 루드비히는 탈영 중 사살됐다.
1814년 5월 베를린, 리히테르펠데 군사학교에 재학 중인 백작 가의 차남 사빈은 주말을 맞아 집에 돌아와 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평화로운 계절이지만 집안은 음울하고 미세한 균열이 가득하다. 루드비히가 죽은 지 일 년이 채 안된 시간 백작 부부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백작부인은 흙 묻은 옷만 봐도 죽은 장남이 떠올라 고통스러워한다. 명랑한 막내 지그문트는 불안정한 집안 분위기와 어린애다운 두려움으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진중한 사빈은 형의 빈자리를 메워보려 애쓰지만 루드비히의 부재는 너무도 큰 상처다.
죽은 루드비히는 라인하르트 가의 자랑이자 햇빛처럼 빛나는 존재였다. 대를 이은 명문 군벌 귀족가란 배경에 아름다운 외모와 활달한 성격으로 청춘 그 자체처럼 보이는 이였다. 그러나 전쟁의 민낯을 마주한 루드비히는 첫 번째 전투에서 공포에 잡아먹힌다. 그에게 영광을 더하던 배경은 역풍으로 돌아온다. 탈영으로 인한 죽음은 라인하르트 백작을 군 수뇌부에서 밀려나게 한다.
“.. 난 그 애의 죽은 모습이라도 똑바로 들여다봐야겠어요.
.. 그 애가 사관학교의 우등생이었을 때는 당신의 자랑이더니 이젠 당신의 앞날에 커다란 장애가 된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요?..”
백작부인은 공명심으로 아들을 죽게 한 살인자라고 남편을 비난한다. 아들의 죽음에 그의 책임이 없는 것을 알지만 지금 그녀에겐 비난의 대상이 절실하다. 이 슬픔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오직 모르핀과 분노뿐이기에.
아내의 비난에도 백작은 끝내 큰 아들의 시신을 가져오지 않고 다른 전사자와 함께 매장했다. 사살 당해 끔찍한 시신을 아내에게는 절대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 앤 탈영병이야. 이해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
군인에게 그보다 더 큰 불명예는 없다. 난 내 아들에게 도망치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어.
.. 그 앨 사랑하지만 또한.. 그 앨, 용서할 수가 없어”
슬픔을 감춘 채 냉소하는 백작을 보며 사빈 또한 아버지에겐 집안의 이름이 우선인 것 아닐까 서글픈 의문을 품는다. 사빈을 짓누르는 것은 집안만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루드비히의 죽음은 스캔들로 소비되고 지인들은 연민을 가장한 호기심으로 라인하르트 가의 추락을 즐긴다.
‘.. 전쟁이 끝났으면 당연히 축제의 노래를 불러야겠지.
웃고 떠들고 행복해하며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며 단 꿈을 꾸고.
..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언제나 겨울.. 언제나 패전.. 언제나 공포.
프로이센 모두가 승리의 포도주에 취해도 이곳만은 패전의 백기를 싸안고 울고 있는 거야.’
형에 대한 애증으로 사빈은 마음이 번잡하다. 막내 지그문트는 병정놀이나 할 나이임에도 임관을 앞둔 사빈이 루드비히처럼 죽게 될까 봐 전전긍긍이다. 그런 지그문트를 보며 사빈은 형이 남긴 그리움과 과오를 자신은 절대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지극히 사랑하지만 각자의 마음을 숨긴 채 서로에게 상흔을 긋는 라인하르트 가의 사람들. 그들은 아직 각자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지그문트는 오늘 밤도 잠들지 못하고 있다. 매일 누군가와 같이 자겠다고 우기거나 불을 밝혀달라 징징대지만 오늘 밤은 통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답게 원래도 성의 어둠과 바람소리를 무서워하는 지그문트에겐 루드비히의 죽음 역시 피상적이다. 큰형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유령으로 돌아온다면 어쩐지 마주 볼 자신이 없다.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지그문트는 울며 엄마를 찾는다. 그러나 침실에서 뛰쳐나온 지그문트가 마주친 것은 냉랭한 모습의 아버지이다.
백작은 엉망진창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족들의 모습에 넌더리 낸다. 평생을 군인으로 대의 앞에 슬픔을 감추고 꼿꼿이 설 것을 배워온 그는 자의적으로 망가져 가는 가족들을 견딜 수 없다. 강제로 지그문트를 데리고 나서는 백작에게 백작부인은 막내아들마저 죽일 셈이냐며 악을 써댄다.
지그문트를 데리고 나선 백작은 말을 타고 숲 속을 달린다. 아름다운 달빛 아래 밤의 어둠이 공포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며 백작은 지그문트를 달랜다. 너를 야단치는 게 아니라고, 왜 끝난 시간에 붙들려 현실을 분간 못하느냐고, 좀 더 강해지라고.
다음날 아침, 전날 밤의 소동으로 지그문트는 샐쭉해있다. 잠시 후 학교로 복귀하는 사빈과 백작이 탄 마차를 어린 망아지 한 마리가 뒤쫓는다. 지그문트가 배웅하러 나온 것이다.
눈부신 금빛 머리칼보다 더 환한 미소로 배웅하는 동생을 보며 사빈은 새삼 그에 대한 애정과 평화로움에 취한다. 명랑해 보이는 지그문트도 사실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 사빈은 친구 율겐에게 걱정을 토로한다.
“.. 이런 미친 전쟁은 어떤 역사에도 없어. 너나 네 어머니나 네 동생도 똑같이 전쟁에 나간 거야.
우린 모두 같이 전장에 나가 싸웠어. 그러니 같이 다칠 수밖에”
율겐의 무심한 위로는 애증마저 지친 사빈의 피로를 덜어준다. 그러나 루드비히의 죽음은 여전히 가십으로 소비되고 사빈은 신분 차이로 인해 자격지심을 가진 동기의 시비에 말려든다.
백작은 아내와 지그문트를 데리고 아내의 친정 파울라 가르텐을 방문한다. 지그문트의 애교에 백작과 부인은 서로 사랑에 빠졌던 젊은 날을 돌이켜본다.
파울라 가르텐의 저녁 만찬에서 백작은 군에서 은퇴했음을 밝힌다. 외형상으로는 루드비히의 탈영이 빌미가 되어 정적들에 의해 내쳐졌다. 그러나 사실 백작은 가족들, 특히 사랑하는 아내가 망가지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지그문트.. 형은 유령 같은 게 아니에요. 네가 저를 그렇게 부르는 줄 알면 굉장히 슬퍼할 거다.
형은 단지 가끔 네가 보고 싶은 것뿐이야.
.. 네 형은 아마도 아침의 바람 같은 걸 거다. 그렇게 입 맞추고..”
외할머니는 불안정함 속에 방치되어 슬픔의 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던 지그문트를 다독인다. 지그문트는 이제 밤을 무서워하지 않겠노라 다짐해본다.
동기와의 싸움으로 교장에게 불려 간 사빈은 아버지의 은퇴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에 빠진다.
대를 이은 군인집안 수장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같은 군 생활을 버린 백작에게 백작부인은 여전히 냉소한다.
백작은 아내와의 젊은 날과 루드비히의 최후를 홀로 되새기며 괴로워한다. (북구 발도오르 신화에 라인하르트 가의 연대기가 입혀진다.)
봄은 어김없이 모든 곳에 찾아들고 군사학교 리히테르펠데에선 새로 생긴 선술집이 화제다. 아름다운 막내딸 다니엘라 때문이다. 사빈의 절친 율겐도 그녀의 숭배자 중 한 명이다. 선술집의 세 자매는 모두 아버지가 다른 사생아다. 적군인 프랑스 군인과 사랑에 빠졌던 첫째 딸은 주둔지의 불장난이 끝난 후 버림받았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자신과 같은 사생아를 낳은 그녀는 반미치광이 상태다. 어머니와 함께 사실상 집안을 책임지고 있는 둘째 헤스터는 침착한 아가씨다. 귀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사생아의 신분을 바꿔줄 수 없지만. 사려 깊고 우아한 헤스터와 달리 한창때의 발랄함으로 가득한 다니엘라는 미모만큼이나 경박하다. 다니엘라의 목표는 귀족 출신 육사 생도를 꼬셔 이 지긋지긋한 가난과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율겐은 다니엘라에게 축제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청한다. 들뜬 다니엘라는 신분상승의 욕구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가 꿈꾸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소녀 취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백작의 의심대로 모르핀을 끊지 못한 백작부인은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간 남편에게 부린 패악이 실은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위악이란 것을 들키고 싶지 않다. 애증으로 괴롭히고는 있지만 그녀는 백작을 측은하게 여기는 유일한 이다. 군대가 남편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자신이 남편을 끌어내린 것만 같다. 하지만 그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 그녀는 안도하는 중이다.
아버지가 집에 있게 된 것이 즐거운 지그문트와는 반대로 사빈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사빈은 아버지가 개인사를 핑계로 군대 안의 모멸감에서 회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회피는 장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루드비히의 탈영과 동일하다며 실망한다.
그러나 문득 사빈은 형이 그저 전쟁을 처음 마주한 어린애였을 뿐이라는 회환에 사로잡힌다. 눈부신 정원을 함께 산책하는 부모, 특히 안정되어 보이는 어머니를 보며 루드비히 역시 살고자 했을 뿐임에 연민한다.
관계를 회복해가는 부모를 보며 그간 아버지와 형의 부재로부터 어머니와 지그문트를 보호하려 애써온 사빈은 소외감을 느낀다. 루드비히와 외모마저 비슷한 사빈은 자신의 존재감이 지워졌다는 생각에 위축된다. 내내 우울하던 사빈은 백작의 군 제대가 현실도피라며 실망감을 드러낸다. 그간 최선을 다해 분투했음에도 자신은 아버지나 형을 대신할 수 없는 무용한 존재로 여겨짐을 토로한다.
백작은 사빈이 루드비히와 비슷한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훨씬 어른스러움을 느낀다. 백작은 담담하게 사빈이 좋은 아들이라 생각한다고 말해준다. 그간 엄청난 충격을 추스를 틈도 없이 홀로 분투해왔던 사빈이기에 아버지의 덤덤한 애정에 위로받는다.
리히테르펠데에선 축제가 시작되고 사빈 역시 가족들을 초대한다. 차츰 마음을 열어가는 백작 부부는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의지한다. 하지만 축제 분위기로 가득한 학교는 백작부인을 큰 아들의 추억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게 한다.
가풍대로 육사에 입학할 것인지 묻는 율겐에게 지그문트는 생글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애교만큼 겁도 많은 지그문트가 어머니의 바람대로 다른 장래를 고민하는 걸 알고 있던 사빈은 의아해한다. 사빈에게 부끄러움을 안기기 싫었던 지그문트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한 것이다. 어린 지그문트 조차 가족이 안긴 불명예를 가족의 일원으로서 감당하려는 것을 알게 된 사빈은 더없이 씁쓸해진다. 예전처럼 행복해 보이지만 모두들 불쑥불쑥 벌어지는 상처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다.
축제에 간 다니엘라는 신분 차이로 인한 수군거림에 모멸감을 느끼고 율겐은 외모와 달리 소박한 다니엘라에게 더욱 끌린다.
백작부인은 큰 아들에 대한 비탄으로 다른 아들들을 방치하고 상처 입힌 스스로를 자책한다.
헛헛한 사빈은 홀로 말을 타고 숲을 달린다. 달빛 아래 우연히 헤스터와 마주친 사빈. 비슷한 성격의 둘이기에 서로의 외로움 또한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일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짧게 스쳤음에도 둘은 막연한 호감을 품게 된다.
건강이 악화된 백작부인과 가족은 다시 파울라 가르텐을 방문한다.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파울라 가르텐의 정원에서 지그문트는 우연히 (미래의 신부일) 마리아네와 마주치게 된다.
헤스터와 사빈은 여전히 서로에 대한 호감을 외면한다. 다니엘라는 자신의 욕망과는 다르게 소탈한 율겐이 좋아진다. 율겐에게 의지하던 그녀는 실종된 큰언니를 찾아달라 부탁하러 온다.
마침 율겐과 있던 사빈은 어쩔 수 없이 함께 다니엘라의 큰언니를 찾아 나선다. 자살한 언니와 죽은 조카의 시체 앞에 덤덤한 헤스터를 보며 사빈은 충격과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끔찍한 전장의 도살, 시체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공포에 관한 형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이었다면 형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 자문한다.
헤스터는 언니의 연애를 질투했던 과거의 자신을 회상한다. 그녀는 언니가 버림받고 사생아를 낳게 된 것에 자신의 방관 또한 책임이 있지 않을까란 자괴감을 품고 있었다.
율겐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한 사빈과 헤스터는 서로에 대한 호감을 자각한다. 그러나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둘은 여전히 내색하지 않는다.
율겐은 가족의 비극 앞에서도 개인적 욕망에만 충실한 다니엘라에게 질려버린다. 다니엘라의 경박함은 아버지의 폭력으로 죽은 허영심 많던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시켜 그를 괴롭힌다.
백작부인이 임신하자 지그문트는 사빈처럼 좋은 형, 오빠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가족 내 자신의 존재감으로 고민하고 위축되었던 사빈은 위로받는다.
사빈은 우상으로서가 아닌 가족으로, 인간으로서의 루드비히를 이해해간다. 하지만 고지식할 정도로 올곧은 사빈은 지그문트에 대한 애정이 커질수록 절대 실망을 안기지 않으리라 거듭 다짐한다.
졸업한 사빈은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푸른 군복을 갖춰 입은 사빈의 모습에 루드비히의 임관 날이 떠오른 지그문트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15년 3월, 불안함을 내포한 평화의 날이 지나고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키자 사빈과 백작은 징집된다. 집안의 명예를 위해 사빈은 아버지가 소속된 참모부가 아닌 최전방에 자원한다. 루드비히가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감추려 어색하고 짧은 인사만 남긴 채 떠난 사빈이 그리운 지그문트는 괴로워한다. 또다시 소중한 가족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백작부인과 지그문트를 좌절하게 한다.
백작마저 전장으로 떠나자 백작부인과 지그문트는 파울라 가르텐에 맡겨진다. 곁에 있겠다 약속한 남편이 끝내 군에 복귀한 것을 알게 된 백작부인은 임신 중임에도 다시 모르핀에 의지한다.
혼란스러움과 슬픔에 잠긴 지그문트를 외할머니가 다독인다. 적어도 라인하르트 가의 죽은 이들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건 사람이라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그들과 집안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라고.
전장에서 재회한 사빈과 백작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안도한다. 의연하게 굴지만 내심 지그문트를 그리워하는 사빈에게서 똑같던 모습의 큰아들이 겹쳐 보이자 백작은 그가 더욱 안쓰럽다. 사빈은 함께 참전한 율겐에게 자신의 무책임으로 가족들이 상처받게 하지 않겠다고 토로한다.
결국 유산한 백작 부인은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지그문트는 사빈이 사무치게 그립다.
전투가 심해질수록 사빈의 사색도 깊어진다. 사빈은 아버지의 군 복귀가 명예욕 때문이 아님을 깨닫는다.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할 어머니와의 약속까지 저버리며 복귀한 것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이름을 물려주기 위함임을 이제는 안다.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가족에 대한 아버지 방식의 사랑이라는 것도.
끔찍한 전투가 이어지고 사빈은 전사한다. 명예롭고 허무하게.
‘.. 아버지.. 제가 당신의 아들이어요. 아시죠? 전 도망치지 않겠어요. 이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겁내지 않고 절대 도망치지 않아요. 당신의 아들이니까.. 당신의 아들처럼 죽겠어요.
그러니.. 만약에.. 제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냥 절 잊어버리셔도 돼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 친애하는 보나파르트 각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직 채 자라지 못한 내 아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 나는 그 애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떻게 싸웠는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 애의 죽음은 이 워털루에 누워 있는 다른 병사들의 죽음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애를 찾아가는 나도.. 다른 아버지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 울지 않고 도망치지 않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 그들은 아무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단지 책임을 지는 것뿐..’
아마도 자신을 이해해 줄 아버지를, 이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된 형을, 어쩌면 한 마디쯤 나눠볼 수도 있었던 축제의 밤 그녀를, 여전히 눈물 많을 지그문트와의 재회를, 그 만약의 날들을 떠올리며 죽는 사빈.
백작은 큰아들 때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들의 시신을 안아 든다. 무수한 죽음 중 하나이지만 자신에겐 더없이 아프고 소중한 그를.
1815년 8월, 백일천하가 끝나자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다.
덧없을지라도 명예를 위해 주저하지 않던 사빈의 마지막 모습에서 율겐은 책임감을 배웠다. 제대한 율겐은 소원해졌던 다니엘라에게 청혼하고 둘은 진심으로 사랑함을 깨닫는다.
그런 둘을 보며 헤스터는 끝내 전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곱씹는다.
1816년 4월, 다시 봄이 시작되었지만 라인하르트 성은 여전히 서늘한 바람 소리가 가득하다.
가풍을 이어 육사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지그문트는 외가로 떠나려는 중이다.
(아마도 백작 부인은 모르핀 중독으로, 백작은 전투 중 사망해 지그문트는 외가에 맡겨진 듯)
지그문트는 마음속의 사빈에게 인사를 건넨다.
사랑하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주려 애썼던 이름을 이제는 그 자신이 지키겠다 결심한다.
여느 때처럼 바람 소리 가득한 라인하르트 성을 뒤로한 채 지그문트는 미래를 향해 떠난다.
@출처/
…1815, 김진
…1815, The Songs (프린스, 1988)
…1815, The Songs (대화,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