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The Songs 연작
<가브리엘의 숲>은 김진 작가의 <The Songs> 연작 중 6부에 해당하지만 가장 처음 집필된 작품이다.
군수산업으로 부를 쌓은 ‘마르티넬리 가’의 유일한 상속자 페데리코를 중심으로 미국 신흥 부호 ‘멜든 가’, 정통 군벌 귀족 가인 ‘라인하르트 가’의 연대기가 교차된다. 모든 것을 바꿀 전쟁-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각 세대 간 인생유전은 부분적이나마 제국 패권을 다툰 유럽사가 겹쳐진다.
가장 처음 집필되었기에 각 연대기의 중심이 될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1815>와 연계로 보이는 지그문트의 증손자 레니, 선대 멜든 가와 악연으로 얽힌 아르미난테, 주인공 페데리코의 선대 아렐리오와 피오리나 등이다.
9부 연작을 염두에 둔 소개와 복선이 빼곡해 다소 산만한 느낌도 있다. 화풍 역시 스타일을 찾아가는 시기로 보인다. 비록 시리즈 자체는 완결되지 않았지만 방대한 연작의 포문을 연 작품이다.
#1815, 권별 요약 https://brunch.co.kr/@flatb201/104
#1815,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https://brunch.co.kr/@flatb201/105
#바람 숲의 헤리에타, 그때 바람이 속삭여주었다 https://brunch.co.kr/@flatb201/111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친구네 언니가 보던 월간지(아마도 여학생?) 속 연재분이었다. 아마도 단행본 1권 중반부에 해당되는 분량을 보다 그만뒀던 것 같다. 구독 연령대가 내 나이보다 높기도 했지만 김진 작품의 특징인 점진적 호흡이 당시에는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역시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페데리코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단행본 오프닝도 연재분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선박사고로 시작되는 단행본과 달리 연재분의 오프닝은 가브리엘 상이 있는 숲 속에서 시작된다. ‘도무지 이길 수 없어. 나는 죽은 사람과 경쟁해야 하니까..’라는 <레베카 Rebecca, Daphne du Maurier, 1938>식의 나레이션이 기억난다. 아마도 단행본 발간 시 재편집을 거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1815>와 달리 복간되지 않고 초판 완결로 그쳤다.
마르티넬리 가의 유일한 상속자 ‘페데리코’는 학업을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그의 집안이 군수산업으로 부를 확장할 수 있던 것은 후견인 ‘피오리나’ 덕분이다. 페데리코는 엄마 ‘파르미나’가 마차 사고로 죽은 후 아빠 ‘아렐리오’ 마저 선박사고로 사망했다. 아렐리오의 오랜 친구 피오리나는 법정 다툼 끝에 생존하는 유일한 인척 ‘아르미난테’로부터 후견인 자리를 뺏어온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아르미난테는 사실 탐욕스럽고 방탕해 페데리코의 재산에만 관심 있다. 과거 그녀는 집안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아렐리오와 피오리나를 헤어지게 만들었다. 성인이 된 아렐리오는 정혼자 파르미나와 결혼해 페데리코를 낳았음에도 피오리나와 밀회를 거듭한다. 그러나 우연한 사고로 파르미나가 사망하자 죄책감에 둘은 헤어진다.
사랑했던 이의 분신인 페데리코를 외면할 수 없던 피오리나는 갖은 오명에도 그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유난히 외로움을 타는 응석받이로 자란 페데리코에게는 숲 속의 가브리엘 천사상과 피오리나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족이다.
가브리엘 천사상과 비밀을 나누던 유년시절이 끝나갈 때쯤 피오리나는 페데리코에게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라고 통보한다. 인사도 없이 먼 독일로 돌아가 육사에 진학한 친구 ‘레니’까지 페데리코의 우울이 깊어진다.
영국의 기숙학교에 도착한 페데리코는 룸메이트 ‘에밀 루이’, 삐딱하지만 어딘지 헛헛해 보이는 ‘매튜 멜든’을 차례로 만난다. 모범생 루이와 반골 기질 반항아 매튜는 성격차이만큼이나 서먹해 보인다.
페데리코를 데려다주고 온 피오리나 역시 마음이 무겁다. 재산을 노린 아르미난테의 방해와 신분 차이로 그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인 아렐리오가 죽자 피오리나는 유일한 사랑에 자신을 묻었다. 과거에서 빠져나오라고 일갈하는 변호사 ‘로사비오’에게 자신은 그저 법정 후견인이라 일축한다. 그러나 페데리코 마저 곁에 없는 지금 끝나지 않은 회환은 내내 그녀를 괴롭힌다.
사실 페데리코는 아르미난테의 욕심을 눈치채고는 있다. 그러나 늘 외롭던 그는 가식일지라도 다정한 관심을 뿌리칠 수 없다. 우연히 아르미난테의 본심, 피오리나와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된 페데리코는 충격받는다. 여느 때처럼 놀리던 매튜 앞에서 페데리코는 서러움이 폭발한다. 매튜의 무심한 위로에 둘은 가까워진다.
미국의 신흥 거부 멜든 가는 성공을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하는 ‘돈 멜든’의 야심 위에 세워졌다.
아일랜드 빈농 출신인 돈 멜든은 대기근 때 우연히 만난 귀족 ‘맥케이시’로부터 동기부여 받아 새 삶을 꿈꾼다. (맥케이시의 딸 ‘지니에스터’는 후일 멜든 가의 트라우마가 될 돈 멜든의 아내이다. 멜든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맥케이시와 ‘에스터 소령’의 대립에 엮이는 ‘대니 케이프레이’는 아르미난테의 연인이다. 선대의 연대기에 대한 복선으로 보인다.)
보어 전쟁 등을 통해 승승장구한 돈 멜든은 미국으로 이주해 일가를 다진다. 그러나 애정 없는 트로피 와이프의 삶에 절망한 아내는 자살해버린다. 돈 멜든은 단지 족보가 필요해 사온 신부라 여겼던 아내를 사랑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나 여전히 성공이 더 중요한 그는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바로 재혼한다.
아들 ’케이’는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비천한 출신의 여자와 결혼해 매튜를 낳는다. 계급 탈출이 삶의 절대 목표였던 돈 멜든은 크게 분노한다. 위압적인 아버지에게 지친 케이는 자발적 사고를 통해 식물인간이 된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매튜는 아버지의 반항을 그대로 답습한다. 돈 멜든은 신념과 같던 케이, 모습마저 닮은 매튜의 반항이 두고두고 아프다.
집착에 가까운 돈 멜든의 애정이 케이와 빼닮은 자신에게 물리자 매튜는 도피성 유학을 택한다. 케이가 금치산자 상태임에도 상속자 지정을 철회하지 않자 이복형제들은 (매튜의 이복 삼촌들) 소송을 준비하고 매튜는 그런 집안을 경멸한다.
돈 멜든에 의해 강제로 이혼당한 매튜의 엄마는 아들 딸린 변호사와 재혼해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그 아들이 같은 기숙사의 에밀 루이이다. 어머니란 존재에 둔 애증으로 둘은 서먹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데리코를 매개로 둘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된다.
유일하게 매튜를 걱정하는 ‘아그네사’는 매튜에게 객기 어린 반항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라고 조언한다. 그녀의 충고를 되새기던 매튜는 자신의 반항이 순수를 가장한 투정일 뿐임을 직시한다.
합리적이고 자존감 넘치는 아그네사는 한정적인 여성의 삶에서 더 높은 곳을 꿈꾼다.
리히테르펠테에서 임관 준비 중인 레니는 페데리코의 (징징대는) 편지를 받는다.
근대화에 접어들며 명문 군벌 귀족 라인하르트 가의 입지는 약해졌다. 그러나 가문에 대한 긍지와 책임감은 줄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만 남겨두고 부재하는 아버지와 반복된 기다림에 아들마저 그리 될까 마음 졸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레니의 마음을 흔든다. 그럼에도 레니는 선대의 초상화(지그문트의 아버지 알프레드)를 보며 자신 역시 가문의 이름을 저버릴 수 없는 라인하르트 가의 사람임을 느낀다.
1912년, 다가오는 전쟁의 기운 속에 군수산업 부흥과 상속 스캔들로 페데리코는 사교계 가십의 중심이 된다.
재개된 양육권 소송으로 아르미난테와 피오리나는 반목한다. 피오리나는 자신의 사랑처럼 페데리코의 인생이 짓밟힐까 분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페데리코가 성장했음을 느낀다. 언제나 응석을 받아주었지만 실제로 종속되고 위안받은 것은 자신이라는 것도.
이제 진심으로 페데리코에게서, 아렐리오와의 추억에서 떠날 준비가 된 그녀. 일련의 사고로 아르미난테가 죽고 상속권이 지켜지자 피오리나는 과거의 사랑을 묻고 로사비오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어린애 같은 투정 한 마디를 위해 인생을 낭비하냐며 비웃는 돈 멜든에게 악 쓰던 매튜도 깨닫는다. 아버지 케이처럼 돈 멜든의 방식을 증오하지만 자신 역시 그 사랑을 거부하지 못할 것임을, 그로 인해 케이처럼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반목과 회환 속에 각자의 방학을 보낸 소년들은 학교로 복귀한다.
페데리코는 아르미난테의 죽음과 피오리나의 결혼 소식에 상실감을 느낀다. 매튜는 아버지 케이가 마침내 사망했음을 전달받는다. 넘어설 수 없다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라 결심한 듯 매튜는 돈 멜든을 따라나선다. 그런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페데리코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루이와도 심정적인 화해를 하며 매튜는 어른이 될 준비를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페데리코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브리엘 천사상이 있는 숲을 거닌다. 숲에서 나가려면 숲보다 커야 함을 깨달으며 페데리코 또한 자신의 유년이 끝났음을 깨닫는다.
이제부터의 자신들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도.
1914년 사라예보 사태를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페데리코, 매튜, 레니는 생각보다 훨씬 짧을 청춘에 접어든다.
1916년, 아그네사 포레와 결혼한 매튜는 베르덩에서 실종된다. (사망 추정)
1917년, 아그네사는 매튜의 본가 패서디나에서 그의 아들 에드가를 낳는다. 멜든 가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신흥재벌로 부상한다. 반면 군수산업 강자였던 마르티넬리 가는 종전 후 몰락한다.
1918년, 레니는 임관 후 첫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다. (이후 전투 중 실종, 사망 추정)
1919년, 페데리코만이 열아홉 살이 된다. 그는 그 뒤로 꼭 다섯 해를 더 산다.
<가브리엘의 숲>은 <1815>처럼 세계사의 격랑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조망한다. <1815>가 한 가정에 집중해 집단 속 개인을 탐색했다면 <가브리엘의 숲>은 스스로 선택한 가치를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갈 수밖에 없는 성장통을 그린다. 그것이 상실이든 죽음이든 예정된 미래와 상관없이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숲을 빠져나와 성장한다. (그리고 모두 죽는다;;)
이후로 김진 작품 속 여러 세계관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성장과 상실은 회환과 그리움을 동반한 바람의 모습으로 불어온다. 그 바람의 기원을 조망한 <가브리엘의 숲>은 김진 스타일의 <수레바퀴 밑에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출처/
가브리엘의 숲, 김진
가브리엘의 숲 (프린스,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