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The Songs 연작
방대한 세계관 위에 세워진 김진 작가의 작품들은 외전이나 스핀 오프도 많은 편이다. 그중 <The Songs> 연작 중단은 작가 자신도 못내 아쉬웠던 것일까. 시리즈가 진행되진 않았지만 일러스트 등에 빈번한 소재로 등장했다.
<월간 르네상스>에 발표된 단편 <바람숲의 헤리에타>는 <1815> 완간 후 십여 년이 지나 발표된 외전이다. 한동안 온라인으로 유료 열람할 수 있었지만 별도의 단행본으로 발간된 적은 없다. 짧은 분량에도 <The Songs> 연작이 애틋한 팬들에겐 깜짝 선물 같은 작품이다.
#1815, 권별 요약 https://brunch.co.kr/@flatb201/104
#1815,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https://brunch.co.kr/@flatb201/105
#바람 숲의 헤리에타, 그때 바람이 속삭여주었다 https://brunch.co.kr/@flatb201/111
가풍대로 베를린의 육사 리히테르펠데에 다니게 된 ‘지그문트’는 기숙사에 입소했다. 물론 베를린에는 지그문트의 본가 ‘라인하르트 성’이 있지만 유일한 후계자로 그만 생존한 지금 성은 잠정 폐쇄되었다. 멀리서 빛나는 성은 지금은 곁에 없는 가족과 성 안에 불던 바람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주말이면 지그문트는 슈타인버그 남작가에 머물고 있는 외가 식구들을 보기 위해 외출한다. 그때마다 그를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은 연애편지 심부름이다. 지그문트의 선배들은 남작가의 아름다운 영애 ‘마르가리타’에게 경쟁적으로 구애 중이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를 어린애 취급한다. 고작 한 살 연상임에도 지그문트 역시 예외일 리 없다.
지그문트는 깨닫지 못했지만 오누이처럼 매일 투닥거리던 둘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온다. 마르가리타에게 정식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상대는 지그문트의 선배 ‘카알’로 한미한 가문 출신인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노리고 있음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 기숙사 하녀인 ‘헤리에타’와의 연애야 당연히 불장난일 뿐이다.
혼담이 가시화되자 마르가리타는 지그문트와 산책 중 얼핏 마음을 내비친다. 지그문트에겐 사무치게 그리우면서도 돌아가기 두려울 정도로 고독한 성이건만 마르가리타는 ‘언젠가 그 성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다’고 희망한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그문트는 어린애처럼 장난만 친다. 아니, 지그문트는 자신의 감정이 어느 방향을 향해 부는지 아직 잘 모른다. 오히려 그의 마음속을 흔드는 것은 마르가리타가 해준 옛이야기이다. 바람의 신 제피로스를 짝사랑해 미쳐버렸다는 소녀 헤리에타가 사실 전사한 연인을 기다리다 죽어갔다는 슬픈 전설 때문인지 지금문트는 심란해진다.
감기가 걸린 채 기숙사로 돌아온 지그문트는 우연히 하녀 헤리에타의 간호를 받는다. 마르가리타와 결혼할 카알을 짝사랑한다는 그 기숙사 하녀이다. 신열 속에 지그문트는 마르가리타의 꿈을 꾼다. 꿈속의 그녀는 바람 부는 라인하르트 성에서 그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꿈에서 깬 지그문트는 소문과 달리 헤리에타가 카알과 연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 막 버려지는 참이라는 것을 목격한다. 카알에 대한 혐오감과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마음에 북받친 지그문트는 결국 카알과 주먹다짐을 벌인다.
뒤늦게 의미를 자각한 꿈은 예지가 될 수 없다. 손 내밀었지만 거절당한 헤리에타도, 어렵게 내민 마르가리타의 손을 미처 잡지 못한 지그문트도 이 상실감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혼식 사열을 서게 된 지그문트는 아름다운 신부를 바라본다. 그 아름다운 초상이 언젠가 불현듯 그의 마음속을 휘돌고 갈 바람 중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전쟁으로 소중한 이들을 잃은 몇 년 후, 지그문트는 외형상으로 변함없이 화사하고 쾌활한 청년으로 자라는 중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상실감에 의지해 유지되고 있다. 지그문트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내내 반추하며 가족의 이름을 복원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 부채의식은 공명심이라기보다 고통의 시간을 함께 한 이들에 대한 강박 같은 의리이다.
<바람숲의 헤리에타> 속 지그문트는 상실감으로 인한 강박을 안고 또 한 번의 이별을 지난다. 지나가고서야 깨달았기에 이 감정은 더욱 아릿하다. 그러나 아직 덜 자란, 아니 성장하고 있는 중인 지그문트는 몇 번 더 이별과 상실을 맞아야 할 것이다. 그제야 성으로 돌아갈 만큼 성장했을 것이다.
깨닫기도 전에 끝나버린 첫사랑은 타인의 상실감에 중첩되며 마음속에 바람 한 자락을 보탠다.
내내 돌아보게 될 쓸쓸한 바람을.
@출처/
바람숲의 헤리에타, 김진
월간 르네상스, 바람숲의 헤리에타 (서화, 19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