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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an 11. 2016

성홍열, 쓸쓸한 유산


비어즐리나 쉴레가 연상되는 그림체, 종종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는 문학적 상상력에 기반한 서사, 탐미적인 BL정서. 현란한 수사들로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이정애 작가는 그림체만큼 독특한 세계관의 작품을 그려왔다.

1990년대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가군이 발견되었지만 관련 제도까지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주먹구구식 청보법으로부터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작가들이 필사적이었다. 이정애 작가의 세계관은 뜬금없는 장미꽃 화면으로 가리기 특히나 힘들었다. 열악한 출판 상황과 관료제 안에서 고군분투하던 이정애 작가는 작가적 야심과 필력이 절정에 이른 <열왕대전기>의 판금조치로 절필을 선언한다.


데뷔작인 <헤르티아의 일곱 기둥> 이후 이정애 작가는 주로 <월간 르네상스>에 다수의 중, 단편을 발표했다. 질타를 받던 그림체를 보강하고 독자적 세계관을 공고히 구축하던 시기가 아닐까 한다.

<성홍열>은 작가의 다른 단편 <일요일의 손님>과 더불어 서사의 경계가 모호한 고딕소설 같은 작품이다. 중의적인 플롯 안에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 Henry James, 1898> 같은 매력이 녹아있는 이 판타지는 정서적으로 좀 더 애틋한 결말을 낸다.

#일요일의 손님, 아스라이 https://brunch.co.kr/@flatb201/156




몇 년간의 아프가니스탄 특파원 활동을 마친 안드레아스가 지인인 앙느의 집으로 온다. 환대에 기뻐하는 그는 수척해진 모습만큼 어딘가 음울하다. 앙느의 어린 딸 미쉴라는 성홍열을 앓는 중인데 좀처럼 열이 내리질 않는다. 미쉴라는 앙느에게 나쁜 흑마법사가 자신의 혼을 노리고 있다며, 자신의 주술사인 디아블레로가 나타나면 쫓아달라는 헛소리를 한다. 급기야 몇 년 만에 보는 안드레아스에게까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디아블레로.. 이 바보 멍청이.. 다른 마법사를 찾으라고 했잖아..”


안드레아스는 피치 못할 모임을 앞둔 앙느 부부에게 자신이 미쉴라를 지켜보겠다고 한다. 이내 고요해진 저택에는 안드레아스와 열에 들뜬 미쉴라 둘 뿐이다. 애써 외면하는 미쉴라에게 안드레아스가 다정하게 말한다.


“주인님.. 이젠 제가 보기 싫어지신 건가요?”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고 미쉴라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한다.


“부탁이야, 디아블레로.. 돌아가..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 슬퍼서 가슴이 터져버릴 거야”

“..난 괜찮으니까 다른 마법사를 찾아.. 응? 나보다 더 강하고 용감한..”


어리지만 패기 넘치는 마법사 미쉴라를 주군으로 둔 주술사 디아블레로. 그 용감하고 아름다운 까만 표범이 안드레아스의 진짜 모습이다. 과거 둘은 나쁜 흑마술사들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해 왔다. 그러나 아직 어린 미쉴라는 막강한 적의 교활함에 패배한다. 앙느의 딸이라는 위장을 입고 인간계로 도피하기 전 디아블레로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던 미쉴라는 그가 먼저 떠났음을 알게 된다.

마지막 전투가 무사히 끝난다 해도 마법계를 모두 잊은 평범한 인간 소녀가 될 뿐이라는 미쉴라에게 디아블레로가 말한다. 내내 혼자이던 자신을 찾아와 함께 싸워준 미쉴라가 있었기에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나날이었다고, 나의 아름다운 주군인 당신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인간계로 도피하게 된 미쉴라를 지키기 위해 디아블레로는 안드레아스의 모습으로 먼저 떠난다.
험난한 전투 속에 서로에게 유일한 미쉴라와 디아블레로


저택에 음산한 정적이 찾아들자 적의 습격을 예감한 디아블레로는 표범으로 변신해 미쉴라를 보호하려 한다. 그러나 마침 귀가한 앙느 부부가 목격한 것은 정신을 잃은 딸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안드레아스이다. 미쉴라의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도망치려는 그에게 어쩔 수 없이 대응 사격을 하고 안드레아스의 모습을 한 디아블레로는 미쉴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죽는다.


안느는 안드레아스가 종군 특파원 생활로 너무 끔찍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며 연민한다. 그때 한숨 자고 난 뒤 열이 내린 미쉴라가 말한다.

용감한 까만 표범과 모험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번 더 그 꿈을 꾸고 싶다고.

평범한 인간인 앙느부부에겐 조현증 환자의 유아 살인미수로 보일 뿐이다.
연민하는 앙느
열이 내린 후 과거의 기억을 망각한 미쉴라



<성홍열>의 평행세계는 디아블레로의 마법계와 안드레아스의 인간계, 미쉴라의 유년기와 유년기의 종결로 이루어져 있다. 성홍열이란 통과의례는 두 세계와 두 시기를 연결한다. 이런 중의적인 배치는 짧은 지면 속에서 효과적으로 캐릭터를 변주한다.

극 중 마법사들의 전투지인 베트남, 레바논, 아프가니스탄은 무의미해서 더욱 참혹한 베트남전과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동분쟁을 의미할 것이다. 양쪽 세계의 미쉴라가 동일하게 어린 것은 타협도 편견도 없이 완전한 순수함은 유년기에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디아블레로가 홀로 치르는 마지막 전투는 안드레아스의 비참한 최후가 겹쳐지며 비극이 강조된다.


안드레아스는 전쟁 후유증으로 미쳐버렸을 뿐일까? 아니면 정말 미쉴라를 구하러 온 까만 표범일까?

확실한 것은 지난하고 끔찍한 현실에서 안드레아스가 철저히 혼자였다는 것이다. 연대할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도 한 번 더 용기 냈을지 모를 일이다. 철저히 홀로 남겨질 영생은 죽음과 다름없기에 그는 미쉴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다.

파국을 예상하면서도 이상을 저버리지 못하는 고결한 이들이 그 품성으로 인해 맞이하는 소멸, ‘홀로 너무나 피폐하고 괴로웠을 것’이라는 앙느의 연민은 이 쓸쓸한 종말에 대한 증언인 셈이다.


안드레아스의 간호 아래 회복된 ‘소녀 미쉴라’가 유년기를 끝낼 준비가 되었듯 디아블레로의 희생을 통해 ‘마법사 미쉴라’는 새로운 세계에 무사히 안착한다. 유아의 열띤 시기를 지난 미쉴라는 유년기의 홍역도 마법계의 기억도 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지켜내고 싶은 세계를 발견한 어느 날, 미쉴라는 디아블레로가 남긴 유산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지 않을까?





@출처/ 성홍열, 이정애

월간 르네상스, 성홍열 (서화, 1989. 2)

이정애 컬렉션 1 키 큰 지나의 다리, 성홍열 (대원씨아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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