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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ug 18. 2016

러버스 키스, 여름의 스펙트럼


연인들에게 아름답지 않은 계절은 없겠지만 여름은 특히 젊은 연인들과 동일시된다. 무덥고 어지럽게 눈부신 계절과 뜨거울수록 힘차게 질주하는 청춘은 서로 닮아있다. 

요시다 아키미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여름 안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심해 보이는 이들은 사실 부서지고 말 것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 중이다.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을 맞이한 <러버스 키스> 속 여섯 명처럼.

1990년대임을 고려해도 <러버스 키스>의 설정은 다소 작위적이다. 감정의 연결고리는 철저하게 히로인 커플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물리적 이별의 계기가 되는 주인공의 사연은 막장 드라마에 가깝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을 지나쳐 온 후 방황의 사연은 맥거핀이 되고 오히려 무심히 스쳐간 풍경들을 곱씹게 된다. 달의 이면과 같이 어둡거나 쓸쓸한 사연은 애틋한 공조를 부른다.





해변에서 시간을 때우던 리카코는 우연히 동급생 토모아키와 마주친다.

후지이 토모아키, 번듯한 외모의 지역 명문가 외아들. 학업도 과외활동도 최고에 넘치는 배경으로 모두의 선망을 받던 그. 하지만 지금의 그는 온통 나쁜 소문뿐이다. 이를테면 혼자 살고 있는 고급 멘션에 매일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온다던가, 임신시킨 여자를 아버지의 병원에서 낙태시켰다던가 하는. 뭐, 리카코 역시 어른들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 예쁜 외모로 되는대로 살고 있다.

어째서일까.. 해변에서의 간소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계기로 리카코는 토모아키에게 관심이 생긴다. 원나잇 상대를 끼고 스칠 때와는 다른 부드럽고 일상적인 인상에 사로잡힌다. 사귀자는 리카코의 충동적인 제안을 토모아키는 짐짓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해변에서와 달리 그의 눈빛은 냉랭하기만 하다. 어두운 밤바다 위에 뜬 차가운 달처럼.

도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뎌내려는 토모아키
현재 그의 유일한 좋은 소문 -_-;;


첫 데이트의 날, 리카코는 자신의 충동적인 제안을 이미 후회 중이다. 데이트 분위기가 좋을 리 없다.

의미 없는 잠자리를 가지며 토모아키는 리카코가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자기혐오에 빠진 리카코에게 토모아키가 찾아와 말한다. 소모품에도 감정은 있으니 사귀는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고. 리카코는 자신이 토모아키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날 이후 리카코는 불량한 생활을 접고 해변에도 가지 않는다.

자기혐오로 트라우마를 극복해보려 애쓰는 리카코


며칠 후 만취 상태의 리카코는 우연히 마주친 토모아키에게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 것을 사과한다.

다음 날 숙취 속에 리카코가 깨어난 곳은 소문과 달리 초라한 토모아키의 원룸이다. 아르바이트도 여러 개 하고 있는 그는 곧 자퇴할 거라고 말한다. 좋은 집안을 내팽개치고 먼 지역의 다이버가 되기 위해 떠날 거라는 그의 계획에 리카코는 의아함을 느낀다. 명랑함으로 가려두었지만 어쩐지 절박할 정도로 단호한 그의 태도에 리카코는 더는 캐묻지 않는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의 단호함에서 같은 종류의 절박함을 느낀 리카코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성추행당했던 기억에 되는대로 남자들과 어울린 자포자기의 마음을.


상처를 공유하게 된 둘은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보고 위로하며 진짜 연인이 된다.

‘이제까지의 자신은 거짓말인 것처럼’ 충만한 매일매일의 여름을 함께 하는 둘.

여름의 끝 무렵, 토모아키는 떠난다. 리카코는 잡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찾아가겠노라 약속할 뿐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그녀는 이 여름 속을 씩씩하고 빠르게 걸어간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 요시다 아키미는 잠시 살았던 가마쿠라에 대해 늘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한 <바닷마을 다이어리 海街diary, 2007>의 시작은 <러버스 키스>의 일 년 전후로 보인다. 아마도 이제 막 방황에서 벗어나려 하는 토모아키는 코다 요시노의 지나가는 연인으로 등장한다. 비밀을 공유하게 되는 스즈처럼 새로 등장하는 이도 있지만 오자키 주류점의 막내 후타처럼 과거의 인물이 성장하기도 한다.

또 <러버스 키스>에서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토모아키의 사연에 대한 설명도 더해졌다. 겉모습만 멀쩡한 채 썩어가는 ‘꽃 저택’의 전모는 토모아키의 극단적인 선택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서정적인 서사만큼 부드러운 화풍을 구사한다. 토모아키 역시 다소 동글동글한 인상의 꽃미남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성마르고 날카롭던 <러버스 키스>의 화풍이 캐릭터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러버스 키스>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후지이 토모아키


<러버스 키스>는 히로인 커플인 리카코와 토모아키의 사연을 중심으로 감정의 폭풍이 전개된다.

챕터별 부제 ‘Boy Meets Boy’ ‘Girl Meets Girl’에서 알 수 있듯 파국이 예상된다 해도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정면 돌파하려 한다. 리카코의 후배 사기사와, 오가타, 친구 미키, 동생 에리카는 엇갈리는 시간들 속에 짐작과는 다른 일들을 목격하고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성숙해진다.

이들은 처한 환경 속에서 모두 약자이다.

주체적 존재라기엔 미성년 신분이고 고통에 대한 최고의 도피는 자기파괴나 자기혐오 쪽이 더 가까운 나이다.

그들의 고민은 감정과 관계로 인한 것이기에 일방적인 해결책 또한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각자가 품은 마음속의 폭풍을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견디며 현실을 직시한다.

리카코는 차가운 손을 붙들어 온기를 모을 수 있게 되고 토모아키는 평온한 마음으로 밤바다의 달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각자 ‘그 사람을 만나버린’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Tempest와 Je te veux는 전혀 다른 멜로디를 들려주지만 열망의 간절함은 다르지 않다.


요시다 아키미는 마음속의 폭풍을 어쩔 수는 없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연약함’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다. 쓸쓸한 인고의 시간을 알아봐 주고 손 잡아준 누군가의 위로는 연인의 시작으로 부족함이 없다. 때문에 주인공의 물리적인 이별은 공간적인 그리움을 넘어 공조의 응원을 보내게 된다.


여름은 스펙트럼으로 부서지고 수많은 면은 각각으로 빛난다.

그 반사각들은 서로 다른 각도로 뻗어나가고 굴절되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눈부시다.

순간에 더욱 빛나는 청춘의 속성과 같이.

리카코와 토모아키는 오래도록 함께 여름을 보냈을까?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한 시기를 함께 완성한 그들은 여름의 기억 안에서 언제나 연인이다.





@출처/

러버스 키스, 요시다 아키미 (ラヴァ-ズキス, 吉田秋生, 1996)

러버스 키스 (시공사, 2003)

바닷마을 다이어리 (애니북스, 200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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